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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 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 1942)
작성자:천야
작성시간:2020.12.03 조회수: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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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 1942)(부논문),
R. Barbaras,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 3541. (P.4616.)
-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프랑스 철학자.
- 바르바라(Renaud Barbaras, 1955-) 프랑스 철학자. 생클로드사범출신, 파리1대학교수.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지만, 목차를 자세히 읽으면서 그리고 각주의 인명들을 넘겨보면서, 예전에 들었던 것과 다른 느낌을 갖는다. 이 책이 쓰여지는 시기는 프랑스 심리학이 거의 가장 확장되었던 시기(1940년대)이며 또는 그 많은 심리학 연구분야들 만큼이나 여러 분파들로 갈라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심리학이 다룬 몇 가지 개념들을 철학에서 배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확장이란 거의 모든 인간의 사고는 심리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고, 관념, 추론, 개념화, 용어 설정(구조) 등으로 진행하면서 인문학과 인류학의 토대로서 인정하는 정도로 간다. 심리학을 단위 학문으로서 설정하기 위하여 더 이상 다루지 않은 개념으로는 성향(un inclination), 감동(l’émotion) 등이 있다. 아마도 이런 개념들은 심리학의 개념보다 도덕론의 개념일 수 있으리라. 그러면 심리학은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작동에 관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적 활동의 기제로서 행동 관하여, 주로 다루는 길로 가고 있었던가?
전자는 벩송이 생리학의 실증을 빌어 와서 신경체계 이전의 의식(인식)의 작동으로 추억과 기억을 다루었다. 이러한 논의에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신화) 담론은 프로이트 식의 무의식의 실재성을 다룬다. 벩송의 경우는 자연의 자발성을 인정하면서 인식론에서 본능[직관]을 지성과 다른 갈래로서 중요한 인식의 하나로 다루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실재성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었다가, 사회에서도 무의식이 관습화된 의식의 한 부분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 초자아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그러면 후자는 무엇인가? 이 중에서 하나는 의식이 신체를 통하여 작용(행동)과 반작용(반응)을 다루면서 신경체계와 연관을 다룬다는 측면이 하나 있다. 이 분야에서는 두뇌가 신경체계 뿐만 아니라 인식의 전반을 대리한다고 여긴다. 다른 하나는 관념과 용어를 다루는 방식으로 공간화 개념을 익히는 것이 신체 성장의 발달과정과 닮아 있다는 발달심리학 쪽이 있으며, 이와 나란히 신체의 기호로 등장하는 방식에 대한 체계가 언어와 마찬가지로 구축되어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추상으로서 학문의 용어와 관념은 18세에 거의 완성 또는 충만 된다. 비판주의는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했다(게다가 논리 실증주의의 통합과학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후자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는, 즉 둘 사이의 간격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임에도 같은 계열에 속하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신체를 통한 작용-반작용과 공간개념의 추론적 완성은 이상하게도 사변적 논의에서는 같은 궤적 위에 있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다루는 심리학인데, 행동의 공간화 방식은 두뇌의 영향 하에 사고와 같은 계열이라는 점이다. 신체를 통한 기술과 기술의 이론화는 같은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유용성, 실용주의, 도구주의와 같은 계열로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을 다루면서, 영혼과 신체,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갈래가 원래는 하나였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측면에서 둘 사이 관계를 다루는 것도 빠지지 않고 있다. 영혼과 신체에 관한 한, 일반적으로 심신이론, 몸맘 이론으로 전개된다. 그러면 맘, 심, 영혼 등으로 불리는 이 대상은 무엇인가? 왜 그리스는 프쉬케가 로마에서 아니마, 중세에 멘스(mens)로, 근세에서 영혼(une âme)으로 이어지면서, 그 영혼을 따로 다루는 것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 영혼과 신체(un corps) 사이의 양자의 통일을 다룬다고 할까? 또는 신체를 잘 다루면 형이상학의 개념이라 치부한 생기, 영혼, 정신을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과학주의가 우선 한다고 해야 하는지. 경계를 설정하는 학문이 실증적인지, 인간의 작위적 노력을 과신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영혼이라는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 영어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음(mind)라고 한다. 왜 그들은 영혼(soul)이란 용어가 있는데도 신체와 연관에서는 마음(mind)라 하는지 프랑스 철학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대칭적 번역어가 없다고 한다. 그것(마음)은 영혼(l‘âme)도 아니고 정신(l‘esprit)도 아니다. 파스칼의 심정(l‘coeur)에 가깝다고 한다. 이 말은 철학적이 아니라 문학적 문화적 성격의 용어라는 것이다.
영육 또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논의를 영미철학에서 마음과 신체(mind-body)라고 하는데, 이 논의 대상은 영혼과 신체이기도 하고, 파스칼 용어로 심성의 정신과 기하의 정신과 닮았고, 또한 사회의 정신성(mentalité)과 생활의 기계주의(mécanisme)에 가깝다고 한다. 이로서 영미철학에서 인간의 활동을 행태라고 할 때는 두뇌를 통한 기계주의적 방식에서 원초적 또는 기원적 작동조차도 형태(forme)와 연관이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는 쪽일 것이다. 즉 모든 의식은 형태를 통해서 구현(l‘incarnation)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결국 행동주의에서는 생명의 진화의 긴 과정에서 형태의 구현의 길을 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강조에는 행태를 구성하기 전에는 의식의 차원이 무시되거나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런 행태주의는 신체의 공간화 방식만을 주목한 것이지, (조건반사의 무의식이 아니라)무의식적(기억적) 행위 또는 의식 내재적 작동 따위는 학문 또는 이론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물론 행태주의가 스스로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있다고 한다.
신체(생명체)의 내재적 활동(비교감신경계, 피순환, 님프순환 등)은 의식의 활동이 아니라 형태나 의식 구조로서 다룰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체의 삶에서 근본적이고 구체적 토대임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런 생명의 활동을 체계화하는 쪽은 생물학과 의학이다. 철학 이런 학문의 실증을 버리고, 형태 그리고 형태를 기록하고 소통하는 언어와 문자를 다룬다면 철학은 왜소할 수밖에 없으리라. - 내가 가끔 벩송의 견해를 빌어 비판주의든 선험적 본질의 철학이든 속좁은 이성이 다룬다고 하는 것도 왜소한 철학을 의미한다. 철학은 모든 데이터를 다룬다. 아니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철학한다. 그리고 이익과 탐욕의 철학은 인간의 오만이거나, 달리 표현하면 광기일 것이다. 그 광기의 한 측면이 야만이었다는 것은 전쟁과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의 철학들이 그러하다. 상호 호혜의 공동체의 연관을 정립할 수 있음에도, 속좁은 이성의 조그만 우월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사고, 주지주의가 20세기에 전쟁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자본의 제국일 것이다.
자연에서 신체와 의식의 이중적 활동을 속성으로 보았던 스피노자는 여러 속성들 중에서 두 가지 속성을 인간이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정의 차원에서 영혼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의 차원에서 신체의 것인데 이들이 신체의 표면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속성들로서 내재하는 노력이다.
싯달다의 초기 설법 중에 염처경이 스피노자와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53VMF,WKC)
**평자는 이 책이 자연주의와 의식의 연관에 대해 저자가 고민하고 있다고 보고, 자연주의를 통한 의식의 독립성 또는 주관성이 성립하는 차원을 찾으려 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의식의 자치까지는 아니라도 의식의 활동이 유기체(신체)를 통해 행태가 드러남을 관찰했지만, 행태주의가 자연과 상동구조만을 보았던 것으로 여기고, 또 다른 상사구조를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의식의 지향성 또는 선험성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행태가 지닌 사회적 환경에 대한 행위가 형이상학적 실체와 연관을 벗어나 있는 것 같으며, 그 행태가 의식 과정의 총체와 더불어 드러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 과정의 총체적 효과가 현실에 출현하는 의식과 연관은 현실의 양태와 연관을 설명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으리라. 그러면 이런 행태는 칸트의 비판주의로서 설명도 아니고 후설의 환원도 아닌 어떤 다른 지위 또는 다른 위상을 찾아야 할 것인데, 아마도 평자는 메를로-퐁티가 진솔한 후설의 선험적 전망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평자처럼 현상학을 깊이있게 하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벩송의 창조적 진화는 주지주의에 대한 형이상학적 비판이라고 표현한 철학자는 윌리엄 제임스이다. 이에 비해 메를로-퐁티가 주지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행태주의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평자는 메를로-퐁티가 그 자신의 비판으로 신칸트학파를 넘어설 수 있지만, 후설의 선험적 전망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회적 환경(milieu)에 쪽에서 보는 설명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체를 통한 감정과 공감에서 맞이하는 도덕적 상황과 종교적 사건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53VMI)
** 해제 *
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 1942), 바르바라(Renaud Barbaras, 1955-)
이 첫째 작품의 명시적인 기획은 “의식과 자연의 연관들을 이해하는” 것이고, 비판철학과 자연주의적 과학 사이에 대립을 – 심리학의 영역을 특징지우고 있는 대립을 - 극복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탐구는 “낯선 구경꾼(spectateur étranger)”으로부터 실행되고 있다. 이 구경꾼은 과학자의 구경꾼이며, 그는 행태(un comportement)의 용어에 근거한다. 행태라는 용어는 심리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비추어보며 중성이며, 이처럼 이 두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도록 해준다. 행태주의(le behaviorisme)에 따르면, 행태는 국부적으로 둘러싸인[외접하는] 수용자(un récepteur)를 향하여 마치 물리-화학적 작용인의 조작처럼 생각되어야만 한다. 이 수용자는 정해진 궤적에 의해 정확히 그려진 응답을 부추긴다.
형태 심리학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첫째 운동에서 메를로-퐁띠는 행태의 의미 있는(기호화하는)성격을 분명하게 밝힌다. 반사의 수준에서든지 상위 행태들의 수준에서든지, 자극은 가치의 덕분에서만, 또는 그리고 자극이 유기체의 선천적(a priori) 생명요소들에 비추어서 갖는 의미에서만 효과 있다. 그래서 자극은 유기체에 의해서 정교화 되거나 또는 구성되는 것이지 자극에 관한 인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든 측면들에서 행태(le comportement)는 마치 형태의 현상처럼[증상이 아니라 징후처럼], 말하자면 마치 총체적 과정처럼 서술되어야 한다. 총체적 과정의 성질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분들이 소유하는 성질들의 집합이 아니다. 행태는 물리적 결과[신체적 효과]로서도 또 분명한 의도 그 자체에 관한 표현으로서도 이해될 수 없다. 행태는 내재성과 외재성의 선택지[대안]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태 심리학의 잘못은 자연주의적 존재론의 틀 안에서 이 형태를 재파악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쾰러(Köhler, 1887-1967)는, 행태의 구조와 신경체계의 구조 사이에 동형성 (l’isomorphisme, 同形性)덕분에 물리적 우주 위에 생명적 질서의 토대를 놓기 위하여, 물리적 세계 가운데서 형태라는 현상의 출현[현전]으로 권위를 얻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를로-퐁띠에 따르면 형태(de forme)라는 용어는, 자연에 순진하게 일치된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해주고, 현상학적인 진실한 환원을 효과 있게 해준다. 물리적, 생명적, 인간적, 질서의 연구는, 형태가 의식을 위해서 의미화(la signification [기호화])로서만 있다는 것을, 의식이 지각적 의식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행태에 대한 가능한 과학이 있으려면 생명적 과정들의 의미화[기호화]들에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의미화들이란 “지각된(perçu) 많은 속성들이지만 그렇다고 진실한 유기체에 비추어서 외인성의 명칭들(des dénominations extrinsèques)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유기체는 과학이 고려하고 있는 유기체인데, 그것은 지각된 유기체의 구체적 총체이기 때문이며, 또한 분석이 유기체에서 발견하는 상관관계들 그리고 그 자체로서 해체될 수 없는 상관관계들 모든 것의 운반자(porteur) 이기 때문이다.”[3장 3절 3항, p.169] 선험적 전망(une perspective transcendantale)으로 이런 이행은 결정적으로 순진한 자연주의를 넘어서게 해 주고, 그 귀결로서, 생명과 정신의 실체론적 접근을 기피하게 해준다.
이런 결론들로부터 나아간 메를로퐁티는 영혼과 신체, 그리고 지각적 의식의 특수성에 대한 연관들의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다. 우주의 환경으로서 의식의 관념 과 살아있는 신체를 매개로한 자연 속에 의식의 기입[등록] 사이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메를로-퐁티의 대답은, 이 저작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고 있지만, 모호하게(ambiquë) 남아있다. 만일 인과적 사유에 반대하여 그는 우선 비판주의적 전망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는 둘째시기에 자신의 결론들이 이런 철학과 더불어, 단순한 동음이의(同音異義, homonymie) 속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한다. 그러므로 구조와 의미화(기호화)를 동일시 한 이후에, 그는 이것들을 구별하고자 시도했고, 그리고 구조의 관념은 관념과 현존의 결합 결합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구조의 관념이 함축하는 적분통합의 정도들은 정신에게 자신의 고유한 생성으로 공통출현[현전]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술의 마지막 몇 쪽에서는 메를로-퐁티의 주저함이 있는데, 이것은, 서문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그가 자연주의의 진리와 선험적 전망(une perspective transcendantale) 사이를 분명하게 화해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이유로 칸트(Kant, 1724-1804) 철학의 종속으로 남아있는 한 그리고 후설(Husserl, 1859-1938) 현상학의 진가를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비판주의를 벗어나고 또 자기편에서 구현(l’incarnation)에 이르는 선험적 전망을 기초하기에 이르지 못한다. (R, Barbaras) (4:18, 53V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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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기 철학자. 비판철학자.
1859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 철학자, 현상학 창시자.
1887 쾰러(Wolfgang Köhler, 1887-1967)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와 코프카(Kurt Koffka)와 더불어 형태 심리학의 창설자 중의 한사람이다.
1908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프랑스 철학자.
1955 바르바라(Renaud Barbaras, 1955-) 프랑스 철학자. 생클로드 사범출신, 현상학 전공.
(4:26, 53VMI) (5:07, 53W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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