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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신앙고백
□ 본문 : 창세기 48장 8-22절 (봉독은 15-16)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로 입양했습니다.(48:5) 야곱이 요셉을 장자로 삼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물려받을 기업의 두 몫을 요셉에게 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양자로 삼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섬기던’의 뜻은 ‘가다’ ‘쫓다’ ‘향하다’입니다. 그래서 ‘섬기던’을 영어성경(NIV)은 ‘걸었다(walke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어성경도(新改譯) ‘歩ん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첫 번째 신앙고백이었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십자가로 죄를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죄사함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승리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죄의 유혹을 이깁니다.
※ 예수님의 사람2 훈련교재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목사님, 저의 삶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 나의 생명 되셨다는 고백을 계속하면서 끊어지게 된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음란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음란의 죄는 참 끊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내 안에 오셨고, 성령께서 나와 늘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을 계속 고백하면서 정말 음란의 죄가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정말 놀라운 변화입니다.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죄였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넘어지고 결심하고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눈이 뜨이고 나서는 음란이 더 이상 저에게 큰 유혹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이 하셨습니다.
믿음의 눈이 뜨이고 나서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음란의 죄가 끊어졌습니다. 믿음의 눈이 뜨였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정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음란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음란의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용서를 믿으면서도 십자가의 승리는 잘 믿지 못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여전히 죄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나눈 성도의 간증처럼 결심하고 넘어지고 결심하고 넘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결심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결심해봤자 또 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서 이렇게 죄의 패배감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임마누엘의 믿음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성질은 안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혈기와 분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혈기부릴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화낼 사람이 있습니까?
장인장모님이 일본에 오셨을 때입니다. 그때 아이들 중에 하나가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아마 평소의 저였으면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장모님이 집안에 계셔서 그냥 참고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기억도 못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화 낼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겠지요. 집안에 어른이 계셔도 화내지 않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화를 내겠습니까?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제는 혼잣말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나도 모르게 불쑥 ‘이건 너무하다’라는 말이 나오다가 곧장 입을 닫습니다. 어느 때는 손으로 내 입을 가리며 말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답답해 보입니까? 반대로 감정대로 말하고 기분 따라 화내는 것이 자유입니까? 오히려 반대입니다. 감정대로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자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대로 말하고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릅니다. ‘그때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하면서 말입니다. 심지어는 그 말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감정적인 말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말이 생각보다 먼저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을 내뱉는 순간 ‘아차’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이미 말을 내뱉었는데 말입니다. 내뱉은 말은 취소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내 입이지만 내 생각대로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말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눅6:35)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필요한 말만 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거짓말 못합니다. 죄짓는 입이 아니라, 마귀의 도구가 되는 입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사람들을 살리는 입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신 이유는 이와 같이 죄에서 승리하는 인생, 참 자유를 누리는 인생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삽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삽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임마누엘의 믿음이 교리가 되면 천국을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야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천국의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발견한 자에게는 천국의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밭을 얻고 나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발견한 후에 기뻤습니다. 아직 소유하지 않았는데 기뻤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소망을 가지는 순간부터 기쁩니다.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기쁩니다. 천국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소망을 가지는 순간부터 안식을 누립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나서 누리는 축복 중의 하나가 평안입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평안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몇 주를 가지 못합니다. 어느 때는 며칠을 못 갑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한꺼번에 오면 좋은데, 그러면 한꺼번에 무지 힘들고 한 동안은 평안을 누릴 텐데 문제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오고 … 그래서 마음 편할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시험에 들었다가 회복되면 또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듭니다. 갈등하던 분들이 화해한 소식을 들으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마음 편히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목회현장입니다. 그래서 안식주간을 가져도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주간을 가질 때 종종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목사님, 교회 일은 다 잊고 편히 쉬다 오세요.’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저도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주간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회를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느 때는 숨이 막히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제가 성도님들을 주님의 뜻대로 잘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훈련을 받을 때는 변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 교제하니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훈련받기 전과는 다르지만 제자훈련을 받을 때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목회의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유기성 목사님이 우리교회 창립 10주년 성회와 감사예배를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때 유 목사님께서 전하셨던 말씀이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손님처럼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렇게 오래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유 목사님이 24시간 예수님을 보라보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으로 동행일기를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던 문제에 대해서 유기성 목사님을 통해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적인 삶이 되지 않고 교리로 끝납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성경 읽을 때,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가르칠 때, 성도님과 상담하고 심방할 때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교리로는 임마누엘 예수님을 아는데 실재로는 이 진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와 성도님들을 섬기면서 걱정과 염려가 끊이질 않았던 것입니다.
창립 10주년 성회를 계기로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동행일기를 쓰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했습니다. 제가 처음 동행일기를 썼던 때가 2011년 9월 29일 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영성일기를 쓴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에 도전한다.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가는 훈련이다.”
동행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13년이 흘렀습니다. 글쎄요. 교회가 어떻게 얼마나 변했는지는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좀처럼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내가, 어느 때는 성도님의 말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던 내가, 이제는 임마누엘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힘이 듭니다. 이런저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곧장 마음에 평안을 회복합니다. 어떤 문제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를 가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가 누리고 있는 복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처럼 혈기를 부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음란과 욕심과 교만이 고개를 듭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간증이 아닙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손님이 아니라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를 결단하신 분들, 예수님과의 동행이 실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분들, 그 갈망으로 동행일기를 쓰면서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훈련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간증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야곱의 첫 번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이 첫 번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두 번째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2. 나의 출생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기르신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두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인생의 구체적인 모습이 목자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기르십니다.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모든 순간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다보면 어느새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분노가 올라올 때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분노가 힘을 잃습니다. 음란과 욕심과 교만과 미움이 고개를 들 때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떠나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을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 묻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먹이시고 입히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어떤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야곱의 신앙고백 가운데 특별히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라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야곱은 출생부터 자신이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첫째가 아니라 둘째입니다. 차라리 몇 년 뒤에 태어났다면 그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망령된 사람 에서가 장자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자신이 둘째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의 약점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문의 족장이 되기는커녕 이 일로 인하여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 밑에서 당한 고생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첩과 동침하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가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47:8) 물었을 때 야곱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누구라도 야곱처럼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불행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떠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야곱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론 야곱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인생의 두려운 순간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언제나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때로부터 17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7년 전의 고백과 전혀 다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7년 동안 야곱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자신이 둘째로 태어난 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밧단 아람에서의 20년이 자신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자신의 고통이 자신의 불순종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임마누엘의 신앙고백을 하면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힘들고 아프고 슬펐던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야곱처럼 고백합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3.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
야곱의 세 번째 신앙고백은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람이 만질 수 있도록,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밤새도록 씨름했던 사람이 바로 성자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32:30)
야곱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의 목자시면 환난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도 환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기에 환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야곱 자신이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때때로 양을 이끌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갑니다. 바로 양을 위해서입니다. 양에게 꼭 필요한 꼴을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꼴을 먹어야 건강하게 새끼도 잘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환난이 있었지만 그 모든 환난은 결국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환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시는 신앙고백이 분명하니,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이 신앙고백이 분명하면 우리가 당한 환난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신앙고백이 분명하면 더 이상 환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어떤 환난을 당해도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환난을 당할 때 그 환난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라갑시다. 그러면 환난을 통해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채우시고 붙드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인생의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심을 고백하는 성도는 어떤 환난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이며, 그 환난을 통해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 가지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야곱처럼 이 신앙고백으로 자녀들을 축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축복대로 자녀들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자녀들의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