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 유명 문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특유의 성찰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이른바 ‘형이상학적 스릴러’라는 마리에스 소설 특유의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확실해 보이는 삶 너머에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삶을 주관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불확정적인 것들로 가득 찬 인간 존재에 대한 관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
사실 사색과 성찰이 포함되어 느리게 진행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기발함으로 내면적 성찰에 중심을 두는 소설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 이로 인해 독자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우리의 삶과 존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라는 성찰적인 내용을 스릴러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이 비범한 작품은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할 현대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
인생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드라마 작가이자 대필 작가인 빅토르는 이제 막 알게 된 여인 마르타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러나 사랑을 나누기 직전 마르타는 원인 모를 고통을 호소하다 반쯤 벌거벗은 채로 숨을 거둔다. 빅토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 그녀의 남편 데안은 영국 출장 중이고 옆방에는 그녀의 두 살배기 아들 에우헤니오가 잠들어 있다. 빅토르는 아이의 식사를 준비해놓고 자신의 흔적을 지운 뒤 그곳을 떠난다. 마르타의 가족은 그녀가 죽을 때 혼자가 아니었음을 눈치채고, 남편 데안은 그 밤에 마르타와 함께 있던 사람을 찾는다.
한 달 뒤 빅토르는 자신이 누구인지 숨긴 채 마르타의 가족에게 접근한다. 어느 날 빅토르는 죽은 마르타의 가족과 점심 식사를 하게 되고, 점심 식사 후 마르타의 여동생 루이사를 쫓아간 빅토르는 어둠에서 벗어나 더 이상 비밀이나 미스터리를 간직하기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한다.
루이사가 빅토르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르타의 남편 데안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는데…… 데안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자기 아내의 죽음이 빅토르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복수할 것인가?
매혹적인 이야기…… 형이상학적 스릴러
우리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가끔씩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지 40년 뒤에 그 죄를 고백하거나, 점잖게 일생을 산 사람이 갑자기 경찰에 출두하여 자기 일생을 파멸로 몰아갈 비밀을 고백했다는 글을 읽는다. [……] 그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게 만들고, 그래서 숨겼던 것을 갑자기 드러내게 만드는 것은 바로 피로함이다. 도망자건 추적자건, 그런 게임을 끝내야만 저주받은 상태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_본문 중에서
주인공 빅토르는 ‘속고 속이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며,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상태야’라고 거듭해서 생각한다. 빅토르는 “그 누구도 이런 것에서 자유롭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속는다는 것이 바보라는 의미는 아니”며, “우리는 그런 것과 대항해서 열심히 투쟁할 필요도 없고, 그런 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고 네 무딘 칼을 떨어뜨려라. 내일 전쟁터에서 내가 살아 있었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고, 네 녹슨 칼을 떨어뜨려라. 내일 내가 네 영혼을 무겁게 짓누를 것이고, 네 가슴 속으로 들어가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네 생을 마감시키리라.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그럼 절망에 빠져 죽을 것이다’라는 대사는 소설 곳곳에서 마치 저주와 같이 반복된다.
하지만 정작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저주가 아니라 나약한 인간 존재들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 같다. 다만,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휘둘리는 운명을 온몸으로 부딪쳐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던 빅토르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나, 그리고 모든 사실을 알고 빅토르와 대면한 마르타의 남편 데안의 행동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본성적인 굴레를 드러낸다. 흔히 이 소설이 철학소설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고 묘사하는 데 있다.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
소설을 떠도는 유령의 모습을 통해, 혹은 전적으로 작가나 화자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즉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목소리로 이루어진 생각을 통해, 우리는 때때로 세상이나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것들은 아마도 우리가 만들 때에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확인합니다. _하비에르 마리아스, 로물로 가예고스 문학상 수상 소감 중에서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란 무엇이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인 소설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계속 쓰이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마리아스의 이러한 통찰은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세상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것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느냐’고 했지만, 마리아스는 ‘실제로 일어난 일 말고 상상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확실한 것 말고도 가능한 것이나 추측, 혹은 가정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실 말고도 좌절된 것이나 제외된 것, 또는 실제로 존재한 것 말고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허구를 통해서만 세상과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허구의 가장 정교한 형식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 책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가 보여주는 빅토르와 마르타의 남편 데안의 사건들 역시 이러한 허구의, 소설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비교적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믿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설명되지 않으며 아마도 설명될 수 없는 일화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 우리가 이용하지 못한 기회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것이라고 무시해버린 요인들, 아직도 다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조금만 알고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깨달음을 제공하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으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즉 일어나지 않은 일의 세계, 분명히 존재하나 내가 신경쓰지 않았던 시간의 등을 보여준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단지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역사 혹은 사건들, 또는 생각에 참여하게 되며, 그렇게 참여하면서 우리의 이해의 폭은 넓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