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5
9월26일[연중 제25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ZCAvGiD_fM?si=fPA-MXsWToOorx0v
(성바오로수도회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류역사상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경청하고 실천하신 성모님!>
오늘 성모님께서는 꽤 의아한 일들을 겪으십니다. 루카 복음 사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성모님께서 왜 예수님을 찾아가셨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성모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마리아, 아무래도 아드님께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출가(出家) 이후 상황이 정말 안 좋은 것 같아요. 저러다가 제명대로 못살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보이고 계신 예수님의 행보는 점점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목숨 걸고 있는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논쟁 중에 틈만 나면 그들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유다 지도층 인사를 넘어 헤로데의 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아드님 걱정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의아한 생각을 갖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 성모님께서 예수님 외에 또 다른 출산을 하셨던가?
사실 이 구절을 빌미로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모님의 평생 동정 교리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말고도 다른 자녀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교부들께서는 아주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당시 유다 문화 안에서 형제라는 표현은 친형제뿐만 아니라 사촌 형제, 오촌 형제, 육촌 형제들에게도 적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 사가가 사용한 형제들이란 표현은 광의(廣義)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의구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 안부가 걱정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이신데,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시지도 않았다는 것, 한 마디로 문전박대했다는 것인데, 그리고 던지시는 말씀 역시 성모님 입장에서 용납하기 힘든 부분이라는 것.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이다.”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 불효막심한 말씀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모님을 극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잘 경청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정확히 실천한 사람은 바로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고, 곱씹고 또 곱씹었으며, 온전히 말씀 안에 머무시고, 그 말씀을 온 생애를 통해 실천하신 성모님이셨기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주시며 하늘과 땅의 어머니로 인정하셨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q8NI1MX6Ns
++++++++++++++++++
<우유부단함 해결법;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여우로 살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지만,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정말 많은 반론이 나올 수 있겠지만,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이가 없기에 성모님은 기분 나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지극히 단순한 사고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결정도 쉽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한 어머니가 “밥 먹어라!” 하고 불렀는데 뛰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만이 그 어머니의 자녀들입니다. 이렇듯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구별하는데 핵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은혜를 받았기에 부모의 뜻을 따르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형제로 보아야지, 육체적 형제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죽음과 함께 영원히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너무나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오늘 예수님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냐, 가족이냐의 문제로 갈등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호합니다. 그분은 아버지 뜻, 한 가지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내 뜻에 치우치면 우유부단해지고 그러다 잘못된 선택을 하여 평생 후회하게도 됩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하나만 하면 됩니다.
영화 ‘레이버 데이’(노동절)은 한 10대 아이가 새롭게 결합한 부모의 뜻에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 노동절 주말 동안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엄마 아델은 10대 아들 헨리와 함께 살고 있는 우울한 미혼모입니다. 그녀는 헨리를 낳고는 네 번이나 연속으로 유산하며 극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남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델과 헨리가 쇼핑하던 중, 피를 흘리고 있는 프랭크라는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옵니다. 프랭크는 탈출한 죄수로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설득합니다. 아델은 두려움 때문에 동의합니다.
프랭크는 아내와 자기 아기를 죽인 살인자처럼 보이지 않게 매우 부드럽고 섬세합니다. 사실 프랭크의 아내는 바람을 피우며 남편을 조롱하고 있었고 부부싸움 중에 사고로 아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아기는 욕조에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부부싸움 하다가 배우자와 자녀를 죽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집 주변을 수리하고, 헨리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조금 있으면 상하게 될 복숭아들을 이용해 파이를 만들어줍니다. 프랭크는 지명수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모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델이 헨리를 막습니다. 헨리도 프랭크가 싫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랭크가 엄마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자신은 점점 소외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프랭크는 둘을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을 치자고 합니다. 그러면 헨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합니다.
헨리는 갈등합니다. 돈을 챙기고 소지품을 챙기는 상황에서 프랭크는 이혼한 아빠, 경찰관과 은행, 여자친구와 동네 주민들에게 자기 집에 탈옥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와 프랭크가 사랑하는 것을 갈라놓을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떠나려는 찰나 옆집의 신고를 받고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프랭크는 아델과 헨리를 묶어놓습니다. 인질로 해야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5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잡혀갑니다.
시간은 흘러 헨리는 여자친구와 결혼도 하고 프랭크가 알려준 방식으로 복숭아 파이를 만들어 유명한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잡지에서 본 프랭크는 헨리에게 편지를 쓰고 엄마를 만나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헨리는 엄마가 같은 곳에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편지를 써 줍니다.
25년이 지나 프랭크는 아델을 찾아옵니다. 헨리는 더는 엄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마지막을 걸어갈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헨리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우울증 엄마와 범죄자 새 아빠의 결합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에 순종할 때 둘은 결합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부모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순종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버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법에 모든 이의 뜻이 될 때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선택 장애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한다고 해 봅시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아무거나 동전 뒤집기 해서 시킵니다. 결국 선택 장애가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짜장면을 먹으며 ‘차라리 짬뽕시키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고민합니다.
결정 장애나 충동적 결정은 같은 데서 나옵니다. 다 자기의 뜻을 지나치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두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데 있고 그다음은 욕심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이들은 내 선택이 틀려서 내 자존감이 상처 입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두려워하다 시간이 촉박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것을 선택해서 잃게 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저하다가 다 잃게 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가 ‘나’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한 유일한 해결법은 ‘순종’입니다. 그리스 격언에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기 위해 많은 수를 고안해냅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봅니다. 고슴도치는 여우가 다가오면 귀찮아하면서도 한 가지만 합니다. 몸을 공처럼 둥그렇게 웅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우는 가시에 찔려 다른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일단 후퇴를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미사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든지, 선행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여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나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만 물으면 그만입니다. 그 뜻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만 생각하는 고슴도치가 됩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빈터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빈터에 양을 놓아서 키웠더니 양들이 풀을 다 뜯어 먹었고, 빈터는 곧 황폐해 졌다고 합니다. 빈터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빈집도 비슷합니다. 한 두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했고, 빈집은 곧 쓰레기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빈집에는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2023년 여름은 ‘폭염, 가뭄, 산불’로 곳곳에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런 기상이변은 4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인류가 내 보내는 온실가스, 슈퍼 엘니뇨, 태양의 흑점, 화산폭발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기상이변의 가장 큰 원인은 인류가 무심코 내 보내는 ‘온실가스’라고 합니다. 지구의 강, 바다, 하늘, 산은 결코 빈터가 아닙니다. 결코 빈집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류는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빈터와 빈집으로 생각하였고, 쓰레기를 마구 버렸습니다. 온실가스를 마구 내보냈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소중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서 우리의 소중한 지구를 잘 보존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소작인’입니다. 소작인이 관리를 잘 못하면 주인은 소작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새로 건축하는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후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저는 본당 신부를 2번 했는데 성전을 신축한 적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2번 모두 성전을 신축한 신부님의 후임으로 갔습니다. 성전을 신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는 들었지만 제가 직접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전임 신부님들은 상가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다른 본당에 모금 강론을 다녔고, 물품 판매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마련한 성전이기에 신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전입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신축하였으니, 이제 마음의 성전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건축 자재가 필요했습니다. 마음의 성전에는 다른 것들이 필요합니다. ‘기도, 친교, 말씀,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의 성전을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허물어질 수 있지만 마음의 성전은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 동안 교회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의 힘만이 아닙니다. ‘기도, 말씀, 친교, 나눔’으로 세워진 마음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성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 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9-2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 하신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셨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믿음을 갖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어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죽은 다음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나의 참 가족”이고, 뜻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고, 충실한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실행’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맏아들이 처음에 ‘싫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분명히 ‘죄’이고, 그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한 다음에 일하러 간 것은 ‘삶의 완전한 변화’를 뜻합니다. ‘다른 아들’이 처음에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대답한 것은, 정말로 가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일 수도 있고, 가려는 마음도 없으면서 말로만 그렇게 대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가려는 마음이 있었는데도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처음에는 충실한 신앙인이었다가 타락해서 죄인으로 끝나버린 것을 뜻하는 것이 됩니다. 가려는 마음도 없으면서 말로만 대답한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말을 한 죄를 지은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은 죄도 지은 것이 됩니다.
두 아들 외에도, 가겠다고 대답하고 실제로 가서 일한 아들도 있을 수 있고, 싫다고 대답하고 끝까지 가지 않은 아들도 있을 수 있는데, 어떻든 예수님의 의도는 ‘회개하면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과 ‘회개하지도 않고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는 죄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자들이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것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거부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고,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그 멸망은 자기들이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후회만 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1-25) 이 말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는 진리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그래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그 말씀의 ‘생명력’을 받기를 거부하는 일이고,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여기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는 말은, 신앙인답게 살지도 않으면서 신자인 척한다는 뜻입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으면서도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잊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은총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사람, 생명의 길을 배웠는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거나 다른 길이 더 좋다면서 다른 길로 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인데, 배웠고, 알았으면서도 잊어버린 사람들은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것이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허무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의 영원하고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영원하고 참된 지혜’는, 무슨 공부나 수행이나 수련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 삶으로 실행하면서, 그 말씀 그대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하고 참된 지혜’를 얻는 방법입니다. 영원하고 참된 지혜를 얻는다는 말과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에즈라기의 말씀을 듣습니다. 에즈라기는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유다인이 조국을 떠나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십 년가량 지난 뒤,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가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에즈 1장 참조), 유배자들은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에즈 2장 참조)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우선적 과제는 무너진 주님의 집을 복구하는 일, 곧 폐허가 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재건 공사를 시작하며 그들이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그러나 그 뒤 공사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그들을 시기하던 적대자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일을 꾸미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에즈 4―5장 참조) 그러나 예언자들의 격려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중단되었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성전 건축을 무사히 마친 유다인들이 성전 봉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고, 성대하게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묵상하여 봅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곧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 모시기’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된 우리도 ‘하느님 모시기’를 그 어떤 일보다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신비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시는 바로 우리 각자가 이제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
[대구대교구 장운철 마르첼리노 신부님]
‘생뚱맞다.’라는 말은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에 쓰이는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생뚱맞은 말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말 이제 지겹습니다. 좀 고만 좀 하이소.’ 그래도 ‘사랑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늘 주시던 예수님께서 생뚱맞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루카복음 12장 51절에서 53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사랑과 분열은 서로 반대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생뚱맞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당에서 한번은 이런 신자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매님이셨는데 애 아빠는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이 성당 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미사에도 남편 몰래 나오고 집에 머슴애가 둘 있는데 빠는 아이들이 성당에 나가는 것도 싫어해서 그 아이들도 아버지 몰래 미사에 나왔었습니다.
근데 큰애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니까 그제야 첫영성체를 시키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것도 그 자매님이 첫영성체가 너무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데려오셨고 하는 김에 3학년인 동생도 같이했으면 좋겠다 하면서 두 형제를 같이 데려왔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 아빠 모르게 하는 겁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지요. 그러면 어느 쪽이든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도 그런 면이 있는 모양입니다. 선택이라는 것 말이지요.
우리가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느 한쪽은 버린다는 것을 함께 뜻합니다. 신앙을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버렸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버렸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가족까지도 신앙 앞에서는 무감각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 버린 것은 아닙니다. 가족도 물론 사랑하지만 하느님을 가족 위에 계신 분으로 섬겼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그 자매님은 신앙과 남편이 모두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남편 몰래 신앙생활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을 남편보다는 더 위에 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당신의 어머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곧장 달려나가는 것이 도리일 텐데. 이번에 예수님은 또 생뚱맞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위에 두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보다도 위에 두셨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성모님의 슬픈 모습을 뒤로 하고 골고타로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선택 때문에 우리가 희생도 치르고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선택 이전에 당연하지요.
여러분들의 삶 안에서도 많은 갈림길에 서서 어느 쪽을 가야 하나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택하고 싶지만 언제나 망설입니다. 우리 욕심 때문에요.
그때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아마 그 순간에는 아쉽고 서글플지라도 그 시간이 지나면 큰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올 것입니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된 계약의 궤는 다윗 왕조를 지켜 주는 표징이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 말씀보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아 바빌론 유배의 아픔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고 성전을 재건하는 기쁨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약과 말씀을 되찾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선언하시어 선택과 혈연이 아닌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단순히 혈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신앙의 모범이심을 암묵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곰곰이 숙고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에" 머물러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대목들의 배치(配置)가 루카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카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카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비율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더 낫다고 감히 고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 안에서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우리는 형제입니다.’ 하고 인사하시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 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 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 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님께 인간적인 생명을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울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돈에 맞춰 일하면 직업이고, 돈을 넘어 일하면 소명이다. 직업으로 일하면 월급을 받고, 소명으로 일하면 선물을 받는다.”
직업과 소명에 대한 차이를 명확하게 일러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봉사와 희생은 직업일까요? 아니면 소명일까요? 당연히 ‘소명’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왜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는가?”라면서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직업의 측면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관점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먼 훗날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을 데리고 갈 수 없으며, 또 애지중지했던 나의 귀한 소장품 역시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지위는 어떨까요? 이 역시 모두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즉, 직업의 측면보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소명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명의 측면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의 삶은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면서 주님 관점으로 살게 될 때 가능합니다. 가장 힘 있고, 가장 높으신 분의 선물이 형편없는 것일까요?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훌륭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군중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가족이니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관점은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뛰어넘습니다. 하늘 나라에 단순히 친한 사이인 인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만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소명의 측면이 가득한 주님의 관점이 필요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모두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저 힘만 든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장 큰 선물을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루가 8,19-21 (예수님의 참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참가족>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을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믿음께로부터
믿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
희망께로부터
희망을 듣고
희망하는 사람들
사랑께로부터
사랑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주님의 모습과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도 주고 도전도 줍니다.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종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데 공짜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뜯어보면 당신 어머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고 하시니 공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이자 도전입니다. 이것은 마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영광스럽게 주어진 것과 같이 대단한 영광이요 행운이요 기쁜 일이지만 도전의 어려움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은 어떤 도전이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라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말씀은 실천하기 어렵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초대를 마리아처럼 받았으니 마리아처럼 응답하여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단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
-"주님의 전사답게, 학인답게, 형제답게, 자녀답게 삽시다"-
지난 주일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God’s love is boundless)”, 정말 평생 끊임없이 노력해야할 하느님의 사랑 닮기입니다. 계속되는 총체적 위기, 총체적 난국의 사회요 나라입니다. 도처에서 힘들다, 아프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광야인생여정, 길을 잃고, 빛을 잃고, 꿈과 희망을 잃고, 중심을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병든 이들이, 거칠고 사나운 괴물같은 이들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 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건 살아있어도 참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살기 힘들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라 합니다.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 유망하다는 참 혼란스럽게 하는 뉴스입니다. 믿는 이들이 아니라 해도 참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본연의 참나를 찾아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참 절박한 시절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잠깨어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십자가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과 주모경을 바친후 만세육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도 아랫집 어른 수녀님 면담 고백 성사후도 역시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 드리고 애국가 1절만 기도하는 마음,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도록 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같은 애국가를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마음도 숙연해지고 감동하게 됩니다. 모두 한 동포, 한가족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참가족”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종교 유무를 떠나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한가족이요 예수님의 참가족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앎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인간이 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막연한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하느님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 참 나를 알게 되어 겸손과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삶에 저절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뒤따르게 됩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처방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뿐임을, 또 어느 때보다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각자도생, 지옥같은 작금의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즈라기 말씀이 우리에겐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 키루스에 이은 다리우스 페르시아 임금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집을 짓도록 적극 도와주니 성전 준공과 봉헌에 파스카 축제의 거행입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의 하느님 중심의 정체성 또렷한 삶을 위해서는 보이는 가시적 중심인 하느님의 집에서의 공동전례는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일치의 중심, 일치의 구심점이 없으면 한가족 공동체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톨릭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공동미사전례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이 아닌 그 무엇이, 그 누구가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있을런지요! 공동체든 개인이든 중심의 부재나 상실보다 큰 재앙도 없습니다. 세상 우상들이 그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잡으면 사람은 급기야 괴물이 되고 폐인이 되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하느님 집 성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하느님의 집 성전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요 우리 각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또 각자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모습은 그대로 불가시적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을 상징합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전갈에 주님의 반응이 예수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이 주님의 참가족임을 검증하는 잣대가 됨을 봅니다.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실현시켜 주는 구체적 항구한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주님의 학인답게, 주님의 형제답게,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평생교육과 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주님 중심의 참가족, 한가족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평생교육에 날마다 거행하는 매일미사 수행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중심의 참가족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성장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좌우명 고백기도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평생
한결같이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주님의 자녀(子女)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성스런 주님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오늘 복음(루카8,19-21)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알려 드립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이르십니다.
어제 합천호와 합천댐이 내려다보이는 악견산 등산을 했습니다. 합천본당에 와서 예전에 해 왔던 등산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은 특별한 일 없으면 등산을 합니다. 저는 묵주기도 바치면서 천천히 오르내리는 등산을 좋아합니다. 가다가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만나면 사진 찍고 ㅎㅎ
어느덧 합천본당으로 부임해 온 지가 26일 째입니다. 합천이 참 좋습니다. 땅덩이도 크고 넓고 주변에 아름다운 산들도 많고 물도 좋고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원창조 질서가 그래도 많이 살아 있어서 참 좋습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잘 간직하고 있는 피조물들이 울 인간들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더 잘 순종합니다. 그래서 자연의 피조물들이 좋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기쁩니다.
지지난번 주일(9.17)과 지난 주일(9.24)에 세 군데 공소미사를 다녀왔습니다. 합천본당에는 삼가공소, 쌍백공소, 야로공소가 있습니다.
오래된 공소를 잘 지키고 있는 공소 신자들을 만나뵈옵고, 그들의 순수성과 단순함을 대하면서, 이들이 바로 저의 어머니요 저의 형제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 전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저는 고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저는 고아가 아닙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새로운 어머님과 형제들을 많이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어머니가 되어주고 형제들이 되어줍시다!
화이팅!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RpXdHcTCw38?si=Ay7WIVkeGsegV8k3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말씀은
어머니같이
혈육같이
우리의
피와 살이
됩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혈육은
집착이 되고
실행을 잃어버린
말씀은 언제나
요란스럽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말씀과 실행입니다.
말씀의 가치는
실행의
가치입니다.
말씀의 뜻을
온전히
실행으로
새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를 압니다.
말씀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말씀의 진가는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가족도
가정도
말씀의 뼈대와
실행의 살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해야할 일은
모두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은 말씀과
실행뿐입니다.
서둘러
주님께 가야 할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 보다
더 좋은 실행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회개로
말씀을 단단히
잡고 따라갑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발견하고
실행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평화를
지키는 것도
말씀의
실행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랑의 오늘
되십시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따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