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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묵상글 ( 사순 제2주일. - 믿음의 맑은 눈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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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맑은 눈으로
오늘 사순 제2주일의 두 독서는 두 아버지의 아들 봉헌을 얘기합니다.
두 아버지가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봉헌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제1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한 얘기이고,
제2독서 로마서는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순 제2주일은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느님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 진정 사순 제2주일의 주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의 다음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언제 흔들입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믿음이 언제 필요합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련의 때에 믿음이 제일 많이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지만
이때가 믿음이 더 필요한 때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땐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도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씨뿌리는 이의 비유에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밭에 뿌려진 씨에 비유하시며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제자들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지금 비록 시련 당하지만, 이때 믿음이 더 필요하고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수난 예고 때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며 수난과 죽음은 빼놓고 듣고,
막상 수난이 닥치고 주님께서 확 돌아가시고 나면 절망감 때문에
부활에 관한 말씀은 빼놓고 들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절망의 때에 부활의 말씀을 상기하고 영광을 내다보라는 거지요.
오늘 본기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입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죽음을 목도하지만
영혼의 눈은 불신과 의심과 절망으로 흐려지지 않고,
맑은 눈으로 부활을 내다보며 ‘부활 관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믿음의 눈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맑은 눈으로 부활 관상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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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3 졸업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신부님이 될 수 있을까? 신부가 되기 위해 모인 천사 같은 신학생들 사이에서 악마 같은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입학 후 친구들과 산책하다가 너무 놀라서 나무 뒤에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수단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4학년부터 수단을 입습니다. 당시 신학생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단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의 눈에는 모두 신부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숨이 있는데, 깜짝 놀랄 말을 들었습니다. ‘욕’이었습니다. 쌍 ‘ㅅ’ 들어가는 말을 서슴지 않고 수단 입은 신부님들(당시에는 수단 입고 있으면 다 신부님으로 생각했음)이 막 하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만 사는 곳, 좋은 말만 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이곳 신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첫날에 환상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후에 깨달았습니다. 이곳은 천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이지요. 이런 깨달음 이후에 신학교가 좋아졌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 왜 이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아마 이분들 역시 성당 안의 사람이 모두 천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천사만 있는 곳에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만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 곧 이 세상 삶을 마쳐야만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교회 안에는 천사가 아닌, 천사가 되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이며, 부족함을 나누면서 완벽함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교회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천사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기에 나 같은 사람도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모습을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고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천사만 사는 곳이 될 수는 없지만, 천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좋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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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바뀐 것은 없다. 단지 내가 달라졌을 뿐이다. 내가 달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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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오늘은 사순 2 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말 한마디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준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 8,32)
그리고 <복음>에서, 성부께서는 예수님의 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산’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는 모리야의 산에서, <제2독서>는 갈바리 산에서, <복음>은 타볼 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처럼,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준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을 바쳐라 하십니다. 그런데, 혹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이 있는지요?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더 소중한 것, 말입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을 모조리 살라 바쳐라 하십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늦게야 얻은 아들, 그것도 자신이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줄 보증수표인 아들, 이 소중한 아들을 그는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요, 자신의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소중한 아들을 온전히 바쳐라 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민족들의 조상’이 되리라는 그 희망도 부수어버려라 하십니다. 곧 자신의 전부를 바쳐라 하십니다. 나아가서 자신의 전부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와 종족의 미래까지도, 온전히 모조리 바쳐라 하십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요, 무조건적인 수락의 요청이었습니다. 그 이끄심에 따라, 아브라함은 비로소 자신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 때문에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하였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그러나 당신께서 아브라함을 벼랑으로 끌고 온 것은 그를 벼랑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벼랑을 건너게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벼랑 건너에는 더 낳은 미래가 펼쳐져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이 진정한 미래를 주기 위해서는 벼랑까지 끌고 와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이 그릇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정화를 받을 수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은총이었습니다. 믿음에 따라 이루어진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말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제1독서>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인 이사악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라면, <제2독서>는 반대로,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인간을 위해 내어주신’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준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 분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고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입니다.’(에페 21-22 참조)
그것은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이요,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모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걸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따라 사는 일입니다. 이렇게 그분께 순종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될 것입니다. 이 ‘변모’가 바로 사순절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오늘 변모되기를 바라는지요?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거룩해지기를 바라는지요?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하느님 되기를 바라는지요?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명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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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안주하지 않는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한 제물, 향기로운 예물이 되시도록 하셨습니다.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음성을 들려주시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부활의 영광으로 나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판을 받았고,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도 산이었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이러한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고,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9,5)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께, 하나는 모세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죽은 지 수백 년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의 활동은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한 단계였음을 시사해 줍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엘리야, 하느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당했듯이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고통을 당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하얗게 빛난 옷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오게 될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마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이 환히 빛났으며(탈출4,29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던 천사 옷도 하얗습니다(마르16,5). 예수님의 변모는 영광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나가라는 위로이며 희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는 말씀에 이어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의 여정이 무의미한 가시밭길이나 파멸로 치닫는 저주의 길이 아니라는 보증이며 담보인 것입니다.
이제 새하얀 옷은 곧 우리의 옷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허물과 후회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2코린7,1)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하얗게 빛나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우리의 얼굴이 언제나 환하게 빛나길 바랍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머물고 싶어한 것을 보면 좋긴 좋았는가 봅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소리와 함께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것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로의 초대입니다.‘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온 것은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하게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산에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 감당하기 어려운 곳으로 내려오셔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광야에서 앞길을 인도한 것이, 구름 기둥, 불기둥이었듯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 하느님의 명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듣지 않고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주님의 말씀대로 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영광스러운 부활을 준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성체로 충만하게 채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순절에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회개는 우리가 큰 죄를 지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마음에 소홀함이 있다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며 온 삶이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시고 ‘참 좋다’ 하시길 희망합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향하고, 말씀을 새기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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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 살 때입니다. 봉사자들께서 2층의 숙소를 정리 해 주었습니다. 책상과 침대의 위치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위치를 바꾸니 방이 산뜻해 졌습니다. 잠자리도 아늑해졌습니다. 저는 보아도 보지 못했는데, 안목이 있는 분들은 방의 구조에 맞게 가구 배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 예전에 읽었던 글도 생각납니다. 남편이 퇴근길에 모처럼 장미 한 다발을 사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화병을 찾아보니 없어서 시장에 가서 예쁜 꽃병을 사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으려고 보니 식탁보가 너무 낡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식탁보를 사왔습니다. 의자를 보니 의자도 너무 낡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의자를 사왔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화병을 보는데 커튼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시장에 가서 커튼을 사왔습니다. 화병, 식탁보, 의자, 커튼을 바꾸었는데 방이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모처럼 청소기를 돌려서 방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니 집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장미 한 다발의 마음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였고, 낡고 지저분했던 집이 깨끗하고 화사한 집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변하니, 삶 또한 변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댈러스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편안함과 익숙함을 포기하고 낮선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지내면서 기르는 양들이 늘었습니다. 함께 하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롯은 기름지고, 풍족한 땅을 먼저 선택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좋은 땅을 조카에게 양보한 것이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조카를 먼저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런 마음을 보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으로 찾아온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착한 마음을 보시고, 이미 늙은 나이인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이사악 대신에 다른 제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10계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엘리야는 예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을 때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아름답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천막 3개를 만들어서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것도,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마귀를 쫓아내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외모가 거룩하게 변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옷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삶으로 드러낸다면 우리 모두 거룩하게 변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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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죽음의 문을 다른 말로 빛의 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늘의 빛이 비추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빛으로 덮이고 죽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기쁘시겠습니까? 아니면 두려우시겠습니까? 두려울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만합니다. 그래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집을 짓고 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빛 속에 있을 때,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을 때 하느님의 소리가 제자들에게 들립니다. 자신을 제일 잘 보게 되는 순간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신을 포기할 때 하느님의 소리는 들리게 됩니다.
죽음의 문에 다다라야만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항상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아브라함은 훌륭하고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생명으로서의 죽음의 문이 아니라 고통으로서의 죽음의 문 말입니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하느님이 자식을 죽이라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그렇게 믿었던 하느님이, 그렇게 의지했던 분이 어떻게 그러셨을까요?
이것 또한 죽음의 문입니다. 이것 또한 빛의 문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아브라함이 겪었고, 우리가 겪었고, 또 겪을 죽음과도 같은 고통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음 앞에서 자신과 싸웠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죽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워냈을 때, 그리고 아들을 봉헌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을 때, 하느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자신을 비워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비움이 하느님의 말씀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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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기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하늘의 품에 넘겨두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잘 안되다 못해
스스로를 못살게 굽니다.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머리는 온갖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했는데
정작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합니다.
그냥 내려놓고 기다려 봅니다.
하늘에 맡겨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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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친밀함이란 군중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영혼과 영혼의 만남에서만 이루어지는 섬세한 교감입니다. 또 적막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교감입니다. 세상의 복잡함을 뒤로 하고 온 마음을 모아 주님과의 친밀함을 느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높은 산, 그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스승님의 참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은 주님의 참 모습을 깨닫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참사랑이신 주님은 주고받는 사랑, 생명과 행복의 근원입니다.
주님의 생명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십니다. 만일 단 한번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주님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그곳에서 그 기쁨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통해 사랑의 친밀함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 35-39).
사랑은 사심 없는 희생으로 증명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이 보다 더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권능 아래 나는 단지 한 줌의 모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온화한 사랑에 비해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잔인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주님의 용서의 사랑에 비해 나는 쉽게 고마움을 망각하고 얄팍한 계산을 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생명의 물을 마시면서, 우리 몸에 간직하고 있는 죽음의 뿌리들을 발견하고 순수한 빛의 근원이신 주님께 다가가 나의 눈먼 어둠을 밀어내야 합니다.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인간인 나 자신을 정확히 안다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시각도 바뀔 것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세상이 마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처럼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 구원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가 맞이하는 고통들은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정결히 해주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 영혼을 씻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느껴보았습니까?
2.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3. 사순 시기 동안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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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날마다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
2005년 봄, 그러니까 19년전 써놨던 시 두 편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세월 흘러도 오랜만에 읽어보니 새롭습니다. 하나는 ‘한강을 건널 때 마다’입니다. 이 때는 수도원 매각 문제로 참 어지러웠던 때이고, 힘들 때 좋은 시들은 구원의 빛처럼 저를 밝혔고 위로했고 자유롭게 했습니다.
“물 흐르듯 살 수는 없나?
한강을 건널 때 마다 생각한다
‘가슴에 강(江) 하나 지녔으면 좋겠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하나로 흐르는 세월의 강(江)인데
부질없이 나눈
세월의 방(房)안에서
나는 참 많이도 삭막하게 살았다
아!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살 수는 없나?
한강을 건널 때 마다
가슴 안에 흐르는 영원의 강(江)을
강같은 당신을
생각한다.”-2005.3
밖으로는 임 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임향해 흐르는 강처럼, “산처럼, 강처럼”, 그대로 산같은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꼬박 일년 기다렸다 찾아온, 맨 먼저 피어난 영춘화(迎春化), 파스카의 봄꽃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여러 지인들에게 전송했습니다. 또 하나는 “봄이 되었다”라는 시입니다.
“마음 들뜨게 하는 봄꽃들이라
막 꽃피기 전 햇빛 부드러운 초봄이 제일 좋다
어느 새 찾아 온 이름 모를 새들
맑은 소리로 봄소식을 알린다
부드러운 봄비
따사로운 봄빛
맑은 봄소리
향기로운 봄공기, 봄거름, 봄흙
봄에는 향기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봄의 맑음과 부드러움, 향기에 빠지다보니
나는 사라져 봄이 되었다”-2005.3.
사순시기 전례시기와 너무 잘 들어맞는 요즘의 계절 봄입니다. 강같은, 봄같은 파스카의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전번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신 주님에 이어, 오늘 사순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변모의 여정-날마다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이라 정했습니다. 그대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여정과도 통합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다산과 맹자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삶의 여정에 귀한 깨우침을 줍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아이가 상징하는 바, ‘겸손하고 지혜로운, 그리고 순수한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앞선 복음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라는 내용으로 제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많이 위축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시 반발하던 베드로는 주님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호된 질책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선물이 주님의 변모사건이요 제자들의 주님의 변모 체험입니다.
저는 어제 성가연습을 하면서도 흡사 오늘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이요, 날마다 주님을 닮아 거룩히 변모되어 가는 우리들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세가지 주님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들이 결정적 순간,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나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그렇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렇습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면 두분간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다음 문답에서 선명히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사악을 죽이려 했을 때 주님은 다급한 마음에 아브라함을 두 번씩이나 부르시고 그를 만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세제자들 역시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사랑을 바쳤던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이건 차별이나 편애가 아니라 자연스런 것으로 다른 제자들도 받아들였을 것이니, 세 제자들의 주님 사랑이 참으로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확신에 넘친 고백도 그의 주님 사랑을 입증합니다.
둘째, “체험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체험, 신비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만났던, 체험했던 복음의 세 제자는 물론이고 창세기의 아브라함, 로마서의 사도 바오로 진짜 신비가입니다. 진정 내적 힘도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체험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옷에,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의 충격은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은 두 승천한 인물과 영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순수한 마음은 이해가 되나 큰 착각입니다. 결코 독점하거나 집착할 수 없는 선물같은 신비체험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이런 내적신비체험은 세 제자들의 십자가의 여정에 샘솟는 힘의 원천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감사송이 제자들의 주님 변모 신비 체험의 진실을 환히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제1독서 창세기 후반부에서 보다시피 아브라함의 주님과의 은밀한 내적체험은, 그의 평생 여정에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들으니 출산율 저하로 장차 나라의 명운까지 위협받는 우리의 박복(薄福)한 현실이 안타깝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바오로의 주님과 만남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도의 확신에 넘치는 살아 있는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의 파스카의 믿음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들어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들음의 경청입니다. 경청하는 이가 겸손한 이요 경청하는 이가 순종하는 이요, 경청하는 이가 추종하는 이입니다. 제자직의 필수 조건이 경청입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심에 즉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는 아브라함은 깨어 있는 사람이자 잘 듣는 경청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청은 그대로 순종에 직결됨을 봅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우리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후손에도 축복의 통로가 됨을 봅니다. 신비체험에 집착하는 제자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당부 말씀도 들어라, 경청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끝났지만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십자가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 은총은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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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당신만을>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마르 9,8)
당신의 무엇을
믿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무엇을
바라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무엇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그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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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사순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변모하시는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또한 변모 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변모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고 변모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감정과 덕행의 변화와 변모하게 하는 기도와 영적독서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내지 느낌은 육체와 정신의 중간 통로로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을 낳는 것은 정신이나 영혼이지만 화가 나 있거나 열중해 있거나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을 볼 때 쉽게 알아볼 수 있듯이 그것은 육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감정은 인격의 장식물일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한번의 눈길, 한번의 손길이 많은 얘기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때도 있습니다. 느낌들은 깊이 있게 말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속에 덕이 존재하는 한 깊은 느낌들은 내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감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정신의 통제를 받고 더 긍정적이고 성숙되게 변화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정적 감정이 억압받을 경우 그것이 내적으로 전개되어 신경장해나 나아가 육체적인 질병을 야기시킵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시키는 데 참으로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근본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덕행의 결핍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이런 감정들을 치유하는 길은 덕행스런 태도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적절한 근본덕행을 발전시키면 부정적인 감정들이 긍정적 감정으로 바뀝니다. 적절한 덕행을 닦는 것은 부정적 감정을 항구히 해소시키는 방법입니다.
무질서한 감정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필요한 덕을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며 무질서한 감정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지점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덕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감정들은 조화롭고 긍정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덕행과 기도의 삶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덕행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주어진 상황에 맞게 반응하도록 하는 마음 깊이 뿌리내려 몸에 베인 좋은 습관으로 정의 내릴수 있습니다. 덕행은 온갖 은혜의 원천입니다. 이러한 것은 오늘 1독서에서 들은 덕행의 모범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덕행은 내적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초조감과 시기, 분노를 비롯한 그밖의 여러가지 무질서한 반응들은 우리의 삶에 많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이런 것들이 아브라함 처럼 믿음과 순종의 덕스러운 반응으로 변화된다면 큰 내적 평화가 옵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덕행을 개발하도록 하며, 덕행은 보다 깊은 기도의 길로 인도합니다. 기도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덕행을 지닐 수 없으며 덕행에 관한 지적 지식은 영적독서를 통해 얻어집니다. 덕행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기도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큰 해독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 들어오도록 영혼을 열어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못들어오시게 하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고 맙니다.
감정과 덕행의 변화 그리고 기도와 영적독서의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삶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변모되어 다른 이를 감화시키는 가운데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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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체성사를 위해 죽은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이탈리아-19세기
도둑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는 어두운 성당 안에서 제단으로 가까이갔다. 그가 훔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둑들 뒤로 가서,재빨리 부서진 감실에서 성체가 보관되어 있는 성합을 든 손에 대해 깜짝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부가 아무런 방어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신부에게 다가섰다. 그들은 그 성합을 다시 빼앗기 위해 위협적으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사정없이 신부를 내리쳤다. 그리하여 신부는 성체를 이 사악한 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가슴에 꼭 붙들고 있었다. 도둑 중의 한 명이 권총을 꺼내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신부에게 겨냥했다.
신부는 치명적으로 머리에 총을 맞고,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 하고 외치면서 제단의 계단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때 주임신부가 성물 관리인 두 명과 함께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재빨리 도둑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제단으로 서둘러 왔을 때 몇 시간 전만해도 건강했던 아르투르 신부가 심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창백한 손으로 손상되지 않은 성체가 모셔진 성합을 심장이 멎어가는 가슴에다 꼭 안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주임신부에게 성체를 넘겨 주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의사를 부르려고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언젠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체의 형체 안에서 이 남작 신부를 사랑스럽게 재촉하시듯 쳐다보셨고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키시고 숭고한 사제직으로 부르셨었는데 예전에 개신교 신자였던 아르투르 남작은 이제 제대 앞에서 피를 흘리는 속죄양처럼 누운 채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였다.(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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