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嚴征討分 第十
장엄정토분 제십
須菩提여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爲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告須菩提하사대 於意云何오 如來昔在燃燈佛所하야
於法에 有所得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如來在燃燈佛所하사 於法에 實務所得이니이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菩薩이 莊嚴佛土不아 不也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일새 是名莊嚴이니이다
是故로 須菩提여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生淸淨心이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無所住하야
而生其心이니이라
須菩提여 譬如有人이 身如須彌山王하면 於意云何오
是身이 偉大不아 須菩提言하사대 甚大니이다
世尊하 何以故오 佛說非身이 是名大身이니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옛날에 여래가 연등불(燃燈佛)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의 처소에서 실로 법을 얻은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하녀?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정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소리와 냄새와 맛과 느낌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스보리여, 비유하건데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매우 크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게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하시어 큰 몸이라고 이름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제9 「일상무상분」에서는 수행 중의 어떠한 경지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 것을 밝히셨고,
여기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서는 정토를 정엄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설하고 계십니다.
‘정토(淨土)’란 불교의 이상세계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며, ‘장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장엄정토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존자에게
‘내가 연등불의 처소에서 법을 얻은 것이 있는가?’ 를 먼저 질문합니다.
그러자 수보리존자는
‘진실로 법을 얻은 바가 없다’ 고 대답합니다.
이 문답 속의 법은 바로 ‘수기법문(授記法問)’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합니다.
☆
한 없이 오랜 세월 전에 ‘선혜(善慧)’ 라는 보살이 불도를 닦고 있었을 때
연등불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선혜보살은 연등불게 공양을 올리고자 꽃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리 위해 온 나라의 꽃을 사들였으므로,
선혜보살은 어디에서도 꽃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궁녀가 연등불께 바치고자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품고 가는 것을 발견한 선혜보살은
그 꽃 한 송이에 은전 백 냥씩을 주고 다섯 송이를 연등불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연등불의 행차가 진흙탕에 다다르자,
선혜보살은 부처님의 발을 진흙에 더럽힐까 염려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길게 폈습니다.
옷이 진흙탕 길을 다 덮지 못하자 선헤보살은 긴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고,
그래도 모자라자 진흙탕에 몸을 던져 부처님께서 밟고 건너가시게 하였습니다.
이 때 연등불께서는 선혜보살을 찬탄하며 수기를 주셨습니다.
“아, 장하도다. 선혜여! 그대의 도를 구하는 정성은 참으로 갸륵하도다.
이렇듯 지극히 도를 구하는 정성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의 도를 성취하리니,
호를 ‘석가모니’ 라 하리라.”
이러한 연등불의 수기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의 출현은 오래 전에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수기!
수행자가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는 것은
매우 획기적이고도 자부심을 갖게 하는 대사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물론이요 제자인 수보리존자 조차도 이를 단호히 제거하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수기를 받았다’ 는 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굴레가 되어 참된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때도 묻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좋은 것도 집착을 하면 때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장차 부처가 될 보살들의 불국토 장엄’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수보리야,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니옵니다.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 그것은 바로 보살의 수행입니다. 마당히 보살이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이나 수보리존자는 보살의 불국토장엄이 ‘참된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 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모든 보살은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과 갖가지 복덕을 쌓아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국토가 장엄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불국토는 각종 보석이나 꽃 . 나무 . 그림 등으로 장식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국토는 진리의 세계요 깨달음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원래부터 완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명번뇌(無明煩惱) 속의 중생은 어둠에 가려 아예 보지 못하고,
수행을 많이 한 보살은 언뜻언뜻 그 모습을 봅니다.
그 또한 극히 일부분만 볼 뿐입니다. 왜 입니까?
마음이 완전히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청정심을 내어야 한다.”
청정심(淸淨心)! 그렇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저절로 이 세상이 맑아져 불국토로 바뀌고,
마음이 탁하면 이 세상이 그대로 고통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마음을 맑혀 진리의 세계와 한 덩어리가 되면 불국토는 저절로 장엄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청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설하십니다.
“마땅히 색(色)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소리 . 향기 . 맛 . 감촉 . 법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는 청정심을 이루는 최상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봄바람처럼 살고 봄바람이 지나가듯 하라는 것입니다.
봄바람은 집착이 없습니다. 그러나 봄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분명히 붉은 꽃도 피고 노란 꽃도 피고
푸른 잎도 돋아납니다. 이렇게 살면 그 뿐이건만, ‘내가 꽃을 피워주웠다’ , ‘잎을 돋게 하였다’ 고
집착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세히 돌이켜 보면 우리가 ‘마음’ 이라고 하는 것 또한 이름이 마음이지,
‘이것이 마음이다’ 고 할 그 무엇이 보이고 잡힙니까?
정녕 그 마음을 둥글다고 해야 합니가, 모나다고 해야 합니까, 세모꼴이라 해야 합니까?
노랗다고 할 것입니까, 붉다고 할 것입니까, 푸르다고 할 것입니까?
마음이라는 그 자체부터가 규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지?
크다고 해야 할지 작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규정을 못내리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에 대해 어떻게 집착을 하고, 어느 마음에 머물것입니까?
그러므로 ‘머무는 바 없이’ , 곧 응무소주(應無所住)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없는 것도 무감각한 상태도 아니므로, 우리는 또렷또렷한 생각을 일으켜서
하나하나를 분명히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을 낸다’ , 곧 이생기심(而生基心)입니다.
잘 살고 향상의 길로 나아가려면 마땅히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여야 하건만,
우리는 틀에 박힌 듯이
‘낸 자식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베풀고 , ‘내 부모니까’ 하는 생각으로 봉양을 합니다.
그리고는 ‘나’ 와 관련없는 것을 냉대시 합니다.
결코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향상의 길이 없습니다.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출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 붉은 자리 푸른 자리,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여 빛을 비추지 않습니다.
마냥 빛을 뿜어 산에도 비춰주고 바다에도 비춰주고,
사람 . 동물 . 풀 , 나무 . 바위 . 흙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그냥 비추어 줍니다.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태양이 ‘나’ 라는 생각없이, ‘내가’ , ‘누구에게’ , ‘바춰준다’ 는 생각없이 온누리에
빛을 주듯이, 우리도 ‘나’ 에 머무르는 바 없이, 대상에 머무르는 바 없이 살아가면
저절로 청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면 ‘나’ 와 상대가
모두 청정해지고, 서로가 맑아지면 걸릴 것도 문제가 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 의 것에 대해 너무도 집착을 합니다.
‘나’ 와 ‘나’의 것, ‘나’ 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 등을 집착하여
한 없는 갈등과 문제와 고통을 끌어냅니다.
나의 생각, 나의 사랑, 나의 가족, 나의 재산 등에 집착을 하고
집착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가 어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나’ 와 ‘나의 것’ 에 집착을 하여 나와 남,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갈라버리고 조각을 내면 결국은 ‘나’ 의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나’ 의 마음이 흔들리면 세상이 뒤죽박죽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고통의 원인, 윤회의 원인. 그 원인은 너무나 간단명료 합니다.
바로 집착입니다.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면 고통으로부터, 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실체가 없는 이름만의 것에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무엇하러 이름만의 것에 집착을 하십니까?
금강경 제 10 「장엄정토분」 끝에서 든 ‘수미산 만큼 큰 사람’ 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녕 수미산만한 크기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와같은 이름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름에 집착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이름을 진실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답게 이름에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것은 집착을 버리고 사는 삶입니다.
할 일을 하면서 집착을 버리고 살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참으로 훌륭한 불국토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집착이 없는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 맑고 까끗한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갈 뿐, 흔들리지 마십시오.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안정됩니다.
내가 흔들리니 가족이 흔들리고 집안이 흔들리고 사회가 흔들리는 것일 뿐,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가족도 집안도 사회도 문제가 없어집니다.
머무르는 바 없는 마음, 허공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향상의 길로 나아가
불국토를 장엄하고, 영원생명과 무한 행복을 증득하시길 깊이 깊이 축원드립니다.
첫댓글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청정심을 내어야 한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머무런 바 없이 집착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마땅히' 인 듯 합니다.()
바라문 수메다. 선혜보살. 호명보살 (도솔천) 싯다르타 전륜왕 석가모니 세존 여래 부처님.
그 이름이 장엄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