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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수로꾸리아
 
 
 
카페 게시글
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6월 8일 연중 제10주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7 08.06.07 1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9-13)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회개를 외친다. 주님께 돌아갈 것을 권하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라고 한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제1독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다.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사라는 아이를 못 낳는 상황이지만 희망하며 믿었다. 그러기에 이사악을 얻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다. 그리고 그의 집을 방문하시어 세리들과 어울리신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을 트집 잡는다. 신심 깊은 사람들인데도 그러한 행동을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세리와 어울리면 ‘죄가 된다는 생각’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다(복음).

 

★★★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던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가 마태오입니다. 그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로마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히는 사람과 식사를 하다니.’ 신심 깊은 바리사이들은 개탄하며 항의합니다.
‘세리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의 행위 속에는 무언의 항변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에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죄인이겠습니까? 하느님 말고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죄와 연관된 신앙’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은총과 연관되어야 올바른 신앙’이 됩니다. 얼마나 죄짓지 않고 사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은총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죄를 경험합니다. 누구나 은총을 체험합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고, 은총인 줄 알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도우심을 청하고 축복을 빌어 왔습니다. 죄인이란 생각에서 떠나 본 날이 얼마나 되는지요? 언젠가는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총 중심의 신앙’으로 빨리 전환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아름다운 만남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그대에게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바다 밑에 살고 있는 눈먼 거북(盲龜)이 백년에 한 번 숨을 쉬려고 바다 위로 올라옵니다. 바다 위에는 나뭇가지 하나가 떠다니고 있습니다. 눈먼 거북이 숨을 쉬려고 고개를 물 위로 내밀 때 거북의 머리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다(遇木)는 이야기입니다.
만남과 인연(因緣)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우화입니다.  

세리 마태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그를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잊혀 진 존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의 소중한 인연(因緣)을 ‘마태오 복음’이라는 열매로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오가 남겨준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생한 말씀과 가르침을 듣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인연(因緣)을 아름답게 꽃 피우고 열매 맺은 복(福)있는 사람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줍은 만남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기에 나온 말입니다. 세리 마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선포자가 된 것을 생각하면 맞는 말입니다.
모든 만남과 인연(因緣)은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악연(惡緣)은 없습니다. 당신이 악연(惡緣)이라 생각하는 만남도 나를 깎고 다듬어주는 방편(方便)일 뿐입니다.

오늘 당신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겠지요. 그 만남들이 아름다운 인연(因緣)으로 맺어져서 은총과 축복의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참된 거룩함
-노형호 신부-

예수님께서는 세관 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 르코 2,14)이며
직업은 세리(루가 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돈에 묻혀 지내는 사람이고 그 결과 영적이거나 종교적인 면에 대한 감각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계산을 하고 필요 한 이득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속이는 것도 필요하였으며,
더구나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 어야 하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고 계십니다.

마태오는 부름받음의 기쁨과 친구들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큰 잔치를 차려 그의 집은 동료들로 가 득 찼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습니 다.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질타를 합니 다.
표면상 올바른 듯한 이 질책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기는 의인이나 착한 이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위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상과는 전혀 반대되 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자신들을 축성된 사람들로 생각 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행동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의 접촉을 멀리해서
양심의 지 순성을 보전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올바르다면 성인(聖人)들인 자신들을 먼저 불러야 하며,
경건하지 못한 세리들은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대답과 행동이 세리와 죄인들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분명히 병자 라고 하셨고 죄인을 분명히 죄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의사가 환자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환자들을 치 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부르는 것은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리나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태도이며 그 태도에 따라 참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참된 거룩함은 자신의 죄의 상태를 인정하고 거기서 해방되고 자 하는 겸손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 죄인은 자기에게 없는 것도 많지만 그 중에서 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움을 괴로워하며 그 비움이 채워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높은 곳으로부터의 도움 을 갈구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총을 받 기 위해 갖추杵?할 근본조건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용서받을 수도 받 은 것에 대한 감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유유상종(類類相從)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오늘 주일복음 마태오 9장 9절은 예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10­-11절은 마태오의 집에 들어가시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을 먹는 데 대하여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이랑 어울려 먹소?”라는 비난을 하고 있다. 이어서 예수께서 이 비난에 대한 자기 주장으로 의사가 병들고 앓는 이에게 필요하듯이 당신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12-­13절)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비이며 당신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께서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것이다. 더구나 그분이 그 죄인의 집에 가시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이를 비난하고 있다.

유유상종(類類相從)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시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끼리끼리 지내는 경향이 많다. 우리는 비슷한 생각·처지·수준의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신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고 ‘당신네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네’라는 말로 묶고, 자기들을 그들로부터 분리시켜 ‘우리’라고 하며 구별짓는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보자. “의사란 건강한 이가 아니라 앓는 이에게 필요합니다. 가서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시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여기서 건강한 이는 자신들이 세리와 죄인들과는 달리 괜찮은 자라고 자처하는 바리사이들일 것이요, 앓는 이란 죄인으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 소외된 이들, 무시와 천대를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세리와 죄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처를 낫게 해줄 의사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며 그들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옛 예언의 말씀을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하신 말씀이 뜻하는 바를 배우라고, 진실의 핵을 보라고 하신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고 예수께 고발하는 12,7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무죄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호세 6,6에서는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라고 호소하신다. 예언자의 입을 빌려 사랑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호소다. 필요로 하는 사람 그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내가 온 것은 이 사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넘어 드리는 최대의 경배인 자비라는 것. 그분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따돌림받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음으로써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아물게 해주고자 하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를 따르시오’ 하시자 ‘그가 일어나 따라왔다’”라는 말씀을 보자. 주님은 부르시고 따르라고 하신다. 주님은 마태오에게 질시와 제외, 따돌림을 받아온 세관의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세리 마태오는 주님과 제자들과 더불어 먹었다. 그렇게 ‘당신네 선생’ 안으로 들어가 제자가 되고 있다.

외롭고 힘겨운, 소외되고 천대받는 우리의 세관에서 귀를 모아 보자.
“나를 따르시오.”
그리고 그 조건도, 갖추어야 할 자격도 바라지 않고 당신 옆자리에 앉아나와 더불어 먹는 주님을 바라보자. 나와 어울려 기뻐하시는 주님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닌 자비라는 말씀의 뜻을 새겨보자.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야 할 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 자비의 사랑으로 생명을 낳는 의사이신 분의 부르심을 들어보자. 그리고 그 자비의 사랑을 누리자.
주님, 저와 함께하시어 기쁨의 상을 받는 당신 나라의 제자 됨의 은총을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과 어울려 노래하는 하늘나라를 이 땅에서 앞당기는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마태오를 부르심

-허 성 신부-

“너로 인해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오늘의 복음 내용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의 집에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 내용은 예수님 강생의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신 말씀이다. 얼마나 우리에게 감사하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시는 말씀인가? 만일에 그분이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속에서 헤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맙게도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는 희망을 갖고 감사와 찬미가를 부르며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생업에 너무 바빠서 평소에는 자녀들에게 별로 관심을 못가지던 부모님들일지라도 자녀중에 누가 아프거나 무단 가출을 했거나 사회적으로 무슨 잘못을 저질러 경찰에게 잡혀 갔다면 모든 일을 다 제쳐놓고 모든 관심과 노력을 문제가 생긴 자녀에게 집중시켜 그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평소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받는 자녀들 중에는 부모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꾀병을 앓거나 가출을 하거나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가끔씩 있기도 한다.

길잃은 한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의 예에서, 돌아온 탕자를 환대하는 어진 아버지의 예에서 죄인에게 쏟으시는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부활 성야 미사때 부제는 부활초에 불을 당겨놓고 『오 기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수 없는 주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라고 장엄하게 부활찬송을 읊지 않는가? 영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상처받고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쏟으시는 아버지의 관심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다.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지 않았던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제정해 주심으로써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사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데에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고해성사를 주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때는 43년만에 고해성사를 보러 온 사람에게 성사를 주었을 때였다. 그는 한번 부끄러운 죄를 지은 후에 부끄러워 고해성사를 못받고 냉담하면서 계속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43년을 기쁨없이 살다가 큰 용기를 내어 나를 찾아와 고해를 하고 사죄경을 받은 다음에 너무나도 홀가분하고 기뻐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사제가 되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제가 된 후에 다른 일은 한가지도 못하고 이 사람 한사람만 고해성사를 주고 사제생활을 끝마친다고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세리 자캐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가시어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자캐오의 집에서 구원을 선포하신 주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그의 죄까지도 용서해주신 주님, 중풍을 고쳐달라고 들것에 들려온 환자에게 중풍치료는 물론이고 그의 죄까지도 사해주신 주님,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고통중에도 배신자들을 조건없이 용서하시고 아버지께도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주님, 함께 못박힌 오른쪽 죄수를 낙원으로 초대하신 주님, 일곱번 뿐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죄인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오직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오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외쳐보자.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죄인들의 하느님

-양승국 신부-

밖에서 맴도는 한 아이와 천신만고 끝에 연락이 닿아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속 장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허탕을 친 것입니다. 꽤 먼 길이었기에 김도 새고 맥도 빠진데다 배도 고픈 나머지 혼자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 식당 음식이 깔끔해서인지, 아니면 그날 근처에서 무슨 행사가 있어서인지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손님, 여기 자리 났습니다"고 해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제게 안내한 자리 맞은편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쩔까 하다가 동석을 하게 됐지요. 잠깐이었지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 또 식사를 하는 시간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워낙 숫기가 없는 저이기도 하지만 뭐라고 말 걸기도 뭣하고 해서 그저 서로 딴 방향을 바라보며 그렇게 껄끄러운 모양새로 식사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날 전혀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아 한 식사는 식사(食事)가 아니라 식사(食死)였습니다. 그날 오후 내내 단단히 체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식사는 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친구나 친지들, 동료들, 적어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식탁에 앉는다는 말은 서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서로 일치한다는 것, 서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는 것, 서로 한 마음, 한 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식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께서는 당대 가장 손가락질받던 부류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으십니다. 회개한 세리 마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마태오의 친구 세리들이 잔뜩 몰려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유상종'이라고 세리 못지않게 밑바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죄다 몰려와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메시아가 세리와 창녀들과 한 식탁에 앉았다는 것,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큰 스캔들, 스캔들 중에 가장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특히 폼 잡기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그들은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서서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의 본질을 명백하게 선포하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는 다시 한번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위로의 손길을 느낍니다. '나이 들면 좀 나아지겠지?'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죄를 덜 짓겠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입니까? 눈덩이처럼 불어난 죄와 악습의 굴레를 괴로워하면서도 과감하게 벗어 던지지 못한 부끄러운 날들이었습니다.

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를 끝도 없이 반복해온 제게 하느님께서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도저히 현실성 없는 계획-의인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있는 그대로 살아가거라. 나는 죄인의 하느님으로, 죄인을 도와주러 이 세상에 왔단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건설하고자 하셨던 공동체는 죄인들을 기꺼이 수용하는 공동체, 나약한 인간들의 갖은 악습과 인간적 결함, 그간 쌓아온 깊은 상처를 감싸안는 공동체, 그래서 결국 인내와 사랑과 진심 어린 형제적 충고를 통해 정화의 길을 걷는 회개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 죄로 인해 깨어지고 부서진 사람들을 단 한번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던 사람들 그 사이에 자주 머무르셨습니다. 그들의 절친한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딱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자비의 예수님 앞에 죄인들도 더 이상 실망치 않게 됐으며, 더는 외롭지 않게 됐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인들도 새 삶을 희망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약자의 주님,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 죄인들의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편협한 사고가 문제
-안병철 신부-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갈릴래아에서의 전도로부터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신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뽑으셨습니다(마태 4,18-22).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부들만을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라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음식까지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계기로 당신께서 펼쳐 보이시는 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거칠게 저항했던 바리사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한 마디로 모세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 원칙을 온몸으로 살았던 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실천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는가 하면, 율법 제일주의적인 폐쇄적 사고로 기피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인 사고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논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를 공간마저 앗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에 있어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세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세리란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함으로써 유다인들로부터는 원성을 들어야 했지만 지배 세력인 로마로부터는 충직한 종으로 대접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런 세리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고에 젖어 있던 바리사이들이 보는 앞에서, 세리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음식까지 나누셨으니, 그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명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율법이 유다인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그 당시에, 예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러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표본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렇듯 특수 집단이나 특별한 민족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나라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나라를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나아가 ‘자기 집착’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쳐 놓은 울타리를 허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보는 예수님의 역설 : 죄인을 부르심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리인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식탁에는 세리와 죄인들도 함께 있었고, 그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신다고 불평합니다. 그 불평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은 병든 이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세리는 그 시대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세금 징수원입니다. 세금은 팔레스티나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오늘과 같은 세무서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정권은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고, 세리는 자기가 맡은 지역에 부과된 세금을 징수합니다. 그 시대의 세리를 풀어서 말하면, 세금 징수 청부인입니다. 세금 징수를 하청 받은 업자라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에 세리는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을 착취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리는 모든 주민이 미워했고 유대교 당국은 세리를 죄인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통하는 사람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율법, 특히 안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성전에 십일조를 납부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도둑과 강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세리와 같이 직업상 죄인으로 분류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고리대금업자를 비롯하여, 목자와 선원도 죄인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힘들여 가꾸어 놓은 농산물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고, 선원은 안식일에도 항해하는 배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셨다고 복음서들은 말합니다. 따라서 율사들을 비롯하여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의사는 병자에게 필요하고,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하실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라는 구약성서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이웃에게 자비로울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절대시하였습니다. 율법 준수만이 하느님이 인간을 보는 잣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주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또한 사람이 제물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 혹은 강자에 준해서 상상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율법 준수도 제물 봉헌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이웃을 위한 우리의 배려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오늘의 복음에서 당신이 병자를 돌보는 의사와 같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혀 낙담하며 사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같은 마태오복음서는 최후심판 이야기(25, 31-46)에서 이웃을 위한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는 것이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에는 죄인이 많았습니다. 병든 이, 가난한 이 등 불행한 모든 이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불행을 주신 것은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모든 일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이기에 병고와 불행도 당연히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가 마르코복음서(2,5)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병 고치신 것은 하느님이 그런 고통과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다는 것도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버리고 단죄하고 소외시키지만,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시선을 배워서 그 시선으로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하느님은 병든 이를 그 병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그 죄만으로 판단하지도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당당하게 당신과 같이 자비를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대자연에는 시행착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장애인들이 있고, 발생하는 불치의 병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시행착오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종 사고가 있어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합니다. 또 그런 시행착오로 장애를 딛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세웠던 계획들이 시행착오를 일으켜 실패를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종 경기에는 영웅으로 행세하는 승리자도 있고, 쥐구멍을 찾아 사라지는 패자도 있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로 발생하는 일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해도, 굶주려도, 병들어도 사람이 행복할 것을 원하신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이 행복선언이라고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고치고 살리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율법과 제물 봉헌만 소중히 생각하던 유대교는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소중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만 찾으면 하느님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을 우리의 시야에서 잃지 않고 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실천의 기원으로 살아계시게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반성과 우리의 결단과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무엇을 알아듣고 그것에 대해 말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약하고 소외된 이웃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참 종교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정 일 신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과 여러 예언자들을 선배 신앙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도 모두 같이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신앙을 받아들이셨지만 그 방법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달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논쟁하고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모시고 살지만 유대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라고 합니다.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잘 모시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은 종교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양식이나 관습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해진 법이나 규범을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받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골수 유대인들로서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경건하게 사는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상것들이라고 경멸하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관원들과 창녀들은 바로 그 죄인들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그 유대인들이 만났습니다. 예수께서 세관원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세관원들은 당시 부당하게 치부하고 이방인들과 상종해야하는 직업상의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세리 마태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마태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 때 많은 동료 세관원들과 죄인들이 기뻐하며 마태오의 집으로 몰려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즉석에서 잔치가 벌어진 거지요.

유대인들의 빈정거림과 항의가 빗발칩니다. 어떻게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먹습니까?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이구만! 예수님은 밑바닥과 변두리의 가난한 인생들에 특별히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런 심정을 격언 같은 말씀으로 토로하셨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제 구약성서를 인용하시며 공세적으로 나가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라! 수렁에 빠진 자들을 건져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야말로 중한 병자들이다. 바리사이들의 경건한 삶이 무가치 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자비가 없는 삶은 불충분하다고 질타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는 어렵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과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참된 종교인의 삶이요 구원의 삶이며 하느님의 삶임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선포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허례허식만으로는 참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설파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가 실천되고 선포되는 곳에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참된 종교가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형식적이고 메말라 빠진 종교에 참된 내용을 담으셨고 참된 종교의 창설자가 되셨습니다. 참 종교인이셨던 예수님이 우리를 참 종교인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가능성 1%>

-양승국신부(2002년)-

 

큰 이벤트에는 반드시 공식 상품이 지정됩니다. 88올림픽 때나 2002년 월드컵에도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한 기업체의 상품이 공식 상품으로 지정되었고, 그런 제품들은 사람들로부터 양질의 상품으로 인정받아 날개돋힌 듯 팔리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 사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죄인으로 인식되던 "공식 죄인"이 있었는데, 바로 세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갖은 욕설과 비웃음, 손가락질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한 것이었습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은 먹고살기 위해 가난한 동족들의 혈세를 갖은 방법을 통원해서 수탈해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리보전을 위한 상납의 방편으로 늘 돈을 뒤로 빼돌리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태오 역시 세관에서 세금을 걷던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 앞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피로와 수심으로 가득한 마태오의 얼굴을 바라보십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투명하고 선한 시선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던 마태오는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하기 시작합니다. 그날 들어온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만, 점점 당황해하는 자신을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세관 앞에 서글픈 표정으로 앉아있는 마태오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직업에 대한 심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동포들의 혈세를 착취하는 인간,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는 데 대한 깊은 좌절감이 마태오의 일상을 휘어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태오의 내적인 심경변화를 잘 읽고 계셨던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마태오를 붙들고 있었던 모든 굴레를 떨치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짐승 같은 인간"이었던 마태오를 당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로 삼으십니다.

 

마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합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부족하고 비참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인내하십니다. 우리 안에 긷든 1%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육체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영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볼 때 아무리 비참해 보이고 쓸모 없어 보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그분께는 모두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 변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하느님 자비 앞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비록 오늘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도 다시 한번 일어서려는 노력입니다.

 

 

죄인의 벗이 되기

-상지종신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어린 생각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한 수업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의 시간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수업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학교에서 유명한 '노는 아이'였던 그 친구는 양호실을 갔다왔다고 했지만, 사실 담배를 피우고 늦게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험악한 말씀이 봇물터지듯 튀어나왔고 우리 반 친구들 모두 고개를 떨구고 침묵 속에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반장이던 저는 도저히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중하게 항의를 했죠. 저는 당연히 수업이 끝나고 학생부실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선생님과 저 사이에 또 한바탕의 설전이 벌어졌죠. 선생님도 저의 태도에 대해 당혹스러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선생님과 저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 선생님과 이 일 이후 4년이 지난 대학교 2학년 때 화해를 했습니다.), 저는 당시 학교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한동안 '우상'(?)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학교 교육에 대해 그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 말 잘 듣는 학생 중심의 교육. 부족한 학생, 문제투성이의 학생, 공부 못하는 학생은 나 몰라라 하는 교육. 똑같이 담배를 피고 술을 마셔도 누구는 용서를 받고, 누구는 단죄받을 수밖에 없는 교육 환경.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철저히 순환되는 교육 환경 등.

 

모범생이었던 저였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학교에서 포기한 학생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학교 나름대로 선생님 나름대로 교육적 차원에서 방향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 저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둘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도 이러한 생각이나 느낌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회 곳곳에서 더 심각한 현상을 무수히 보아왔고 그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사회의 부조리가 양산한 추한 모습을 없애버리겠다고 못사는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죠. 상계동, 목동, 왕십리로 이어지는 죽음의 강제 철거가 그랬고, 대책없는 노점상 말살 정책이 그랬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깨끗한 서울을 만들겠다고, 서울을 더러운 부분을 밖으로 밖으로 몰아냈지요. 그래서 가진 자들은 더 깨끗해졌는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더욱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겉모습은 깨끗해졌을지 몰라도, 이미 더불어 살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양심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더러워졌습니다.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더러운 것을 치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악한 것을 잘라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적어도 사물에 있어서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다름니다. 쓰레기는 폐기처분해야 하지만, 어느 곳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 비견되는 사람은 비록 그 사람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도 인간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폐기처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더러운 부분을 정화시켜 깨끗하게 만들고, 그 사람이 악한 것을 포기하고 선한 것을 추구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품에 안아야 합니다.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지 말아야 한다."

"죄인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깨끗하고 선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깨끗함과 선함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것을 깨끗이 만들고 악한 것을 몰아내어 선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세상에는 항상 어느 정도는 더러운 것, 죄, 죄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상에는 모두가 깨끗하고 모두가 선한 것이 됩니다. 당장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가 깨끗하고 선하게 되는 날을 향해 나아갑니다. 더러운 것이 더러운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깨끗하게 되어지고, 죄인들이 죄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으로 거듭 나도록 품에 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세상이 단기간에 가시적으로는 분명한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은 요원하게 보이고 헛된 꿈처럼 다가올 지 모르지만 그 결실은 완전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 특히 인간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 못난 사람들, 부족한 사람들,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을 보듬어 안고 멀리 보이는 예수님의 세상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박상대신부-

Men sana in corpore sano!”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병든 자의 아픔은 육체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라틴어 속담이다. 육체가 약해지면 영혼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 시대에 한센병(나병) 등 모든 종류의 피부병 환자들을 물론이고 갖가지 육체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는 바에 의하면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사제의 선언에 의해 스스로 ‘부정(不淨)한 사람’이라고 외쳐야 하며, 병이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진지 밖에 자리를 잡고 따로 살아야 하기는 했다.(레위 13,46) 그러나 율법이 그를 죄인(罪人)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병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격리시키고 소외시켰는가? 바로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스스로의 죄를 씻기 위해 하느님께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던 사제들이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물론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사람이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죄인은 스스로에 의해 고백되거나 하느님에 의해서만 선언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보다 가급적 죄를 묻지 않으시며, 묻더라도 용서하기 위해 물으시는 분이시다. 어제 복음에서 중풍병자의 육체적인 병보다 정신적인 병을 더 걱정하신 예수께서 그의 병을 치유하기에 앞서 죄를 먼저 용서하여 주신 점만 보아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사고(思考)를 바로잡아 주신다.

  오늘 복음을 보자. 전직이 세리였던 마태오가 제자로 불림을 받는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그룹에 넣고 있다. 그러면서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목한 것이다.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 안에서 이러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계속해서 피력한다. 오늘 복음도 마르코가 전하는 세리의 소명사화(마르 2,14-17)를 옮겨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편집의도에 집중한다. 마태오의 편집 의도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다. 그래서 세관원의 소명사화에서 마르코가 말하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결국 마태오는 소명사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르코가 정작 예수의 제자로 불림 받은 알패오의 아들 세관원 레위의 이름을(마르 2,14) 12제자의 명단에는 마태오(마르 3,18)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감안하여 합리적으로 고쳤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그냥 따라다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제자로 삼은(마태 4,19) 뒤에 베드로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일어나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는 일(마태 8,14-15)을 보더라도 추종은 곧 친교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나선 마태오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동료 세리들과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탁공동체를 주관하시면서 친교(親交)를 선물로 주신다.(10절)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못마땅해 한다.(11절)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네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흑백(黑白) 친교 불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흑백의 논리를 ‘의사와 병자’(12절), ‘제사와 자선’(호세 6,6 참조), ‘죄인과 구원’(13절)의 원리로 보시면서 이 둘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상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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