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토병
가족에 대한 그리움
기약할 수 없는 이별
삶을 위한 선택들
그리움의 편지들
다빈치를 능가하는 남자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홍혜완(1761~1838)
님에게 그리움의 시와 함께 노을빛 치마를 보낸 이는 누구일까? 홍혜완은 어떤 여인일까?
그녀는 바로 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1762~1836)의 아내 풍산 홍 씨였다. 조선 여인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지금의 나를 누가 청주정 씨라고 부른다면 웃길 것 같다.) 다산의 문집 속에서 혜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발견되었다.
다산보다 1살 연상인 그녀는 막내아들을 안고 유배 가는 남편을 배웅했다. 금실 좋은 부부는 그렇게 18년 동안 이별하게 되었다.
유배지에 있는 남편에게 왜 그녀는 신혼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보낸 것일까? 홍 씨로 빙의해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려 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보낸 신혼시절을 생각하며 잘 버티라는 격려의 깃발이었을 것이다.
가장 아끼는 추억의 치마를 보냄으로 자신의 아바타처럼 생각하고 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남편을 향한 애정+ 바람피우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함께 보낸 것이었다. 천재 남편의 아내다운 면모였다. 난 그녀가 얼마나 지혜로운 여자인지 알 것 같다.
강진으로 유배길에 오르며 약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후크 선장의 갈고리처럼 뇌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세기의 지성은 가족을 떠나며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처럼 손잡고 따라오는 아내가 궁금해 뒤돌아 보았을까? 가족에 대한 마음은 그의 발길을 덩굴식물처럼 잡았을 것이다.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은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다. 작은형 약종은 사형을 당했고 큰형 약전은 흑산도로 향했다. 그 후로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약용을 두렵게 한 것은 바로 풍토병이었다. 탄자니아로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는 제자는 풍토병 예방 주사를 여러 대 맞아야 했다. 조선시대 풍토병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역학에서 풍토병(風土病, 영어: endemic )은 자연환경이나 생활 습관 등으로 타 지역에 가면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 당시 유배길에 가다가 죽는 사람도 많았다. 유배라는 게 죽음의 번호표를 뽑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일까? 인간은 얼마나 위대할 수 있을까?
다산 정약용을 보면 한계를 알 수 없다. 인간의 지경을 넓힌 남자, 삶의 지평선과 수평선을 지워버린 남자, 성호 이익의 책을 접신하고 꿈을 현실로 바꾼 사나이! 인간이 얼마나 인내하고 감내할 수 있을까? 신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삶이었다.
약전과 약용형제는 나란히 같이 유배지를 향했다 나주 북쪽 오리쯤 율정에서 헤어지면서 영원한 이별을 예감한 걸까? 그의 이별의 시가 애달프다.
栗亭別 [율정별]
茶山 丁若鏞 [다산정약용]
주막초가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 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정약용의 강진 유배 생활은 컴퓨터와 핸드폰 차가 함께하는 현재 우리의 삶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800년 당시 유배지는 우리가 꿈꾸는 여름휴가가 아니었다. 강진 한 달 체험기나 흑산도 1년 살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도 먼 땅에서 온 죄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으려 했다.
주막집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로 방인 듯 헛간인 듯 비슷한 것을 겨우 얻게 되었다. 그 당시도 지금과 같아서 유복한 집안사람들은 유배지에서도 하인을 거느라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약용은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약용의 인품과 학식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이들이 몰려오는 법이다. 주민들이 자녀를 데려와 약용에게 자식을 맡기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훈장 선생님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세기의 천재를 스승으로 모시는 기분은 어떨까? 조선 최고의 천재에게 배울 수 있었던 강진의 아이들이 부럽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 과거체험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난 반드시 정약용의 제자이고 싶다.
500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써 내려간 노력하는 천재, 제자들은 몇 시간씩 먹을 갈고 또 갈아 스승이 책을 쓰는 것도 도와주었다.(난 공부는 안 해도 먹 가는 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상량문을 쓰실 때 내가 먹을 갈았다.
검은 흑룡이 승천하는 모습이 새겨진 벼루는 뚜껑을 여는 순간 묘한 냄새를 풍겼다. 특별한 날, 원유보다 진한 먹물 위에 무지갯빛이 도는 걸 보았다. 먹을 들어 한방방울 먹물을 떨어뜨려 점도를 확인했다.
코로나로 인해 정당한 절차 없이 추측성만으로 고소당해 고생할 때 제자들이 모여서 상량식에 초대받은 선비들처럼 탄원서를 써주었다. 인생은 이렇듯 평생 꿈꾸지 않았던 끔찍한 일들을 체험하게 하는 묘미가 있다.(사실 기분 개 더럽다)
약용이 나랑 같은 업종의 일을 한 사람이라 이해가 간다. 나도 거의 30년간 훈장질해서 살아왔다.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아이들을 싫어하면 힘들지만 유난히 이이들이 좋은 나에겐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약용은 제자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다. 그도 나도 다행히 사람을 좋아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학문을 넘어서 예술로 건축으로 공학으로 법학자로 정치인으로 남편으로 그의 모든 삶은 거짓말처럼 완벽했다. 단 하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로 인해 오히려 불멸로 남았다. 최악의 인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계속 욕만 먹는 사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코로나로 2주만 욕먹었다.(모든 언론과 방송이 우리 가족을 지옥으로 몰고 갔다. 그들은 다 잊었지만 난 잊어야지 하고 다짐한다. 그날 이후 삶은 유배지에서 보내는 것과 같다. 잃어버린 2년 누가 책임질 건지!!)
삶은 2년 동안 계속 팍팍하지만 누구나 다 힘든 시기라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사실 밤마다 화병이 치밀어 올라서 정신과약으로 버틴다.)
사람들은 정약용을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한다. 난 다빈치를 서양의 정약용이라 부르고 싶다. 까칠하고 사치스러웠던 다빈치에 비해 다산의 삶은 겸허했고 소탈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기 위해 인생을 살아간 게 아니라 삶의 공부를 끝없이 해온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위대한 인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매일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난 학자이고 싶다. 하지만 재능 부족이라 학생 아니 학습자라도 되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옹은 동시대의 경쟁자들에게 질투를 느끼고 경멸의 말을 퍼붓기도 했고 비방하기도 했다. 그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잘생겼고 요리책을 발간한 적도 있었다. 물론 식당을 열었다가 쫄딱 망했다. (라면이 최고의 개인기인 내 남편은 식당 차려서 망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손등의 힘줄이 불끈, 움직이면서 요리를 하는 다빈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학문이 삶에 대한 진정한 이유가 되는 새벽, 실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다산 정약용은 문을 열어야 할 순간 문을 잠근 조선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그릇이었다. 사후 세계를 알고자 했던 유학자를 넘어선 철학자, 세상에 대한 지혜를 깨닫고 나서 삶너머의 삶을 바라보고자 했던 자,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내세의 남자 0순위로 난 다산 정약용을 예약했다. 홍혜완이 그를 다시 선택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첫댓글 . 최악의 인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계속 욕만 먹는 사람일 것이다.
그 인간이 문재인인 것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욕을 먹을 것이고, 지금 호화저택에서 쫓겨나 그가 데리고 살던 풍산개 집에서 움크리고 살게 될 것이다.
내딸 온이는 무서운 통찰력이 있는 작가로 성장할 것이다. 자랑스럽다. 내 딸 온이.
ㅋㅋㅋㅋㅋㅋㅋㅋ놀라운 통찰력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