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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불의는 언제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억압은 언제나 관심의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올해 환갑이 된 어떤 분이 깨달음을 위하여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바, 그 분의 삶은 언제나
정의를 주장하는 일상이었죠.
그리하여 '세일러 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주위를 돌아보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 뿐인데 세상은 그렇지 않죠?
왜 그럴까요?
정의를 주장함은 쉽지만 그 주장이 때때로
더 심각한 일을 불러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소하게 연예인들의 치부에서부터
국가적인 대사에 이르기까지
분을 삭이지 못해 들끓는 목소리는 차고 넘치는데...
어느 누구도 그들의 치부가,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손가락질하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란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미워하느라 사람을,
그 존엄을 손가락질하는 에너지는
고스란히 지구의 대기권에 쌓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분리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비난과 비판을 정의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예로 자주 듭니다.
히틀러는, 우리 안에 있는 0.000001%의 히틀러가
쌓이고 쌓여 나타난 인물입니다.
그 누구도 이 만큼의 히틀러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이 모이고 모여 한 인물에게 그 역할을 맡기게 됩니다. 극악무도해 보이는 범죄자라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한 적은 없습니까?
물론 이것으로 범죄나 독재를 정당화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비난하는 자세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려다
차갑게 빈정거리고 있는 자신을 느껴보세요.
인터넷 공간의 댓글이나 일상의 수다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나요?
너그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들 원수조차 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세상은 승격됩니다.
불가에서는 바꿀 수 없는 세가지 진리란 뜻의
삼법인의 하나로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른바 '제법무아'라는 것입니다.
한자로 쓰인 단어에 겁먹지 마세요.
'모든 법에는 '나'가 없다' 직역하니 아리송하죠?
모든 역할에서 분리된 나는 있을 수 없다.
의역하자면 이러합니다.
시적으로 말해볼까요?
세상 모든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네
저 하늘의 태양도 내 안에서 비치고
저 대양의 파도도 내 안에서 일어나지
내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도무지 없다네
오로지 이것을 궁구하십시오.
변화가 일어납니다.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책만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승격되는 게 아닙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앞날을 예지하고 세상사를 뚫어보는 능력 따위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명상의 목적을
이와 같이 왜곡되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아닙니다.
핸들이 없는 자전거와
핸들이 없는 스포츠카는
어느 것이 더 위험합니까?
지식도 능력도 클수록 위험합니다.
핸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말이죠.
명상은 어떤 신비한 능력을 추구함이 아니며
종교를 뒤엎는 이단도 아니며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고행도 아닙니다.
오로지 깨달아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알고 바로 쓰게 하는 것
그리하여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
지금 여기를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이나 지위나 소속이나 직업이나 종교나..
그 어떤 것으로도 나누지 마십시오.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자로 남지 말며
사랑받는 자로도 남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것보다 저것이 좋은 식의 선호가 아닙니다.
그저 존재의 무한한 생명입니다.
지금 이 순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