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 예배다
□ 본문 : 창세기 46장 1-7절
야곱과 그의 가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갑니다. 단순한 이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야곱 개인적으로는 가나안의 삶을 마무리하고 애굽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1.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야곱은 130년 동안 가나안에서 살았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가나안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가나안을 떠나 애굽을 향하면서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가나안에서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야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자신의 꾀로 사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힘들고 마음 아픈 순간들도 있었고, 내가 우리 가정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운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호받고 살았습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한 주를 살면서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힘들고 아픈 시간을 보내서 받은 은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힘들고 아팠는데도 어떻게 오늘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까? 은혜입니다. 우리가 당한 힘들고 아픈 일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컸기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가 은혜 받을 수 있나, 그런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끄러운 죄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는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의 은혜를 주십니다. 십자가가 그 어떤 죄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이 우리의 죄보다 십자가의 은혜가 더 크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한 주간 거룩하게 살았습니까? 승리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거룩하게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과 지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넘어진 자도 감사로 예배드립니다. 넘어졌음에도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일으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승리한 자도 감사로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현장인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차갑습니다. 기쁨의 웃음도 없고 회개의 눈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인데, 이렇게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은혜인데,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은혜인데, 이것이 은혜라는 것을 모릅니다. 영의 눈이 가려져서 자신을 둘러싼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받은 은혜가 없습니까?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을 우리가 영원한 천국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이 놀라운 은혜만 잊지 않아도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가나안을 떠나는 야곱은 감사로 예배를 드립니다. 130년 동안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돌보아주신 은혜, 130년 동안 붙드시고 지켜주신 은혜, 130년 동안 인도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예배드립시다.
2. 전적 의탁입니다.
야곱은 애굽을 향해 갑니다. 애굽에 요셉이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을 만나는 것 하나만으로도 애굽에 갈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곡물창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기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하는 야곱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인생을 마무리해야할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두려움을 안고 애굽을 향해 가는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을,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긴 자는 예배드립니다. 1년 365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삽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한 주간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학교, 직장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 일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것 같고, 이 시간에 공부하지 않으면 뒤쳐질 것 같고, 이 시간에 놀지 않으면 인생이 재미없을 것 같고, 이 시간에 휴식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을 것 같고, 이 시간에 사람 만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가정과 회사와 학업과 건강과 인간관계를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과 생명을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로 하나님께 전적 의탁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서 예배가 끝나서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배 중 유일하게 은혜 받는 시간은 축도시간입니다. 일단 예배는 드렸으니까 의무는 다한 것입니다.
※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 이라는 책에 ‘벌러르’라는 자매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먼저 믿은 우리 중에는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뜻이 아니다. 그렇게 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둘 다 누리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걸치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용규, 내려놓음, 규장, pp.17-18)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이 예화가 생각났습니다. 잃어버린 소를 찾던 벌러르라는 소녀는 어떻게 소를 찾는 것을 멈추고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까? 소를 포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소를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 소녀에게 예배는 전적 의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것은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게으름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나의 것인 것처럼, 나의 열심과 수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인생과 하나님께 의탁하는 인생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벌러르라는 소녀는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소를 찾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절대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소를 영영 잃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의탁한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니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 예배드립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예배드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만남이 무엇입니까? 그 일이 그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십시오. 아니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인생을 사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생명을 거십시오. 그러면 예배를 통해 참된 안식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평안을 누립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야곱이 예배를 통해 애굽으로 향하는 자신의 인생과 가정을 하나님께 의탁했던 것처럼,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평안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3. 순종의 결단입니다.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하는 야곱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이렇게 떠나도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근 때문에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큰 어려움을 당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이삭도 기근이 와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블레셋 땅에 머물렀습니다.(창26:2) 하나님은 이렇게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는 기근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에도 가나안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대처럼 야곱의 시대에도 기근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야곱도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면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요셉이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 자신과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남쪽 경계인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요셉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기근이 심해도 가나안 땅에 남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도 야곱과 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뿐 아니라 권면과 책망의 말씀도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예배는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느 길로 가야할지 답을 얻습니다. 설교자가 스쳐지나가듯 본문과 별 상관없는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짧은 메시지가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멈추는 것입니다. 극심한 기근으로 죽을지 몰라도 가나안 땅에 남아있으라고 하시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주신 말씀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수 없이 드리는 예배는 절대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배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힘입어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예배를 향한 기대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하는 기대감, ‘오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 하는 기대감 말입니다. 이런 기대감이 없으니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도 순종하지 못합니다.
※ 작년 12월부터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시다 자매님이 있습니다. 작년 12월에 세례를 받았으니 초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자매님이 설교시간에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자신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준 아버지였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아버지가 화를 내면 그 상황을 빨리 넘어가기 위해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화가 난 아버지는 어머니를 쫓아냈고 자신도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와 무려 3년 동안이나 연락을 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잘못한 것은 아버지인데, 아버지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받았는데, 그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용서하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3년 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은 아버지가 자매님이 보내주는 찬양을 들으면서 3분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마음이 열린 것이지요. 자매님의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자매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받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분명 우리도 이 자매님과 같은 예배를 경험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이 변하는 예배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갈 길을 인도하시고, 예배를 통해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능력이고, 이것이 예배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이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선포된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 가운데 예배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예배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순종의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드린 예배는 은혜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야곱이 드린 예배는 전적 의탁이었습니다. 야곱이 드린 예배는 순종의 결단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드린 야곱은 예배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야곱이 경험한 예배의 축복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나누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 봅시다. 예배는 은혜의 감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에는 하늘의 기쁨이 있습니다. 예배는 전적 의탁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에는 하늘의 평안이 있습니다. 예배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살아있는 예배는 기쁨과 평안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삶의 변화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예배에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은혜의 감사, 전적 의탁, 순종의 결단이 있는 예배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