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담원 정인보 편
석야 신웅순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여태껏 달라 붙은 잎새들이 서리 맞은 듯 툭툭 진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더욱 붉고 샛노랗다.
만추는 적막하다. 높은 하늘 때문이고 깊은 산 때문이다. 봄에 꽃이 없고 가을에 낙엽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삭막할까. 술은 있으되 시가 없고 꽃은 있으되 달이 없다면 삶 또한 얼마나 팍팍할까.
어머니는 있으나 나라가 없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위당 선생은 ‘자모사’를 이렇게 말했다. 자모사 일부이다.
이 시조는 지난 병인년 가을에 지었다.옛날 어떤 효자는 설우면 통소를 불어 통소 속에 피가 하 나더라는데 내 시조는 설움도 얼마 보이지 못하였거니 피 한방울인들 묻었으리요마는 효도야 못 하였을망정 설움은 설움이다 어머니 일을 적고 내 시조를 그 아래 쓰니 시조는 오히려 “의지”가 있는 것 같다
미루어 두었던 위당 선생 40편의「자모사」를 이제야 읽었다.
「자모사」 서문는 ‘내 생․양가 어머니 두 분이 다 거룩한 어머니다’로 시작된다. ‘생어머니는 높고 어머니는 크다’라고 했다. 생모는 대구 서씨이고 양모는 경주 이씨이다. 양가로 입적해 두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이다.
이 시조는 1926년 33살 때의 작품으로 생모와 양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 시조이다. 여기에는 망명했던 동지들의 슬픔과 민족에 대한 사랑도 아울러 배어있다.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아라
- 「자모사 12」
옛날 고등학교 교과서 실렸던 시조이다. 바리의 따뜻한 밥은 자식에게 주고, 찬 밥은 당신께서 잡수셨다. 두둑히 자식들에게 옷을 다 해 입히시고, 당신께서는 겨울에도 엷은 옷을 입으셨다. 솜치마 그리 좋다하시며 아끼시다 결국 보공되어 관속에 담아 가셨다. 보공은 관의 빈 곳을 채우는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그만 목이 컥 하고 막힌다. 더구나 나라까지 잃었으니 지은이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은 이런 것이다.
이 강이 어는 강가, 압록이라 여쭈오니
고국 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자모사 37」
이 강이 어느 강가인가. 압록이라 여쭈오니 국경을 넘으면서 고국 산천이 새롭게도 서럽다. 치마끈 들고 막 건너려니 눈물부터 앞선다. 나라 망함을 개탄하는 여인의 기상과 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나있다. 어머니와 조국에 대한 사랑이 오버랩되어 작금에 와 가슴을 더욱 저미게 한다.
김학성의 해설이다.
1912년 임자년 위당은 생어머니를 모시고 안동현으로 건너간 적이 있는데, 압록강을 건널 때 어 머니는 위당을 불러 “나라가 이 지경이 돼야 내가 이 강을 건너는 구나”하고 눈물을 흘렸다한다. 위당의 친모 서씨부인의 월강은 ‘여러 아낙네들 틈에 섞이어 땀과 진흙으로 짓이겨진 감발과 버선 을 빨아내기에 어떠했었다.’는 증언 등으로 미루어 안동현과 통화현 등지의 독립군 기지 건설과 인재 양성의 뒷바라지에 관련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위당이 신채호,박은식,신규식,김규식 등과 함께 상해에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한 것도 바로 이해였다. 당시 벽초 홍명희가 지어준 밥이 제일 고소했다는 서씨 부인의 회고담에서는 고난과 역경에 처한 당시 정황에서도 든든한 힘 이 되어주었던 온화한 자모의 얼굴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정인보는 서울 출생으로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 · 박은식 · 신규식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귀국 후 연희전문, 이화전문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활동했다. 또한 실학을 기초로 한 국학의 개념을 정립했고 민족사관 확립에 주력했다.『조선사 연구』,『담원 시조집』 등이 있다.
하나 더 들어본다.
설워라 설워라 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 풀 우군 오늘 이 '살' 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은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아무리 서럽고 서러워도 아들은 어머니와 한 몸이 될 수는 없다. 풀숲 우거진 어머니 무덤 앞에 선 오늘. 어머니는 모두 살점이 빠져 자연으로 돌아갔는데 붙어 있지 말아야 살점이 어찌하여 내게 붙어있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빈 말로 슬퍼하는 것이니 누구도 제 말을 믿지 말라.
어머니 무덤 앞에 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생전 효도하지 못한 자식이 눈물로 자책하고 있다.
필자는 위당 선생을 단지 우러러볼 수 있을 뿐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기미년 삼월 일 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정인보 작사「광복절 노래」과 「삼일절 노래」가사 일절이다. 위당은 「제헌절 노래」, 「개천절 노래」 등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겨레를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겨레를 안고 산 대스승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오열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흙 다시 만져보자, 기미년 삼월 일일’ 문장 하나 하나 삼천만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 그의 생각과 사상은 높은 산, 깊은 바다 같아 한 글자 한 글자가 이렇게도 맞추기가 어렵다.
선생은 기행 시조를 읊은 것이 많다. 그의 나라 사랑, 국토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계실 때 꽃이로되 떨어지니 빙옥이라
지나며 숙는 고개 어제런 듯 느꺼워라
이 “넋”엔 “낚시” 없으니 용을 영타 하리오.
-「백마강 뱃 속에서 5」
계실 때는 꽃이로되 떨어지니 빙옥이다. 위당은 국난으로 순절한 뒤 절열의 여인이니 낙화라는 말은 실로 맞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계실 때는 꽃이지만 죽음은 빙옥이라 했다. 빙옥은 얼음과 옥으로 맑고 깨끗하여 티 없는 순결한 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어제인 듯 마음이 벅차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조룡대의 용이 아무리 신령해도 낚시에 물렸는데 아무리 영한 용이라도 낚시 없는 넋이 물릴 수야 있겠는가. 궁녀들은 적에게 절대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행 시조만이 아니다. 꽃 작시에도 그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있어 작금에 와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내 어디 앉았는가 여기 아니 타곳인다
불연 듯 매화 생각 저곷이야 옛 “내”렸다.
방안에 그림자 지니 “가지” 벌써 반겨라
-「매화 7장 1」
국치 후 몇 십년 세월이 흐른 듯 싶다. 선생은 조선색이 거의 없어져 타국 같다고 했다. 불현듯 매화 생각 저 꽃이야 옛 “내”렸다고 말했다. 선생은 매화는 우리 국종이라야 향이 좋지 왜매는 청향이 없다는 것이다. 달이 뜨니 방안에 그림자가 지니 가지가 먼저 반기더라는 것이다. 매화는 선비의 상징이다. 향이 천리를 간다하지 않는가. 뜨락의 매화를 보며 조선 매화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런 시조를 썼을까 싶다.
선생은 또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동구여학교 교실에서」이다.
예부터 어진 나라 안팎 없이 거룩탄다
동명왕 어머님도 혁거세의 알령비도
덕으로 늘이신 치마 상기 뵐 듯 하고녀
나라 사랑이 이예서도 확인된다. 동명왕 어머니는 유화 부인이며 알령비는 혁거세의 비이다. 덕으로 늘이신 치마 지금도 뵐 듯하다 했다. 유화부인이나 알령비 같이 덕으로 치마를 늘이라는 교육자적 풍모가 돋보이는 시조이다.
선생의 의식 기저에는 ‘민족’,‘겨레’ 없이는 어느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시는 그 사람이다. 지조와 순결로 민족의 이념을 노래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이는 사랑 이전에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선생의 시조는 연이은 단시조 형태로 전통적인 시조 형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초‧중장 뿐만이 아닌 특히 종장에서 ‘3‧5‧4‧3’의 형태를 깨는 일이 거의 없다. 고어를 오늘의 말로 풀어쓴 것 또한 특징이다. 이것이 역사적 소재와 잘 어우러져 시조 원형을 고수하면서도 전아한 시풍을 형성하고 있다.
덧붙이고 싶은 시조가 있다. 옛 교과서에 나온 시조「조춘」이다. 그 옛날 필자가 외우고 좋아했던 시조로 추워지기 전에 봄을 미리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1
그러사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볕발 아래 들려라
2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븨야 하마 알련만 날개 아어 더닌고
3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든 붓대 무능타 말고 헤쳐본들 어떠리
현대 시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6년 전개된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에서부터였다. 최남선, 이은상, 이병기, 정인보는 현대시조의 1세대들이다. 1926년 최초의 현대시조집 육당의『백팔번뇌』, 1931년 이은상의 『노산시조집』.1947년 가람의 『가람시조집』. 1948년 정인보의 『담원시조집』이 발간되었다. 이어 이호우, 김상옥 등 현대시조 제 2세대로 이어지고 조종현, 김오남, 이영도, 정훈, 리태극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을 맞았다. 선생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1950년 7월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가 그 해 11월 사망했다.
한국전쟁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일거에 앗아가버렸다. 60년도 훨씬 넘었다. 이산 가족이 지금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의 비극이 아닌, 있어서는 안되는 차라리 민족의 수치이다.
필자는 얼마 전에 『어머니』58 편을 상재했다. 시인 나태주는 필자의 『어머니』 시조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우리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자모사초」에서 가슴 절절한 어머니의 사랑을 읽은 바 있 다.이번에 보이는 신웅순 시인의 시조는 또 다른 ‘자모사초’이다. 편편히 살아서 숨을 쉬며 독립하 였으되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강물로 흐르고 있음을 본다. 물론 어머니라는 강물이다.
어찌 위당 선생님과 비교하고 있는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가슴 속의 어머니를 고이 보내 드리려고 그리 노래했을 뿐 그만 비교가 되고 말았으니 이런 천하의 죄인이 어디 있는가.
말석에서나마 이 자리를 빌어 호된 채찍을 주십사 어머니 시조 한 수 청해본다. 효도하지 못한 필자라 감응이나 해주실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늦가을
잎새 하나
천년으로
지고 있다
물빛도 스쳐가고
불빛도 스쳐가고
불이문
끊어진 길을
초승달이
가고 있다
- 필자의 「어머니」35
- 필자의 작품 시․서․화 「어머니 35」
- 서예문인화, 2016.12월호
[출처] 담원 정인보 편 -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첫댓글 불이문 끊어진 길
초승달이 뉘엿 뉘엿 가고있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어느새 가을 바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가을에는 더 많은 글을 써야겠지요.
오늘도 변함없이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