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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공과가 있다. 공과(功過)란 공로와 과실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역사란 어제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이 내일을 위하여 기록한 글이다. 사건은 객관적이나 사관은 주관적이다. 조선건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잘못을 부각시켜야만 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전정권의 과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회개한 사건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회심하여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그 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택했습니다[1],[4]. 감옥 생활 중에 성령의 감화를 받았고, 그 경험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1]. 회개 후에는 이승만이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의 삶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4].
이승만의 감옥에서의 회개는 그의 삶에서의 전환점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도전을 주는 이야기로서, 인내와 희생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줍니다. 회개의 힘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화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회개는 그가 개인적으로 겪은 경험이었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한 것임을 상기시키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나갈 동기를 부여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어거스틴의 회심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이 되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8월 15일 건국기념일을 경축하면서,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을 세운 분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종북 주사파 공산주의자들은 지금도 이승만을 친일파, 미국의 괴뢰, "하와이 깡패" 등으로 왜곡 폄하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부"이승만이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여간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니다.
70여 년 전 해방을 전후해 박헌영의 남로당이 우리나라의 사회여론을 혼란스럽게 했듯이, 윤석열 대통령은 7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지금 현재도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시국을 진단하였다. 마르크스주의의 가르침에 따라,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 전체주의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세력 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산주의는 건국초기부터 이승만이 맞서 싸웠던 세력이다.
최초의 개혁파 운동권 이승만의 회심(回心)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볼 때, 386, 586 운동권 보다 먼저 봉건주의 왕정을 민주 공화정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며 [협성회보] 신문을 발간하고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개혁파의 만민공동회를 주도해 민중 1만여 명 앞에 친러시아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국을 세울 것을 호소한 최초의 민족지도자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신분평등과 남녀평등, 민주주의를 외친 최초의 민주화 운동권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20대 젊은 시절 왕조 봉건국가 조선을 개혁해 민주공화국을 만들자고 외친 혁명투사였다.
이 시위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한성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며 5년 7개월을 보낸다. 100대 태형도 받고 갖가지 고문을 당하고 목에 칼을 차고 성경을 읽다가 배재학당에서 들은 설교사들의 복음이 생각났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승만은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시고, 이 민족을 구원해 주소서!" 그는 주변이 온통 빛으로 가득차고 마음이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회심은 한 거듭난 사람이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의식적 행위이다(Hoekema, 1989). 그는 양녕대군의 후예로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회심한 첫 번째 양반이 되었다.
1919년에 간행된 [신한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회심한 후로 줄곧 미국유학시절이나 한국에 귀국해서나 자신을 선교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그가 한성감옥(종로감옥)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난 후 인생관이 바뀌고 조선을 예수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회심하여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살아계시며 참 되신 하나님"(살전 1:9)을 섬기는 선각자가 되었다.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인 이승만은 동료죄수들은 물론 간수까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도미해 학사, 석사를 마치고 어떻게 프리스톤대학교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정치학박사를 취득하였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은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의 위험을 처음으로 간파한 지도자였다. 그는 공산세력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용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으로 직시하고 공산주의가 타협이 불가능한 기독교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을 알고 백선엽 장군을 통해 남로당원 박정희를 전향시켰고, 간첩과 공산주의자들을 색출 처단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반공 자유민주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으로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이라는 토대 위에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토지개혁과 교육개혁을 먼저 단행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후의 산업화와 민주화도 이룰 수 없었다.
개인에게나 국가에나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이승만이 회심하여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건국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지 못하고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노예국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유영익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유전인자를 가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功7過3이라고 하는데, 건국초기 6.25 전쟁 등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권위주의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공10 과0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은 IQ가 높은 천재였고, 대인관계 지수 EQ도 높은 외교전문가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자주 인용한 말씀이다.
이승만이 기독교로 회심함으로, 1948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를 선택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10대 강국, G8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모두 이승만의 회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승만 한 사람의 회심이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정동섭 교수(전 침신대·한동대 교수,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한교연 종교문화쇄신위원, Ph.D.)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성서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3].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과 주권을 가진 국민 앞에서 선서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이 성서를 사용하여 취임식을 거행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헌법에서도 대통령의 취임식은 엄숙한 의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대통령은 국민 앞에서 선서하여야 합니다[6]. 이는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엄숙함과 책임감을 다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대통령 취임식의 관행 중 하나로, 대통령이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다짐하고 국민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관행으로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1]. 이러한 관행은 대통령이 국가의 가치와 원칙을 존중하며,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다짐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성서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한 것은 그가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함을 다짐한 것으로, 한국의 정치사 및 대통령 취임식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휴전 회담 중에 반공포로 석방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1]. 그리고 6월 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의 석방을 추진하고,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러 석방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습니다[2]. 이로 인해 원용덕 중장은 6월 18일 자정 전후에 비밀 작전을 전개하여 반공포로들을 석방했습니다[4].
1953년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약 35,400명의 반공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석방되었는데, 마산 포로수용소 경비대장 한필동 대령이 이 과정을 이끌었습니다[3].
이러한 사건들은 한국전쟁 종결을 위한 휴전협상에서 중요한 이슈였으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독교를 빼고 이승만을 평가 말라
이승만의 90평생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한성감옥에서 ‘성령’을 받은 순간이다.
기독교를 경멸하고 선교사들을 증오했던 23세 청년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기도가 터져 나오고, 기도한 순간 하나님의 응답이 그를 뜨거운 불로 지져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이후 이승만이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무한봉사‘ 그것이다.
이어서 출옥하자마자 떠난 미국 유학,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에 ’합당한 영육‘을 만들기 위한 대장정이다. “나는 5년 내로 박사까지 받아야만 조국에 돌아가 할 일을 할수 있으니 입학시켜 달라”고 하버드 대학원장에 보낸 편지가 잘 말해준다.
이승만이 해야 할 일이란 감옥에서 확신을 얻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말대로 5년에 학사-석사-박사를 따낸다. ’믿으면 이루리라‘ 성경말씀대로다.
한성감옥 5년7개월, 미국 유학 5년 6개월, 합해서 11년 1개월---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윌슨 총장(뒷날 대통령)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곧 탄식을 토했다. “나는 준비가 끝났는데 내 할 일을 해야 할 나라가 사라졌구나.” 8월 29일 서울에선 경술국치가 발표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승만의 사명은 ’왕이 포기한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행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초지일관하였다. 다름 아닌 “기독교 선진국 영국-미국과 동등한 나라 만들기’이다.
의병투쟁이나 암살 등 살인폭력을 거부하고 암살사건 변호를 거절하고 ‘사탄의 독재’ 공산주의 실체를 세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이승만의 통찰력 등은 기독교정신을 빼놓고 설명하려 하면 근본적인 오류을 범하게 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에서 나타난 이승만의 모든 행적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어낸 응답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타고난 천재성이 동서양 학문을 쌓은 위에 ‘하나님의 눈’과 영성(靈性)으로 무장되었음을 간과하면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인간 평가를 제대로 할수 없다는 말이다.
그의 보좌관 미국대학교수 올리버는 기록했다. “이승만의 명상은 절반이 기도’라고.
부인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은 걸어가면서도 기도한다‘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이 연재는 그래서 이승만의 한성감옥 생활과 미국유학 행적을 압축 정리한다.
종신형을 받은 죄수복 차림 이승만(자료사진)
▲ 종신형을 받은 죄수복 차림 이승만(자료사진)
“세상 것 다 버리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다”
1899년 1월 혹한의 지옥에 던져진 ‘대역죄인’--이승만에겐 입헌군주제 추진과 박영효 쿠데타 음모 관련 혐의에 탈옥 미수란 죄가 덧씌워졌다. 그가 탈옥한 것은 1월30일, 상동교회 청년동지회 주시경(뒷날 한글학자)이 권총 두 자루를 구해주어 동지 최정식과 함께 도망친다.
“한시 바삐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고 싶어” 경찰 구치소를 빠져 나왔으나 동지들은 사라지고 이승만만 잡혔다. 2월1일 청계광장 근처 한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쿠데타 음모에 탈옥까지 누가 봐도 죽어야할 사형수, 24세 이승만은 참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을 각오하였다. “어느 날에나 죽이려는고...” 이승만은 이 세상을 체념한다.
목에는 10㎏ 넘는 큰 칼을 메고 가슴과 두 팔 두 손목은 수갑과 오라 줄에 묶이고 두 발목은 무거운 차꼬에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족쇄를 질질 끌며 날이면 날마다 끌려 나가 형틀에 엎어놓고 묶여 고문을 받는다. 장정 두 명이 다리 사이에 옹이 박힌 몽둥이를 넣어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엔 세모난 대나무 토막을 끼워 살점이 떨어지도록 비틀었으며,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고 매질을 계속하니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 있으랴.
그날도 그런 형벌을 받은 뒤 감방 흙바닥에 던져진 죽음의 순간, 피 흘리는 입술에서 비명 같은 기도가 통곡처럼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목숨까지 포기한 초죽음의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뜻밖에도 하나님의 뜨거운 응답을 받았다.
“그 순간,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새하여 가지고 있던 증오심과 불심감이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자기네가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과 옥중잡기 연구] 유영익 지음)
뒷날 기도가 나온 순간의 심정을 이승만은 이렇게 돌아본다.
“그 참혹한 감방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사람들이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상의 감옥에 가게 될 터였다. 그러자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선교사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그런 기억이 나자 그대로 큰 칼에 얼굴을 대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증오심이란 당시 미국의 ‘하와이 병합’(1897)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
하와이 사탕수수 무역을 하던 미국이 선교사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섭한 뒤 하와이 여왕을 추방하고 섬들을 차지하였으니, 조선을 개방시키고 온 선교사들도 한반도를 그렇게 먹기 위한 미국 정부의 ‘앞잡이’들로 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이승만이 ‘뜨거운 불의 세례’ 은총을 받자 성경이 읽고 싶어졌다.
단발령때 자신의 머리를 잘라준 에비슨 선교사에게 영문성경과 영어사전을 넣어달라고 부탁, 큰 칼 쓰고 오라줄에 묶인 몸으로 ‘신약성경’을 쉬임없이 읽었다. 동료 죄수 한명이 파스를 서고 도 한명이 성경책을 한 장씩 넘겨주었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 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다”
마침내 죄수 이승만은 기독교의 회심(回心)을 통하여 성경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니 원죄를 속죄 받고 ”영생불멸의 구원을 받았다“고 했다.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젊은 날의 이승만] 유영익 지음,연세대출판부,2002)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 프랑스인 장 드 팡스의 저서 [한국에서:1904]에 실려있는 사진.한성감옥 밖에 나온 이승만(중앙)이 헬멧 쓴 아펜젤러로 추정되는 서양인과 대화하고 있다.([젊은 날의 이승만] 유영익 지음,연세대출판부,2002)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출판부)
최대의 정적이 재판장, 뜻 밖에 종신형 판결
3월18일 첫 공판을 시작하여 7월10일 재판에서 이승만은 종신형이 확정된다.
박영효 쿠데타 관련 혐의를 벗었고 탈옥도 종범으로 인정되어 태(笞)100대, 종신복역수가 되었다. 이때의 재판장이 홍종우, 황국협회 회장으로 이승만의 만민공동회를 습격을 지휘했던 수구파 행동대장이 그가 어느 새 재판장이 되어 이승만을 재판한 것인데 결과는 뜻밖이었던 것이다.
”나의 정적이던 홍종우가 평리원의 재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나의 형틀을 제겨하도록 명령했다. 홍종우는 황국협회 회장으로서 나의 가장 큰 정적의 하나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생명을 살려주려고 온갖 힘을 써주었다. 찹으로 인생의 야릇한 역정이었다. (중략) 최정식과 내가 재판을 같이 받게 된 날, 나는 몸이 몹시 쇠약해 있어서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처지였다. 최정식은 활기 있게 웅변조로 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나는 나 지신을 방어할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최는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나에 대한 진술가운데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판사는 다음날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는 자기가 한 말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증거품으로 나의 권총이 제출되었는데 나는 한방도 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중략)...재판장 홍종우가 나의 부친에게 나를 살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는 소식은 퍽 뒤에 들었다...“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당시 이승만의 구명운동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우선 미국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외교계를 통해 감형과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독립협회에 호의적이던 한규설 중추원의장의 노력은 그의 편지가 열통쯤 남아 기록을 전한다. 또한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일반 지지 세력이 급증, 황실 호위대 병사까지 [제국신문]에 이승만 구명을 위한 시(詩)를 게재할 정도였다.
그의 형기는 그해 12월13일에 15년으로 감형되고 12월 22일엔 10년으로 감형된다. 이는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기념 특사의 일환이었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2/12/05/20221205001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