♣복음말씀의 향기♣ No3594
8월26일[연중 제2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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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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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_FnwG_abOg
(이상진 아모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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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웃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우리나라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상호 존중하며, 이웃 간의 평화를 지향하는 기품있고 양식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국격은 바닥인 데다, 천박하고 폭력적이며,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다지 가까이 있는지?
언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웃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침략과 약탈,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의 야수 같은 폭력성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입은 피해는 천년 만 년 동안 싹싹 빌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수 방류를 통한 또 다른 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 안에 대대손손 가장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 민폐의 끝판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정도만 다녀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인데, 백주대낮에 너무나도 당당히 지구촌 마을의 공동 우물인 바다에, 자기 집에서 발생한 냄새 진동하는 폐수를 퍼부은 일본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저자들의 머릿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대체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지? 자신들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오염수를 자신들의 영역에다 자랑스럽게 퍼붓는 꼴은, 마치 열 명이 먹기 위해 라면을 끓인 큰 냄비에 바보 얼간이 같은 한 사람이 침을 뱉은 형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방류를 막고자 애를 써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합심해서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그런데 방류 저지를 위해 제일 선두에서 깃발을 들어올려야 할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경천동지할 노릇입니다. 우리 수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울부짖고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들은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라는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상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다시 또 있을까요?
자기들이 싸질러놓은 오물, 자기들 영토에 묻어 놓던지, 저장해 놓던지, 하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다 하는 행동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젠 늦었다고, 이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사안 같습니다. 어떻게든 인류 공동 우물인 바다를 악의 무리요 인류의 적인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신랄한 표현을 다 사용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뼈 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 5-7)
일본이라는 나라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나름 지구촌 사람들 앞에서 G7 회원국, 선진국이라며 어깨에 힘 딱 주고 꼴값을 떨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평화, 자유를 외치지만, 뒤꽁무니로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저들의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인류를 굽어보시어, 좋은 해결책을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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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LgG_hwsf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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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삶에서 우리는 언제 길을 잃게 되는가?>
2018년 대한민국 청년 수 1,400만 명, 이 중 69.5%가 무기력증, 불안증, 우울증을 경험했고 이 수는 4년 전보다 약 30%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아마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삶이 힘든 20대가 보면 폭풍 오열 각인 영상」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행복해지자고 사는 건데 왜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면서도 결국엔 길을 잃고 말까요? 아이 때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빠진 우리도 그래서 길을 잃습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행복은 하느님께 속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어린이는 이를 잘 압니다. 하지만 어른은 돈이나 범죄집단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쉽게 길을 잃는 이유는 행복을 위한 핵심 계명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 교사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길을 잃은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낫습니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도 이런 내용입니다. 어린 크리스토퍼 로빈은 ‘100에이커 숲’에서 곰돌이 푸를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기숙학교에 보내지면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삶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흐릅니다. 우리는 크리스토퍼가 자라서 에블린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마침내 매들린이라는 딸을 갖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전후 런던의 한 여행 가방 회사에서 효율성 전문가로 일합니다. 직업에 대한 요구와 전쟁의 트라우마로 그는 가족, 특히 딸 매들린과 멀어집니다. 주말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딸만 시골로 보내고 자신은 일에 매진합니다.
우연히 곰돌이 푸는 런던 도시에서 크리스토퍼 로빈을 만납니다. 로빈은 푸가 반가우면서도 귀찮습니다. 그를 100에이커 숲으로 돌려주러 왔다가 자신이 일에 지쳐서 가족과 친구들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숲에는 괴물이 있었는데 결국 자신이 괴물 헤팔럼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100에이커 숲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구덩이에 빠졌더라도 잠시 기절해 있으면 비가 와서 물이 차올라 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발버둥 치면 더 가라앉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둥둥 떠내려가면서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운명에 자기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이 그러한 동물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은 그런 환경에서 살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도, 회사에 다니는 것도 가족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족과 친구를 돌볼 시간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제가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친밀한 관계는 하나도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그리도 쉽게 잊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운전할 때 초보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차선에 집중합니다. 저도 전방에서 안개가 껴서 길이 안 보일 때 길이 아닌 벽을 보며 운전한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를 보며 결국 길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정말 벽만 보고 운전하다가 진짜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 적도 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삶을 헤쳐나가게 합니다. 그 두려움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곰돌이 푸와 친구들은 100에이커 숲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럴 때 친구를 생각할 여유가 생깁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두려움을 해결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의탁하면 지금 이 순간 나는 100에이커 숲에 머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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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오늘 복음은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습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습니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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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하신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추는 것이다. 끝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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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미국에서 5년간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을 귀국하는 신부님의 송별회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캠핑가고, 자전거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분 한분 귀국하는 신부님들을 보내고 보니 이제 저의 차례도 멀지 않았습니다. 송별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입니다. 며칠 전에 술에 관련된 단어를 읽었습니다. ‘수작(酬酌)과 짐작(斟酌)’입니다. 한국의 음주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술잔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이 술을 마신 후에 술을 권하는 것을 수작(酬酌)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흑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수작 부린다고 합니다. 더 부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는 그 앞에 ‘개’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것저것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무에는 관심이 없고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면 이 또한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어린 수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술잔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보고 따라주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저도 술자리에서는 ‘짐작’을 잘 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워지면 바로 채워주곤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제가 짐작을 잘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짐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작의 달인이십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미리 방을 예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못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짐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 못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날이 오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짐작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짐작도 못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 술자리에서 짐작은 잘하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는 짐작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과 보아즈는 따뜻한 마음으로 수작하였고, 배려와 관심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롯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보아즈는 그런 롯이 밭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짐작하였습니다. 수작과 짐작이 만나서 롯과 보아즈는 결혼하였고, 이 가정을 통해서 다윗이 태어났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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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제는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은 ‘전기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린이에게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노트북의 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무런 막힘없이 전기는 벽에서 온다고 답하였습니다. 아이의 눈으로는 그것이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전기는 우리의 벽에 있는 콘센트를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물었다고 합니다. 벽에 있는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 아이는 그 질문에는 답을 잘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기는 전선을 타고 오는데 변전소를 거쳐서 옵니다. 변전소의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가면 발전소에서 옵니다. 발전소의 전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발전소는 석탄 태운 에너지를 이용해서 전기를 만듭니다. 전기는 전기유도장치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커다란 자석과 코일이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전기는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석탄은 3억 년 전 식물이 썩어서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지층을 ‘석탄기’라고 부릅니다. 식물은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광합성은 태양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라는 에너지는 태양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태양은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까요? 태양에는 수소가 있습니다. 수소는 핵융합을 통해서 에너지를 만듭니다. 이렇게 태양 에너지의 기본이 되는 수소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과학자들은 그것을 ‘빅뱅’에서 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팽창하는 우주는 빅뱅이 시작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원소는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수소, 산소, 탄소, 질소입니다. 다른 원소는 폭발하는 초신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습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은 별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빅뱅이 있어서 우주의 질서가 생긴 것처럼 태초에 말씀과 하느님이 있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우주와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저도 제가 태어난 시골집을 가보았습니다.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이 있습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피난 가기 좋은 장소였다고 합니다. 김제에서 포졸이 오면 정읍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정읍에서 포졸이 오면 전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포졸들은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면 쫓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주의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알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하느님께 돌아가면 됩니다.
최고의 과학자들이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하느님이 계셨다고 믿습니다.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듯이, 하느님께서는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과학자들이 우리는 별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믿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비오 10세 교황을 기억하며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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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고백, 증언>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15-20)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되고, 사람들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베드로 사도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또는 증언이 네 번 나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앞의 두 번은 예수님을 향해서 한 말, 즉 신앙고백이지만, 그 신앙고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신앙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세상 사람들의 질문과 사도들의 답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도(신앙인들도)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그렇게 증언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왜 성당에 다니는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순교자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보고서 그분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믿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온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믿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이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뽑으셨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살과 피가 아니라”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일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베드로 사도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일과 비슷합니다.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성모님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고,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 “너는 행복하다!”라는 말씀도 “너는 복되다.”인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또는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특별히 선택하신 일은 베드로 사도의 응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응답은 곧 ‘믿으려고 노력한 일’,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바쳐서 믿음을 증언한 일’ 등입니다.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좁혀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성령의 인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1코린 12,3)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과 증언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원래 신앙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1코린 1,2), 신앙생활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하지 말라는 뜻이고(마태 17,9), 진정한 신앙고백은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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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참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교인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그 시대 바리사이들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부모들과 교육자들, 그리고 사제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거나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범을 보이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술 취하거나 태만한 부모, 품행이 바르지 않은 스승, 세상 것에 심취한 목자가 자기 자녀와 제자들 그리고 자기 양들에게, 정작 자신은 지키지 못하는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며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당시 교회 안에 있던 두 가지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 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명예와 권력을 좇는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겉은 화려하고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텅 빈, 잘못된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매인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직무와 책임을 맡은 이들이 서로 친구요 형제로 대하며 말을 넘어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교회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분 자신을 삶의 지표로 삼아 다양한 역할과 책임을 맡은 이들이 겸손하게 형제들을 섬깁니다(20,26 참조). 부끄럽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용기를 냅시다. 우리를 위하여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우리의 종이 되신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기억하며 형제들에게 다가가 말뿐 아니라 행실로도 그들을 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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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는”>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구원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 앞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적처럼 앙숙 관계였던 모압의 여인, 룻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예로운 가문이던 유다, 그것도 다윗 가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사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 여인들 앞서 한탄하며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룻기 역사서 1장 20절)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즐거움’, ‘행복’이라는 의미의 ‘나오미’로 부르지 말고 ‘쓰다’라는 의미인 ‘마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꿔서 불러 달라고 한탄스럽게 말하지요.
그래서 그녀는 베틀레헴의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찌 그대들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룻기 역사서 1장 21절)라고 자신의 처지를 또한 한탄합니다.
사실 아들이 죽은 며느리가 나오미에게는 말 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기치로 남편의 친척인 보아즈와 룻을 부부로 맺어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줍니다. 룻은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아 유다 가문을 이어가게 합니다. 실의에 차 있던 나오미에게 동네 아낙네들의 칭송 소리가 들려 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룻기 역사서 4장 17절)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공공연하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천이 없는 위선을 꼬집어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오 복음 23장 2절-3절)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은 지워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완전한 사람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기를 좋아하며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고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존칭어인 ‘스승’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23장 11절-12절)
진실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위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위선은 악의 뿌리와 연결되어서 진실의 반대인 사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사탄은 뱀의 형상으로 여인을 유혹할 때 자신이 지혜가 있고 여인에게 무엇인가를 베풀어 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안에는 악의 세력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인을 파괴로 몰고 가면서도 여인을 하느님처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속은 그렇지 못한데 겉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위선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 꼬집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에서 신앙인이 배워야 할 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구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제나 희망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과 다르게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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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기 13장 1절-16절 / 신명기 6장 4절-9절 / 11장 13절-21절)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 (민수기 15장 38절-39절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기 3장 7절-8절)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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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생각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선한 열매는 손과 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데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정성껏 하느님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실천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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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70년대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식 축구 코치 헤이든 파이는 원정팀이 사용할 라커룸을 분홍색으로 칠하게 했습니다. ‘계집애 같은 색’으로 적들의 남성적 저돌성을 악화시키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 뒤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키닉 스타디움은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색깔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 점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척합니다. 색깔 하나만으로도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나약한데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겸손을 강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 존재에 대한 큰 믿음을 갖출 수 있으며,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서만 나의 이웃과 함께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잘난 채 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철저하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를 더 높이려고만 합니다. 이런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위선자라고 꾸짖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느님에 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말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만 하시고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보고 따라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를 높이려고만 했습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도 커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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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있는 그대로>
마태오 23,1-1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있는 그대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헛되이
나 아닌 나로
보이지 않고
참으로
나인 나만으로
보이기를
헛되이
너 아닌 너로
보지 않고
참으로
너인 너만으로
보기를
헛되이
나 아닌 나로
불리지 않고
참으로
나인 나만으로
불리기를
헛되이
너 아닌 너로
부르지 않고
참으로
너인 너만으로
부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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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섬김의 관계>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자신을 낮추면 자연적으로 섬길 수 있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자신을 낮춰도 섬길 수 없겠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섬김은 존경과 함께 최고의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섬김은 겸손이 밑바탕 돼야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겸손과 낮춤은 같은 것일까? 겸손의 엄밀한 뜻은 낮춤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니지만 낮추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도 아니고 높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겸손과 사랑 가운데서 사랑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랑이 극진하면 할수록 상대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잖습니까?
아기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그러잖습니까? 아이가 알아듣도록 아이의 말을 하고, 아이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 숙이잖습니까?
그래서 섬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전에는 저의 교만을 반성했는데 이제는 사랑의 부족을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섬김의 리더쉽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아버지, 스승, 선생이라고 부르지도 불리지도 말라고 하시는데 엉뚱한 생각인지 모르는데, 아버지라고 불리지는 말아야 하지만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은,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이에게는 윗사람이지만 어머니의 리더십은 아버지의 리더십과 다르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서로를 돌봄과 관련하여 얘기하며 어머니처럼 서로 돌보라고 당부합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가 병이 나면 다른 형제들은 남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은 쉬운데 어머니의 사랑이 제겐 왜 이리 어렵습니까? 지금은 그래도 많이 어머니다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옛날엔 제가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기도 하고
생물학적으로 호르몬의 문제라고도 변명하기도 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남자였어도 사랑이 극진하니 어머니의 사랑을 어머니들보다 더 잘 실천하였잖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핑계 대거나 변명하지도 말고,
억지로 자신을 낮추려 하지도 말고, 겸손한 것처럼 위선을 떨지도 말고, 다만 더 사랑하는 쪽으로 방향 잡고 노력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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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사람에게 다가 오시는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3,5)
‘하느님을 찾는 사람’임과 동시에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삶에 지쳤을 때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더불어 힘을 받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저의 '하늘'이란 오래전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무려 26년전 시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끼며 많이 나누는 시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나무같은 삶에 지쳤을 때 즉시 호수가 되어 가까이 찾아 오신 하늘이신 주님을 담자는 것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바로 어제 금요강론 주제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예수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제 금요강론 교재중 여러 주옥같은 말씀을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또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는 그 행복은 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님이십니다.”
역시 아어지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우정의 대상이자 형제애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블레즈 파스칼 철학자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답인 이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평생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무지와 허무속에 방황하다 죽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러니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참나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저절로 나오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은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언급했는데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이요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참삶이 되기 위한 방법을 배웁니다. 오늘 시공을 초월하여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첫째, 진실한 삶입니다.
진실한 삶자체가 구원입니다. 위선, 거짓, 허영의 반대가 진실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또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는 허영의 헛된 위선적 삶을 단호히 청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정말 깨어 살지 않으면 이런 허영의 본능적 삶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둘째, 겸손한 삶입니다.
겸손의 반대가 교만의 무지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교만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고 참으로 겸손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의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흡사 인간 평등의 대헌장 선언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이런 자각에 투철할 때 겸손한 삶이겠습니다.
셋째,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의 절정이 섬기는 삶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주님이 계십니다. 섬기는 삶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섬기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삶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섬김과 종의 영성뿐입니다. 이를 요약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교만으로 올라가는 이는 낮아지고 섬김과 겸손으로 낮아지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권위와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뿐일 것입니다. 이런 복음적 가치관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세속의 지도자들로 확산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섬김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섬김과 더불어 성인의 중용의 영성이 빛납니다. 섬김의 학원에서 평생 섬김의 여정중인 평생 섬김의 학인들인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의 배움터에서 영원한 초보자임을 또 깨닫게 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룻기도 재미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하고 겸손하신, 섬기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롭게 계시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닮은 진실하고 겸손한 섬김의 참 좋은 사람 룻을 참 좋은 보아즈와 짝을 맺어 주시고 오벳이란 아들을 낳게 하시니 오벳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고 이 족보에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을 닮은 존엄하고 품위있는 삶을 위해 진실한 삶, 겸손한 삶, 섬기는 삶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자발적 선택과 훈련, 습관화에 해당됩니다. 부단히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자는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강조한 참 좋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해서도 하느님 중심의 진실하고 겸손하고 섬기는 삶이 바로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에 충실하므로 참 좋고 아름다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만들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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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위선이란?>
오늘 복음(마태23,1-12)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분노는 크게 두 개입니다.
하나는 오늘부터 시작된 '위선에 대한 분노(마태23,1-36)'이고, 또 하나는 '성전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분노(요한2,13-22)'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하고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1-12)
'위선이란?'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나 기도할 때에는 "아멘!"이라고 말해 놓고서는, 성당 밖에서는 그리고 삶으로는 아멘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기도하고, 삶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것', '나의 구원의 절대적 전제인 용서와 화해를 계속 미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우리의 위선'입니다.
'거짓과 위선'은 이천 여 년 전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우리 안에도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우리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예수님의 기쁨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우리들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가 겸손하게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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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m1BIngC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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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우리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격의 결단이
간절히
필요한 실천의
때입니다.
악습을 끊고
선을 행하는
실천입니다.
우리의
현실 안에
스며있는
온갖 모순을
여태까지
반복해온
잘못된 행위를
끊어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은 쉬워도
실행은 더디고
어렵습니다.
오염되고
매몰되어지는
우리의 건강한
실행입니다.
반성적 결단으로
건강한 실행을
부활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올바른 실행은
올바른
사랑입니다.
올바른 사랑은
올바른 정신의
실천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는
첫시작은
언제나
아름다운 삶을 위한
올바른 복음의
실행입니다.
올바른 삶이란
사람의 삶을
우리가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란
실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실행이 없는 사랑
실천이 없는 신앙은
모두 가짜입니다.
비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랑을 위해
올바른 실행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하느님의
자비안에서
자아의 참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올바른 실행으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상황과 환경
공동체가
엉망인 것이
아니라
비판과 비난으로
점철된 세월을
살아온 그 사람이
엉망인 것입니다.
말만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길
제자신부터
기도합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는 양심과
복음을 통한
올바른 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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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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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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