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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수요일. - 그러자 회개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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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러자 회개한
오늘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어떤 표징일까요?
그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가 망할 것이라고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이 즉시 회개한 것이 바로 요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요나서는 이렇게 간단히 묘사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자’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고 하자 즉시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 회개해!’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그러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린 회개하고 니네베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믿습니까?
회개하라는 뜻에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그 지적을 받아들입니까?
다시 말해 지적을 받자마자 바로 회개합니까?
그러자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변명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핑계를 대지 않습니까?
그러자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머뭇거리지 않습니까?
사실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킨 요나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주님께 명령을 듣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싫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족 이스라엘만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원했지
원수 니네베가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래뱃속에서 삼 일 밤낮을 보내고 난 뒤에야
다시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뒤에야 마음이 바뀌었고
그렇게 자신이 회개한 다음에 회개를 선포한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회개를 선포한 것이고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세대뿐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도
필요하고 주어져야 할 하늘의 표징입니다.
사실 병이 낫는 것보다 마음이 바뀌는 것이 기적이고,
떼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돈을 벌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회개하게 된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세상 소망을 이룬 것이 기적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기적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아무튼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그러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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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잠재력을 가늠할 때 출발점에 집중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즉, 타고난 재능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타고난 재능이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지식을 익혔거나 부모에게 배웠던 이유가 더 클 뿐입니다. 출발점만을 보는 부모가 종종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요.”
출발점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멀리까지 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출발점보다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신동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을 휩쓰는 모차르트 같은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는 서서히 부상하는 대기만성형인 바흐 같은 이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지극히 정상이며, 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도 더 많이 받습니다.
출발점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조상님께 받은 유산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재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먼 거리를 갈 수 있느냐를 생각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 모두가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시간을 계속해서 탐내고 있습니다. 왕년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이 장래의 밝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출발점에만 연연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조상들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지요. 조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내세워서 선택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하고, 자기의 회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회개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심보로 꽉 막힌 이기적인 모습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들의 앞에서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나가 외쳤던 심판의 선포와 회개에 대한 호소에 니네베 사람들이 곧바로 믿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크신 분이 이야기하는데도 믿지 않고, 또 회개하지도 않기 때문에 표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믿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조상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놀라운 표징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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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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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병렬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입니다. 그와 같이 이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요나는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곧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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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감곡 매괴성모순례지 성당에는 성당 제단 위쪽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6,25전쟁 때 인민군으로부터 총탄을 7발이나 맞고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난 받으신 성모님,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분이 성모님 앞에서 기도 하여 치유를 받았기에 치유의 어머니라고도 합니다.
저는 성모님 앞에서 미사를 봉헌해 왔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면 성모님의 형상이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며 성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느님, 제발 어머니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했는데 너무도 짧은 순간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야말로 찰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번만 더요!”했습니다.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 성모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다시 한번 만요!” 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보여주시며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감각적인 표징을 요구하며 살았던 저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주님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 중의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 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영성체를 통해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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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01년입니다. 저는 버스 운전을 위해서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습니다. 성당에 25인 승 버스가 있었는데 운전하려면 대형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에서 3명이 시험을 보았는데 다행이도 저만 불합격했습니다. 봉사자 2명은 합격해서 25인승 버스를 몰고 교우들이 성당에 올 수 있도록 운행했습니다. 대형면허의 합격 기준은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코스를 정해진 시간 안에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긴장해서 ‘시간초과’로 떨어졌습니다. 맞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가 대형면허 합격의 기준입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이 대형면허 시험 불합격 한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입니다. 젊은 신부님이 버스 운전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입니다.’ 사실 저는 운전을 그리 잘 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왕에 25인승 버스가 생겼으니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형제님들은 운전 경험도 많았고, 연습도 열심히 해서 합격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다는 자부심은 경험했습니다.
미국에서 대형면허 시험을 보았던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은 감독관과 계속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운행 중에 갑자기 앞에서 차가 나왔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감독관이 ‘그렇게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저 같으면 ‘미안합니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이런 긴급 상황에서 당신 같으면 급브레이크 안 밟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길에 눈이 쌓여서 버스가 덜컹거렸다고 합니다. 감독관이 ‘운전을 그렇게 덜컹거리면서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저 같으면 ‘미안합니다.’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길에 눈이 쌓여서 그런 걸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차를 하면서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넓게 돌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감독관이 ‘이렇게 넓게 돌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답니다. 그러면서 차에서 내렸답니다. 형제님은 차분하게 주차하고 차 키를 반납했다고 합니다. 감독관과 그렇게 다툼이 있었으니 당연히 불합격 했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이었답니다. 맞습니다. 대형면허 합격의 기준은 감독관과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합격 기준은 얼마나 소신껏, 안전하게 운전했느냐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구원이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위한 표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구원의 표징으로 보내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요나의 말을 듣고 단식하였습니다. 이마에 재를 뿌렸습니다.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잘못된 악행에서 돌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표징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이마에 재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자루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악한 길에도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놀라운 표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러한 표징을 보고 ‘회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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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주도를 다른 말로 삼다도라 합니다. 세 가지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돌, 바람, 여성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주도를 떠올리면 이 세 가지가 아닌 다른 것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올레길’입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걸으며 누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올레길입니다. 오름을 오르고 들판을 걷고, 해변을 마주하는 길입니다.
아주 오래전 올레길을 홀로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정표가 작아서 그랬는지, 저의 주의가 부족했는지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다시 길을 돌아가야 했고 갈림길에 있었던 작은 이정표를 찾아냈습니다. 역시나 이정표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나의 기적은 작은 소리를 의미합니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에게 하느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도망 다니고 도망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니네베로 들어간 요나는 작은 목소리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니네베의 모든 나라가 재를 뒤집어쓰고 하느님께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와 회개를 받아들이십니다.
주님의 작은 소리는 우리 안에도 들려옵니다. 그러나 다른 큰소리 때문에 주님의 소리를 지나친다면 우리는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올레길의 작은 이정표를 놓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작은 요나의 기적이 다가올 것입니다. 잔잔한 마음으로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소리는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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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마음 진단
그대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마음에 우울함이 채색될 것입니다.
그대가 미래에 머물러 있다면
마음에 불안과 초조함이 채색될 것입니다.
그대가 현재에 머물러 있다면
마음에 평화가 채색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평화가 채색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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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旅程)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회개(悔改)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서서히 걷히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것도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선물일 수 있음은 회개를 통한 깨달음입니다. 영성생활의 기초가 회개입니다. 우선적인 순서도 메타노니아(회개), 코이노니아(친교),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열던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사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사순시기의 삶을 요약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49,3-4).
눈만 열리면 곳곳에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고 어제가 “사회정의의 세계의 날”(World Day of Social Justice)임을 알았습니다. “소비문화(Cultur of waste)”를 개탄한 교황님의 한말씀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특별히, 교황은 끊임없이 기후변화에 의해 위협받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를, 이민자들과 피난민들의 보호와 환영을 호소하면서, ‘무관심의 지구화(the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를 경고하면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 행동에 돌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집은 여기다(Home is here)”, 시위자들의 팻말의 말마디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의의 열매로 표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오래전 자작 고백시가 반가워 인용합니다. 18년전 2006년 제 나이 58세 이때쯤 쓴 “나 창밖을 볼 때마다”라는 장시입니다. 이 시또한 제게는 시공을 초월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창밖 풍경은
살아있는 그림, 살아있는 성경
해마다 창밖을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고
날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이 지나간다.
때로는 구름도 흘러가고 새들도 날아간다.
창밖을 바라보며 배우는 인생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함을
또 매사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초연히 바라봐야 함을 배운다.
아, 계절을 볼 수 없어 철없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시간을 볼 수 없어 때를 분별 못하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오늘의 현실은 자연을 떠난 업보다.
저녁기도 시간 짙어가는 어둠,
‘어, 내 인생 몇시이지?’ 불현 듯 떠오른 생각
내 나이 58세, 1949년생
아마 오후 3시, 혹은 3시 30분? 점점 어둠도 고요도 깊어지겠지.
해맑은 아이라면 아침이슬 머금은 아침6시,
십대 사춘기 나이라면 오전 10시,
한창 청년의 나이라면 낮 12시,
삼십대의 무르익은 젊음이라면 오후 1시,
이러니 하루가 평생의 압축이 아닌가?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맑고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는 오전의 나이들이라면
점심지나면서는 고요히 스며드는 어둠과 더불어
깊어지는 오후의 나이들이어야 맞는 거다.
그리고 밤 나이에는 풍요로운 고독과 침묵의 품안에
별빛, 달빛 그윽히 반짝이는 그분 밤의 품안에 머물다 잠같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다.
이어 새벽 동터오는 아침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찬란한 부활을 맞이하는 거다.
궁극엔 햇빛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한 여정이기에
내 나이 시간에 구애됨 없이 아침에는 아침 나이의 순수로
점심에는 점심 나이의 열정으로 살 수 있기에
늘 희망 가득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내 나이 지금 몇시인가?’
나 창밖을 바라볼 때 마다 생각한다.”-2006.2.
18년전 집무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이니 새삼 ‘정주의 축복’을 깨닫습니다. 지금부터 18년후라면? 아마도 살아있기 힘들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라 주어지는,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절박한 깨달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깨달음의 여정이요 깨달음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지혜로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온통 회개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회개의 선포에 즉각적인 거국적, 거족적 회개로 응답하는 니느베 사람들, 시공을 초월 전 인류가 자비로운 하느님의 눈에는 회개의 대상, 구원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묘사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요, 이때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를 당신 품 안에 맞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에 눈먼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 무지한 중생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이방의 니느베 사람들처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았던 이방의 남방 여왕처럼 신속하게 주님을 찾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지혜로운 현자가,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표징들의 표징인 빛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 자비의 표징, 지혜의 표징인 예수님을 못보고 표징을 찾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지에 눈먼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보다 더 좋은, 은혜로운 회개의 표징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주님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날마다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순시기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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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32)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참을 만나니
참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착함을 만나니
착함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나니
아름다움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믿음을 만나니
믿음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희망을 만나니
희망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랑을 만나니
사랑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니
사람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땅을 만나니
땅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늘을 만나니
하늘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니
하느님이 되는 사람 말이지요
그리 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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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29,30)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양 떼가 온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회개를 통해서 니네베에 이르고(요나 3,5 참조)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남방 여왕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리하여 평회를 이루는 솔로몬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참조: 1열왕 10,2; 2역대 9,1). 여왕의 나라는 갈라지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 위대한 성사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연관된 것이며(에페 5,32 참조) 그 실제는 예시되었던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제 그 신비가 진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때는 솔로몬이라는 표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신으로 여기 계십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엑카르트는 흘러 나옴과 안에 머무름, 바깥에 있음과 들어감이라는 주제를 하느님과 신성을 체험하고, 창조주를 체험하는 일에 적용한다. 신성 안에 있는 자신의 신적인 근원으로부터 바깥으로 나왔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엑카르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침묵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신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신성 안에는 대화라든가 말이라는 게 없다. 신성 안에는 온통 일치만 있어서, 그것에 대하여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신성을 떠나 태어나거나,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밖으로 흘러 나오면,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이 일어서서 “하느님!" 하고 소리친다. 왜 그런가? 피조물은 피조물을 보면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또 다른 설교에서 이와 동일한 주제를 되풀이한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왔을 때, 만물이 소리쳤다. ‘여기 하느님이 계시다’라고." 이런 식으로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 관해 말한다. 결국 하느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고. 피조물은 기억이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을 대변하고 있음을 안다. 실로. 피조물은 성서이자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다. “피조물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설교할 생각을 품을 필요가 없다. 피조물은 저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고, 저마다 하느님에 관해 기록된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만 이 세계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세계 없이도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영혼을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12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해결의 시도:
국가와 교회의 중심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은 이로써 발견되지는 못하였다. 제국교회의 국가에 대한 봉건적 구속은 전 중세를 통하여, 아니 프랑스 혁명과 대국유화(1803)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대결과 싸움이 계속 되풀이되어 일어날 수 있는 접촉점과 마찰면도 함께 존속되었다.
클뤼니 개혁은 시초에 국가 안에서 교회의 자유와 독립만을 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거기에서 양자가 동동하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수도자이며 동시에 지배자이고 선천적으로 황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육체적인 것에 대한 영신적인 것의 우월성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성을 추론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교황훈령」 27조에서, 미래를 위한 교황들의 교회정치적인 계획을 확립하였다.
그는 진본으로 간주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에 의거하여 교황권의 세계 지배 주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권력사상이 국가와 교회간의 대결을 점점 지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레고리오 7세에게서도 저속한 이기주의는 없었고, 오히려 매우 깊은 종교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 인노첸시오 3세(1198∼1216)까지도 교황에 의한 세계 지배의 실현을 완전히 종교적인 목표에 종속시켰다 하더라도, 권력 남용의 위험은 명백하였다. 교회가 언제나 그 위험을 모면한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1세 적발제(1152∼1190)가 황제의 세계 지배 이념을 다시 강력히 시행하려 하였을 때, 제권과 교권 사이의 새로운 다툼이 일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3세 교황(1159∼1181)과 대립하였다. 격렬한 다툼은 1157년 브장송의 제국의회에서 1177년 베네치아에서의 강화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특징은 황제 편에서 내세운 네 명의 대립 교황, 전쟁과 유혈 등이었다. 이것은 결국 강화가 다시 성립되고, 알렉산데르가 1160년에 내린 파문에서 황제가 해제되기까지 그리스도교 세계에 많은 불행을 초래하였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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