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
소달산(蘇達山) 중턱에 자리한 흥왕사는 사찰의 창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봉은사본말지(奉恩寺本末誌)』에는 소달화상(蘇達和尙)이 창건하여 흥왕사(霜旺寺)라는 사명(寺名)으로 불려졌으며, 1892년 독성탱 화기에도 상왕사(霜旺寺)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19세기말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1905년 창석산인(蒼石山人)이 쓴『상왕사법당중건상량문(霜旺寺法堂重建上梁文)』에는 고려 공민왕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창건한 고찰로 기록되나 그 시대의 유물이나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 없다.
흥왕사의 역사는 나옹과 소달 두 화상의 창건설을 지니며, 19세기말까지 상왕사로 불려지다가, 1905년 돈묵스님이 법당이 퇴락됨을 안타까워하여 절의 사세를 일으키기 위해 흥왕사라는 사명으로 개명한 듯하다.
1892년 대대적인 탱화의 불사 이후 급격히 쇠락한 흥왕사는 돈묵스님이 탁발하여 법당을 비롯한 삼성각의 칠성탱과 산신탱, 보조국사진영(普照國師眞影)을 조성하였으며, 가람을 정비하여 그 사세를 단장하였다.
그 뒤 1922년에 주지 성묵스님이 법당을 중수하고, 1931년 나옹화상이 봉안한 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불사 하였으며, 1932년 윤익(潤益) 스님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그 후 1933년 동요사(東寮舍)를, 1938년 서쪽 요사를 건립하였으며, 1943년 법당을 중건하여 현재 가람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옛 가람이 부분 적으로 소실되었으나, 1966년에 장지윤(張智潤)스님이 칠성각을 단청하고 대방을 보수하여 사찰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1968년에는 사찰 진입로를 정비하여 도량을 일신하였다.
1974년에는 성진(性眞)스님이 부임하여 가람을 정비하였으며, 1992년에는 선과스님이 취임하여 기존의 전각을 헐고 대웅전ㆍ삼성각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흥왕사 입구 보호수 은행나무
흥왕사 전설
흥왕사는 여주의 명찰 고달사와는 형제와 같은 절로 그 옛날 소달과 고달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달과 소달은 형제지간으로 각기 뜻을 품어 부처님 전에 그 몸을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하지만 각기 뜻을 품은 바가 달라 고달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절을 세웠으며, 소달은 사찰을 진리의 도량으로 생각하며 오래도록 중생을 교화하는 절을 세웠다.
한때 고달이 세운 고달사는 고려의 명문사찰로 명성을 떨쳤지만 일찍이 폐사되었고, 소달이 세운 상왕사는 조용히 은둔하며 그 법을 이어나가 아직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다.
흥왕사 입구
흥왕사 삼층석탑
흥왕사 범종각
흥왕사 관음전
흥왕사 관음전내
흥왕사 극락전
흥왕사 극락전내
흥왕사 동종
흥왕사 삼성각내 칠성탱
흥왕사 독성탱
흥왕사 산신탱
흥왕사 찾아가는 길
여주톨게이트에서 흥왕사까지는 30분정도 소요되는데, 37번 국도를 이용하여 신륵사로 가는 길을 찾으면 쉽게 흥왕사를 찾을 수 있다.
이곳 톨게이트에서 흥왕사로 가는 길은 여주대교를 지나 남한강 콘도와 신륵사가 있는 대로에서 42번 원주ㆍ북내방면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42번 원주방면과 345번 양평ㆍ북내 방면의 두 갈래의 길 중 북내방면으로 들어서면 흥왕사가 있는 북내면과 만날 수 있다.
이곳 북내면에서 흥왕사까지는 자가용으로 5분거리로 안내판이 없어 길을 헤맬 수 있으나, 스카이벨리 골프장을 찾으면 쉽게 금당교를 지나 흥왕사로 오르는 자그마한 길과 안내판을 찾을 수 있다.
흥왕사는 소달산 거의 정상에 있는데 입구에서부터 콘크리트 포장된 작은 소로를 따라 약 1.6km 정도 오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