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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 마르코 6,45-52
나로 산다는 것 = 지옥에 산다는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시기 위해 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호수 위에서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유튜브 동영상 중의 하나는 어떤 교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강의였습니다.
조회수가 거의 150만이 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우려했던 대로였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존엄성을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하라’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나, 책에 쓰인 이론들, 혹은 타인의 욕망에 아이 때처럼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이 어떤 의견을 자신에게 제시하면 술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도 충고하지 않으니 타인도 자신에게 충고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제나라 임금 ‘환공’과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환공이 성인들의 책을 읽을 때 윤편은 그 책을 쓴 성인들이 이미 죽었다면 그 책을 읽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술 찌꺼기처럼 진짜 술도 아니며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윤편은 자신이 수레바퀴를 깎는데 그 기술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타자의 이론은 그 자신이 지닌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주체적인 자아의 존엄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를 두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나의 존엄한 자기를 찾으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새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나 자신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로 산다는 것이 참 행복일까요? 지옥입니다.
아기는 왜 울면서 태어날까요? 울어야 호흡이 시작되고 그래야 뇌와 온몸에 산소가 공급되어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웃어도 우는 것만큼이나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까요?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로 살게 되었을 때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일까요? 그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주체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니 이제 나로 살아야 합니다.
불안해서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다시 ‘나’라는 자리를 부모에게 줍니다.
그러면 다시 편안해집니다.
엄마 품에서 아기는 울음을 멈춥니다. 아기는 그때 부모에게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억압받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은인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나’가 고개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때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자신도 부모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때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부모가 볼 때는 자아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것이 부모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녔던 ‘완고함’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믿고 의지하며 그 지배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나’란 주님의 이름을 지닌 참 부모가 주는 양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며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되려거든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아가 일으키는 모든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분 뜻에 휩쓸려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가 되니, 나는 곧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작지만, 또한 큰 신앙 체험을 하신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보내오신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우선 하느님께,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하느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큰 은총 주심에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줄었던 수입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주셔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큰 기적은 제가 평생 몸이 매우 아팠고 불안과 두려움에 힘든 삶을 살았고 영적, 육체적으로 아픈 가족들로 인해 암 수술을 받았고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겪고 있었는데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 많은 강론 계속 보면서 용기 내며 살아왔지만, 마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죽었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특히 한밤중에 두려움이 덮쳐 숨쉬기가 힘들 때면 수도 없이 되뇌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었으니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제 온몸의 기운이 빠지더니 경직이 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무서운 공포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동안 별별 기도, 수 없는 미사, 안수기도, 병원 치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체력이 떨어지니까 더 견디기 힘들었던 수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 신부님 말씀을 통해 치유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아픈 저보다 먼저 죽을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에서 제가 먼저 죽었고 또 죽으려고 하니 오히려 저를 힘들게 했던 가족들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나는 죽었다, 난 주님이다, 난 사랑이다’ 기도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 드리며, 신부님 좋은 말씀, 십일조 계속 강조해 주셔서 저처럼 힘든 영혼들 다시 살게 해 주시길 기도드리며 주님께서 신부님과 함께 해 주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나로 산다는 것, 이것이 곧 지옥의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구해주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아라는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 배 밖에서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요한 1서 4,11-18
마르코 6,45-52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일컬어 사람들은 ‘불안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저만 해도 요즘 각양각색의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고에 대한 두려움, 노화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도자로서 관구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장애나 치매가 와서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탈모에 대한 두려움 ㅋㅋㅋ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찢어질듯이 가난할 때, 첨단 문명과 거리가 멀던 시절에는 걱정이나 불안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고 최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걱정과 불안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불안 증세는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으로 발전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런 견해를 펼칩니다.
인생에 있어서 적당한 불안감, 적당한 두려움은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외에는. 다시 말해서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짓눌려 허덕이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 인간적 사랑,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가 구원되기만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었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바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 결과 불가능을 가능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사랑의 소유자는 아무리 큰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뛰어넘습니다.
그 어떤 곤경속에서도 견뎌내고 이겨냅니다.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6일 [공현 후 수요일]
복음: 마르 6,45-52 :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재촉하여 당신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풍랑과 맞바람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 없이는 도무지 풍랑과 맞바람을 이겨 내고 건너편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말씀께서는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신다.
맞바람은 뜻하지 않게 맞게 되는 유혹과 곤경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풍랑과 맞바람에 뒤흔들리는 배 안에서 당신 제자들을 단련시키려 하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셨다. 낯선 사람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시니까,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겁에 질려 유령인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려 소리치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어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절)고 하신다. 그분은 겁에 질린 그들을 이렇게 격려하시고 안심시키신다. 바로 주님께서는 도와주러 오시게끔 비명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치려 하신 것이다.
그분은 왜 나무에 못 박히셨을까? 우리에게 그분 겸손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으로 부풀어 올라 본향으로부터 멀리 쫓겨났다. 그 길은 세속의 풍랑으로 끊어졌으니, 나무를 타지 않고서는 도무지 본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분이 몸소 길이 되셨다. 그 길은 바로 호수를 건너가는 길이다. 당신이 호수 위를 건너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배를 타고 나무를 타야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을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이와 같이 우리도 세상 어려움 속에 있을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길 수 있으나,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그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할 때 더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풍랑으로 뒤흔들리고 어지러울 때, 거기에 십자가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 번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또한 성인 성녀들 또는 순교자들의 순교의 모습에서 그들이 평안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라고 하겠다.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 지금은 또 풍랑을 만나서 고생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총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또 역경을 만나면 그 은총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고 싶은 생각도 하고 자포자기한 풍랑을 맞이할 때가 많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모시도록 하자 그러면 그 풍랑은 가라앉을 것이다.
자연을 섭리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않겠는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은총의 때를 기억하며 다시 우리 자신을 가다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