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천년불패지' 의 땅, 검재
이제 학봉종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볼 차례다. 대구에서 안동을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안동 시내 쪽으로 들어가다 왼편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우리말 표현은 '검재'이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의 기록인<영가지(永嘉誌)>를 보면 검재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곧 천년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으로 소개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 즉 180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은 가금 쓰지만, 천년불패지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을 만큼 이 말은 엄청난 표현이다.
학봉종택이 이러한 천년불패지지인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불패(不敗)'가 지칭하는 바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전쟁, 기근, 전염병 같은 삼재(三災, 세 가지 재난)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살기 좋은 동네이다. 검재의 풍수가 어떠하길래 옛사람들은 이처럼 찬탄을 금치 못하는가.
검재 지역의 산세가 주는 특징은 부드러움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했다. 부드러움과 정이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처음 검재마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첫인상은 산세가 매우 부드럽다는 것이다. 100미터 내외의 야트막한 동산들이 주조를 이루는 산세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동산들이 풍기는 부드러움과 평화스러움을 잘 못 느끼겠지만, 나처럼 수많은 지역의 산세를 관찰하러 다니는 사람에게는 이 부분이 아주 인상적으로다가 온다.
멀리 높게 보이는 산인 학가산, 천등산, 조골산, 줄기가 내려와 기세가 순해지면서 상산, 주봉산을 형성했고, 상산과 주봉산이 다시 들판 쪽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순해져서 야트막한 동산을 이뤄놓은 것이다. 이곳 검재의 산세를 보니 몇 년 전 답사한 중국의 강서성 산세가 떠올랐다.
강서성은 중국 풍수의 양대 파벌인 형기파(形氣派)와 이기파(理氣派) 가운데 형기파의 본향이다. 사람의 관상을 보듯 산의 관상을 중시하는 것이 형기파이고, 산의 사주를 중시하는 파가 이기파이다. 형기파가 산의 관상을 볼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전체적인 형태이다. 즉 산세가 원만하고 부드러운지 먼저 본다. 산이 높지 않고 둥글둥글 하고 바위산이 없을 때 부드럽다고 한다. 나는 당시 강서성의 산세들이 대부분 바위 절벽 없이 둥글둥글한 금체(金體)의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형기파가 태동할만한 산세로구나!
그런데 안동의 검재 산세가 이와 흡사하다.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강서성보다 산이 더 낮고 원만해서 보는 이에게 끊임없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준다. 살기(殺氣)도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없는 땅에서는 살생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적게 일어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검재는 문사가 살기에는 최적의 산세가 아닌가 싶다. 문사는 거친 부분을 다듬어 부드럽게 바꾸는 사람이다. 거칢에서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 과정이기도 하다. 거친 사람이 다듬어져 부드러워질 때 그 강함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래서 선비는 외유내강을 전범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검재의 산세는 외유내강의 문사를 길러내는데 최적의 산세를 갖추었다. 평소에는 지극한 예를 중시하는 선비의 고을이나, 굴욕은 참지 못하고 대항하는 검재 사람들의 기질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검재 산세의 장점 가운데 또 하나는 물이 원만하게 흐른다는 점이다. 냇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 우선 물 속의 산소 함유량이 적어서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고, 급류가 흐르면서 그 물살을 따라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 그래서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보다는 S자나 갈지자로 흐르는 물을 풍수가에서 선호한다.
검재를 흐르는 개천들은 S자 형태로 원만하게 흐른다. 검재의 지형이 경사가 적은 평지이고 개천이 동네마다 흘러 수량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안동대 이효걸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검재의 냇물들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뭄의 피해를 비교적 덜 받고, 마을에 저수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낙동강 본류와 개활지(開豁地), 앞이 탁 트인 너른 땅)를 끼고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배수가 잘 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해 피해가 크지 않다고 한다. 필요한 만큼의 물을 주산인 주봉산과 상산에서 일정하게 공급받으면서 물을 빨리 지나가게도, 머무르게도 하지 않는 것이 검재 마을의 수세(水勢)라는 것이다. 물이 적당한 동네 검재는 농사 짖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