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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왜 이리 더디 오십니까? 대체 어디 계시니까?
신앙 안에서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의 속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시편 작가의 말씀처럼 주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 조급하고 성급한 반면 주님 측의 반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더딥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나 허둥지둥 대던 제자들의 모습과 뱃고물을 배게삼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리고 배 안에 물이 가득 차게 되자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상 사태를 맞아 제자들은 업무를 분담했을 것입니다. 한 제자는 더 세게 노를 젓고, 다른 제자는 배 안에 고민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또 다른 제자는 배의 방향을 잡아주고...
다들 한번 살아보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순간, 제자들은 기가 차지도 않은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야단을 피우는 와중에 스승님께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강도 높은 전도 여행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에, 예수님의 육체는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어디 앉기만 앉으면 꾸벅꾸벅 조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체험을 해봤기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볼맨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조급한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은 한없이 느긋하십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제자 교육을 단단히 시키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신원, 당신의 정체성을 말과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즉시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돌아보니 저도 참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님의 시간이 되면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왜 이리 더디 오시냐고, 대체 어디 계시냐고, 투덜거리고, 갖은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떨치고 좀 더 너그럽고 큰마음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안에 언제나 현존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인생 여정에 굳건히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불안과 두려움, 무서움의 차이점>
복음: 마태오 8,23-27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결국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하시며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하느님 아드님으로 대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 무서운 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불안이 가라앉아야 사라지지 무서운 것들이 사라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안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의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이란 ‘무언가를 잃을 걱정’입니다. 그 무언가는 궁극적으로 생존과 관계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잃을까 봐 이성이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대상은 ‘무서운 것들’입니다. 무서움은 우리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엇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는 거센 파도와 바람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그 무서운 것들로 생명을 잃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측면이고 무서움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이성이 육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을 고쳐야 아래 것도 고쳐지는데 우리는 자칫 아래 것을 고치며 윗것도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사라질까요?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교통사고나 강도를 만날까 두렵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세상 모든 것들은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두려운 데 바람과 물과 싸우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차원이기에 마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마음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만약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불안합니다. 불안은 ‘환경’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죽을 위협에 있는 환경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놓으면 1미터 밑에 땅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렵고 생명을 잃게 할 것들이 무섭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려면 무서운 것들을 치우는 일이 아니라 불안함을 없애면 됩니다. 아기들은 불안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품에 안겨있으면 평화롭습니다. 어머니가 모든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지면 아이는 착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싸움과 같은 것으로 아이들이 불안해지면 아이들은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우리 불안을 없애주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지으면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두려운 것들과 맞서 싸웁니다. 믿음이 있다면 나의 창조자에게 청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도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심을 믿게 되자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리고 세상의 위협은 더는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처럼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합시다. 아이들이 이성이 생기면 부모의 뜻을 따를 때만 부모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부모 돈을 훔치면 부모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무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하느님 마음이 기쁘다는 것을 느끼고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그렇게 온 평화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움츠러들지 맙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군중을 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때 말이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을 찾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배가 물속으로 잠길 것 같은 어려움에 부닥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했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예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사람이 비가 내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강으로 투신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관했습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또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 여인은 강으로 투신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이 사람은 큰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여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투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회가 밀려옵니다. 만약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이런 기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자기의 무관심이 이제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카뮈의 소설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대형 참사를 겪은 당사자는 큰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단순히 그때의 사건 그 자체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기가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픔으로 자리 잡게 되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렇듯 자기 기억을 만드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끔찍한 기억을 간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것, 나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나와 상관있으며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관계 안에 살아갈 때, 지금 사는 이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가 완성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반대편에 서려고만 합니다. 그때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처럼 외면하신다면 어떨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았던 많은 기적과 말씀에서 믿음을 굳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겁을 내고 울부짖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한 우리의 모습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임에도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면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함을 당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관심한 모습이 아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보호 아래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기회는 노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문을 밀어 넘어뜨릴 때 모습을 드러낸다(카일 챈들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인생의 풍랑을 건너본 이들은
알고 있다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누구이신지.
고난의 쓴 바람을 맞아본 이들은
알고 있다네.
그분의 권능이
어디에 머물고 계신지.
호수에 불어 닥치는
인생의 바람은
말씀의 꾸중으로 다스려야
고요해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믿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용기입니다.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날 잡아줄꺼라는 믿음이 확고할 때
우리는 자신있게 뒤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키보다 훨씬 깊은 곳에
다이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건
내가 빠져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힘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적이 선물로 주어지지 않지만
믿는 이에게는 삶이 늘 기적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인내롭게 기도해야 하는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용기를 동반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들에게 큰 풍랑은
그저 두려움일 뿐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8; 4,11-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4,11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니,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