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사상과 철학의 근본을 유교, 게중에서도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강희제는
거대한 나라인 청을 다스리면서 기본적으로 관대함과 조화에 두었습니다.
강희제가 아직 어린 시절, 죄를 지은 관리에게 강희제는 열이 받아 사형을 명했는데, 그 관리는 허리가 잘려서 죽는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잘랐는데, 바로 죽지 않고 꾸물꾸물 대다가 죽었습니다. 참혹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강희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죠.
본래 강희제가 초반에 정권을 잡은 오배는 사람을 마구 죽였는데, 강희제 역시 오배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배에게서 정권을 찾아오고 그에게 내린 처벌은 사형이 아니라 연금이었고, 구족 몰살이 아니라 타지로 이주시킨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년 황제의 아량을 칭찬했었죠.
까딱 잘못했으면 청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북쪽에 쪼그라들게 했을법한 반란인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때도, 그 처벌은 오직 최고 우두머리들에게만 처벌을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하로서 반란에 적극 참여한 인물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그들에게는 황무지를 개간하는대신 그곳을 바탕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고, 약간의 시간을 준뒤 그 자식들도 아무 문제 없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었지요.
또한 청나라 하면 떠오르는 사상 탄압인 문자의 옥은 강희제 떄도 있었지만, 그 규모는 강희제 때가 제일 작았고 옹정제 - 건륭제를 거치며 매우 커졌습니다. 강희제 본인은 문인들을 많이 보호해주었습니다.
특히 강희제는 골수 성리학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문제에 관해서도 최대한 너그러히 대했는데,
서양인들이 가톨릭 포교 하는건 금지 안하고 반대로 포교 못하게 막는 사람들은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서양인들은 해안가에선 밀수 하고
포교 하는 신부로 변장해서 청나라 사정을 염탐하거나 뭐 빼돌리려고 눈치만 살살 살피고
그러는 가운데 로마 교황은 사람 보내서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 앞으로 내가 관리할거임 ㅇㅇ" 이러고 어그로를 끄는데
열받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꾹꾹 눌러참으면서 놀라운 인내심을 보였습니다.
청나라 중국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 명나라는 상황이 엉망이었고 여진족 역시 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는데, 그때문에 사방에 산적과 반란군이 들끓었습니다. 강희제는 물론 이들을 진압했지만, 사정을 살펴보고 단순히 생계가 어려워 가담한 사람들은 오히려 살 곳을 마련해주고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1968년 - 35명
1706년 - 25명
1712년 - 32명
1715년 - 15명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하면, 청나라가 지배하는 전중국 - 만주, 하북, 중원, 강남, 내몽골, 대만 - 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입니다. 이 시기 청나라의 인구는 1억명 이상을 향해 증가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인구, 즉 호구 조사에 들어가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훨씬 많았습니다. 그 정도로 큰 영토에 많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숫자가 저 정도 였습니다.
강희제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 한번 두번 여러번 읽어본 뒤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68년 같은 경우에는 본래 48명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강희제가 이를 더 줄인 일이었죠.
자신이 글자 하나를 그으면, 사람의 목숨이 이에 따라 살아나고 죽습니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강희제는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정말 더 없이 신중하게 입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물에 커다란 궁궐에 살고 있는 강희제였지만, 몇번을 살피고 살피고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 날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죠.
"짐은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떻게든 살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오. 형부에서 판결 기록을 올릴 때마다 짐은 그것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어 죄인을 살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지 찾아보고 있다오.
죄인이 죄를 저지른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즉각 처형하기보다는 감옥에 가두어 잠시 처형을 미루고 이듬해에 다시 관찰하도록 하시구려.
죄인들이 곧장 처형되지 않는다는것을 알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지만……
아, 그러나 감옥 안에서 몇 달간 살다보면 그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과천선하고 싶어도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오. 짐은 그들이 너무 불쌍하오."
죄인들에 대한 강희제의 측은지심은 대단했는데, 어느날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러 떠났던 강희제는 이 지역에 유배된 죄인들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것을 보고 놀라고 불쌍하게 여겨 말했습니다.
"짐은 이제껏 영고탑과 오라(烏喇)로 유배된 죄인들이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네! 그들은 몸을 쉴 수 있는 집도 없고, 농사를 지을 돈도, 그리고 능력도 없다네.
게다가 그들은 남방 사람이 아닌가? 약한 몸으로 이렇게 추운 곳으로 와서 고향과는 전혀 연락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불쌍하다네.
비록 그들은 스스로 지은 죄값을 치르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요양遼陽 같은 지역에 유배된것만 해도 죄값을 치루었다고 할만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농사 지을 땅을 주어 생계를 꾸려가도록 하고, 집을 지을 수 있게 해주오!"
"죄인들을 유배시킨 것은 본래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그들을 이런 춥고 황량한 곳에 내버려 둔다면 결국 고통 받다가 죽게 될것이니 어찌 본래의 뜻과 동일 하겠소?
앞으로 사형을 면한 죄인들은 모두 상양보로 유배시키고, 샹양보로 보내야 할 죄인들을 요양으로 보내도록 하고, 반란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오라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에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시오. 형부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짐의 뜻을 헤하려 이 규정에 따르도록 하시구려."
강희제는 죄인들의 고통에 깊게 관심을 가져, 감옥에 있는 죄인들이 덥지 않도록 감옥을 시원하게 해주고 청소해주는 한편, 죄인들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면 의사를 보내주었고, 만약 괸리가 이를 모른척하고 보내지 않으면 크게 처벌했습니다.
"10월 부터 1월까지는 겨울인 데다가 유배당하는 죄인들은 모두 가난하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니, 몹시 추울 것이오. 그들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길에서 얼어 죽어 마땅한 것은 아니니 불쌍하기 그지없소. 앞으로는 10월에서 1월과 한여름인 6월에는 죄인을 유배지로 보내지 말구려."
아, 죄수들에게도 이렇게 대하는 황제가, 백성들에게는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강희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힘으로 지키려는 자, 홀로 영웅이 된다. 위엄으로 지키려는 자, 능히 한 나라를 지킬 수 있다.
허나 덕으로 지키려는 자, 천하를 세울 수 있도다."
"짐은 그저 하늘을 섬기는 신하일 뿐이다."
ps.흑흑~ 강희대제 ㅠㅠ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295827&page=1&bbs=
첫댓글 1968년.. 마오쩌둥도 관대했군요!
이거시 중공의 패기. 공자사당은 불태우지만 우린 인간적임ㅋ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지만...저리 정치하면 문제 생기는거 아닌지?
전 개인적으로는 법가쪽에 치우친 사람이라.답답하다는;
당한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당하고 해먹은 해들은 용서 받고 편히사는지....
저도 사실 법가 쪽에 더욱 치우친 사람입니다.
아예 법가에서의 덕이란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것이라고 저의하더라능~
마지막 말은 꽤나 와닿네요. '짐은 그저 하늘을 섬기는 신하일 뿐이다.'
ㄷㄷ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