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5
3월23일[사순 제5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7bEc3-03b4
[서울대교구 주지환 요한바오로(돈암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입니까?>
사순시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주간이 목전입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런저런 보속이나 결심을 계획했었는데, 결과가 만족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과 생각만 앞섰지,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서 너무 부끄러운 분들, 지나치게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성주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일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죽음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럴듯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물이 아쉬운 분들, 성주간 동안 딱 한 가지만이라도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교회가 강조하는 세 가지 측면,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단식은 그 자체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와 단식의 결과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더이상 세상에 안계시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분,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1939~2003)이십니다.
총칼이 난무하던 군부독재자 시절, 모두가 숨죽이고 엎드려 지내던 혹독했던 유신 시절, 공개석상에서 긴급 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을 크게 외치셨습니다.
5공 시절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은폐 조작된 것임을 만천하에 외쳐 6월 항쟁의 단초를 마련한 분도 김승훈 신부님이셨습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던 시대, 김승훈 신부님께서는 용기를 내셨습니다. 그로 인한 체포와 투옥, 고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민주화의 희생양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시고 나서야 밝혀진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살아생전 신부님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저런 물질적인 도움, 정신적인 도움,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평소 신부님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늘 없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 수배 대상자 학생들, 가난한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손을 벌리니 돈이 남아 나지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남의 빚보증 서준 서류만 잔뜩이고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는데 가장 큰 도전은 재정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로 회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분이 김승훈 신부님이었답니다.
도움은 물질적인 도움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당시 수많은 단체에서 신부님의 이름을 요청할 때 기꺼이 서명해주셨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임이나 집회 장소를 못 구할 때는 기꺼이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던 성당을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주곤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미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신부님 곁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찰하는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는데, 신부님께서는 그들까지 살뜰히 챙기셨습니다. 정말이지 품이 넉넉한 큰 어른이셨습니다.
손톱만한 작은 나눔이나 희생도 뻥튀기처럼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드시는 김승훈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처럼 소리소문없는 자선과 희생,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이요 단식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 관여하시는데,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 문제, 그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다.”(김승훈,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2)수동의 시기, 성주간>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준비의 시기)
② 출가(出家)후의 공생활(능동적 활동의 시기)
③ 수난과 죽음(수동의 시기)
요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이 활발한 능동의 때를 마무리 짓고 서서히 수동의 때로 넘어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때 그토록 활발했던 치유활동도 조금씩 줄여갑니다.
능력의 메시아로서 전지전능,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모습도 사라져만 갑니다.
한때 그토록 흠모의 눈길을 던지던 사람들, 기를 쓰고 예수님 뒤를 쫓아다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갑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따라나섰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떠나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일 것입니다. 더 이상 기적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결국 수동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능동의 시기,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120% 이상 완수하셨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수동의 시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잠잠히 있으라니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적대자들의 잔악한 손길 앞에 묵묵히 서 계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 십자가 죽음을 완수하기 위해 그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던 모습을 완전히 접습니다.
이 세 단계(준비의 시기, 능동의 시기, 수동의 시기)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어린 시절과 청춘의 시절은 나자렛 예수님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시기,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삶을 배우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능동의 시기는 그간 준비해온 바를 마음껏 발휘하는 시기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이어야겠습니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잠시의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되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월과 더불어 나이를 먹고, 병들고 노쇠해진 어느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시기는 다름 아닌 수동의 때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수동의 때인 것입니다. 이 시기는 소매 걷어붙이고 혈기왕성하게 일할 시기가 아니라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늙음과 한계를 겸손하게 수용할 시기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영적으로 활활 불태울 시기입니다.
살다보면 ‘영 아닌 것 같은’ 삶의 모습을 접합니다. 때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준비의 시기는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당연히 공부에 충실해야겠습니다. 매사에 배우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공부는 뒷전입니다. 배우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있어서 새로운 것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능동의 시기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얼굴입니다. 몸은 젊은이인데 하는 행동은 노인입니다.
반대로 수동의 시기는 침묵과 은둔의 시기입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매사를 영적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나날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습니다. 죽어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성주간은 철저하게도 수동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따라 우리 역시 수동의 삶을 추구하는 특별한 시기입니다. 수동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시기입니다. 수동의 소중함을 되새겨보는 시기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R6aSmJ-Qu8
++++++++++++++++++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다>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알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로이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당신께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에게 그것의 참 주인은 당신이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것이나,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 주인을 몰라본 덕에 부활의 상급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들어온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가야파 대사제의 입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자신들의 것인 양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다시 받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과 유다인들처럼 대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심판도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다시 ‘만민구원설’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는 부활에 더 집중하려는 모습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머물지 않고 다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싱크대에 있는 음식물 분쇄기가 고장 난 것입니다. 원인은 분쇄기에 음식물을 아예 넣지 않고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식이 되면서 하수관도 부식되어서 잘못하면 물난리가 날 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시던 집도 동생 수녀님이 가끔, 관리를 해서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디지털의 세상에 살면서 여기저기 비밀번호를 지정하게 됩니다. 자동으로 기억하게 해 놓지만, 나중에 비밀번호를 기억해 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주 사용해야만 기억하기 쉽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가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교회가 매년 이렇게 ‘사순시기’를 전례 안에서 보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죄인인 나를 위한 헌신과 희생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이 꺼지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인터넷에 원인을 찾아보니 원인이 엄청 많았습니다. 배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용량의 초과일 수도 있고, 시스템의 오류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손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저의 능력을 벗어난 것 같아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의외로 쉬운 방법을 알았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스마트폰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보험처리를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새 스마트폰이 오면 자료를 옮기면 된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기종을 휴대하기 편해서 접이식으로 선택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열게 되니 접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지난날의 모든 죄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사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찰, 회개, 결심, 고백, 보속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권리를 주기도 하지만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4가지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입니다. 저는 30개월의 군 복무를 다 하였습니다.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고 해서 교구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자녀가 없기에 자녀를 교육할 의무에서는 제외되지만, 교구 성소국장으로 지내면서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33년 동안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을 더하면 저도 직무에서는 배제되는 원로사목자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아는 율법학자라고 해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사제라고 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다고 다짐한 바리사이파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력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구원은 능력과 직책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겸손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선행을 통해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11,45-56 :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소문이 퍼져나가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요.”(47-48절).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정말 성전과 백성을 걱정해서 이런 회의를 소집했을까?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염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들이 만일에 민중봉기라도 하게 되면 로마의 진압을 받게 되고, 성전은 파괴되며, 유다민족은 완전히 지배를 당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생각을 하였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예수님을 견제하기 위해,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자기들의 위치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백성들의 지도자로 살아왔는데, 자기들이 군림하며 행사한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대사제 가야파가 “여러분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49-50절)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것이며, 예수님의 죽음이 유다인뿐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 죽는다는 예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이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하여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해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성찰해 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이 나도록 당시의 상황을 몰고 갔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진위를 가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명예나 안위에 우선을 두고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기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고 있는 다른 무죄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하며,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47-53)
1) 최고의회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표징’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일들을 일으키신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에게 큰 손해가 생길까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전과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척 하지만, 그자들은 마음속으로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한 위선자들이었고, 그들이 진짜로 지키고 싶어 한 것은 자기들의 재산과 권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요한 8,42-44ㄴ)
그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서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척 했던 자들입니다.
2)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희생’은 원래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 쪽에서는 ‘희생’이 맞지만, 카야파와 최고의회 쪽에서는 ‘살인’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가 자기는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지도자가 독재자입니다. <정치 지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 중에도 있고,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 함께’ 희생하자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희생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어떤 공동체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 시키기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3) 카야파의 말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복음서 저자의 해석이고,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라는 말은 복음서 저자의 예언입니다. 카야파와 최고의회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고, 그 희생 덕분에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섭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4)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말을, 카야파의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이 말은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서 한 말인데,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면 흔적도 없이 그냥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애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수난 때에는 가말리엘이 최고의회에 없었을까? 있었다면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할 때 그는 분명히 반대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최고의회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5)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선고를 내린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불법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은 폭력에 의한 살인이고, 그 ‘살인죄’에 대한 책임은 그들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성주간을 앞두고 주님 수난에 함께할 준비의 필요성을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 사후 분열된 왕국의 재통일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다윗을 유일한 목자와 제후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예언과 함께 이 재통일된 왕국의 평화로움이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과 거처를 그 백성 가운데 두시어 그제야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최고 의회는 세속 권력과 많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하나 됨을 거부합니다. 특히 카야파 대사제는 기회주의적 발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말썽을 일으키는 자를 제거하려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제키엘의 예언이 대사제와 최고 의회가 원하지 않는 하나 됨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와 제후로서 민족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은 널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하나로 모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카야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 됨을 진정으로 바라는가?’
=====================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에서 유다인들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의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다교 내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많은 표징을 믿고 따르는 유다인들과 이를 통하여 군중이 동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한순간에 무너뜨리실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을 위협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해의 대사제였던 카야파가 말을 잇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주님의 수난 과정을 그분의 부활 사건에 비추어 해석하면서, 카야파의 발언이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적 차원을 지닌다고 여겨 다음을 덧붙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에 관한 종교적 차원의 담론을 정치적 차원으로 교묘하게 옮겨 가는 카야파의 모습에는 기득권과 체제 유지를 지향하는 정치적이며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얄팍한 속셈과 계산, 속임수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바로 그 결정이, 사실은 인류 전체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보편적 구원을 가져오는 십자가 사건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기심과 거짓은 하느님의 이타적 사랑과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도구일 따름입니다.
=====================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찬미예수님.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참으로 무서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강한 매를 드셨던 선생님이셨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자주 도망다니던 친구들도 그 선생님께서 감독하신다고 한다면 두말 없이 학교에 남아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저는 야간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이 착하고, 좋은 평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맑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학교 정문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친구들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빼먹고 도망간 저와 친구들 주위에 모여들면서 말했습니다.
“너 이제 큰 일 났다. 어제 감독 선생님이 바뀌었지. 그리고 출석체크했어”라고. 친구들과 저는 허탈한 웃음과 더불어 뒤늦게 찾아드는 불안감에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교무실로 불려갈까하는 생각들, 어떤 고초를 당할까 하는 생각들... 매번 수업시간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교실 문이 열리면, 알 수 없이 긴장하던 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안도의 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셨듯, 주님의 때는 뜻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그 순간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긴장이 풀어지려는 순간, 담임 선생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해맑은 미소로, 어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쳤던 저와 친구들을 불러내었고, 저희 모두는 두려운 마음으로 교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의 표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끝자락에 나오는 말씀 “그제야 민족들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우리들은 그 분이 무서운 선생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 징벌의 날...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을 우리는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는 과연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실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분은 이 곳에 나타나실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모두가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바로 예수님 수난이 두렵고 망설임으로민 다가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갈 때 친구들과 히히덕 거렸던 편안함과 같이 모든 죄의 속박을, 그리고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순을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주님의 수난이 두렵고 망설여 지신다면 마음으로 주님께 청하시길 희망합니다.
“사랑이신 주님, 나약한 저의 마음을 바로 잡아주시길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 수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라고.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하고.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11,50)
복음의 분위기는 긴장과 갈등이 점차 절정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일부 기득권층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위기감과 위기의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위기감은 ‘얼마나 참고 인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며, 위기의식은 ‘과연 나,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결국엔 그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이를 방치하다 보면 통제 불능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을 염려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소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11,47) 라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묘안이나 묘책을 논합니다. 이때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11,50) 하고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악과 악인을 도구 삼아 선으로 이끄시기도 합니다. 카야파는 그들에게 가시와 같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제시하면서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코 풀듯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궁색한 자기 논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자기 합리화로 지금도 흔히 궁하면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 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와 유린 그리고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는 의식은 예수님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과 교회 그리고 공동체에 암묵적으로 누룩처럼 깊이 내재되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선 「복음의 기쁨」에서 이런 사조를 ‘영적 세속성’이라 명명하며, 이를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영적 세속성에 빠진 이들은 높고 먼 데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형제자매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내며 겉치레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자기 내면과 관심사에만 제한된 지평에 갇혀 있습니다. (중략)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97)
복음은 그의 의견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11,51) 하고 말입니다. 구세사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것”(11,52) 이라는 주석을 달아 놓습니다. 이런 민족적 기대와 희망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희망에 찬 예언인,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37,21.22)라는 말씀으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도 자신이 공동체와 조직을 위해 그 희생양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타인에게 공동선을 위해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카야파의 의견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11,53) 이를 감지한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잠시 떠나 광야에 가까운 에프라임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어쩌면 一戰을 겨루기 위한 숨 고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자신들의 궁금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11,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꽁무니를 빼지 않을 것임을 그들도 예견했나 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영성체송)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1년 911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나>
요한 11,45-56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다)
그때에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너와 나>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너와 더불어
있을 수 있는
나는 참으로
있는 나이니
없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참으로 있고
너와 더불어
있을 수 없는
나는 참으로
없는 나이니
있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참으로 없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희생해야>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가슴에 모시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회개하라, 살리라.”(에제 18,31ㄱ.32)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많이들 아프고 병든 모습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적습니다. 정말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방황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가 따릅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역시 답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 새롭게 눈에 띈 말마디들이 고마웠습니다.
1.서울 이경상 주교의 문장이 확정되었고 사목표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Vivere In Corde Jesu)”,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목표어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 성심으로 살고 싶음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2."세상과 벽을 쌓는다면 갇혀있는 나와 마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지겹다면 오히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루 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면 무지렁이로 끝날 뿐이다."-다산
2.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사 추기경의 다섯 번째 사순강론 성서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고 청중 맨앞 한복판에 경청하는 교황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누구든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누구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웅변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 섭리의 결과요, 신의 한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곤 도대체 해명될 수 없는 공동체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요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수도공동체 삶을 “렉시오디비나”했을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넷으로 요약되는 하느님 섭리의 깨달음이요, 지금도 이런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서 진행된 수도원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하느님의 섭리”였고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은 잠시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17,28)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좋고 나쁜 모든 일 안에,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 속에도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삐뚤빼뚤한 선 위에서도 반듯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사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모범적 섭리의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말씀하시지 않지만 대사제인 카야파가 우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입니다. 이래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안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시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굳게 믿으며 묵묵히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어 당신 몸의 성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삶의 일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구원 섭리의 원대한 꿈의 실현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대로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참 좋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모으시는 주님>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
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요한 11,47)
<새 계약의 표징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 11,45-56)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수많은 표징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유다 지도자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는 예수님이 처형되시던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최고 의회에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야파의 예언대로 돌아가십니다. 이스라엘 민족 만이 아니라 온 민족을 위해 돌아가십니다.
오늘 독서(에제 37,21ㄴ-28)는 '희망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스라엘의 완전 멸망(BC587년) 이후 바빌론 유배 시기에 활동했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21ㄴ)
'새 계약의 표징이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의 표징은 '성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모든 민족과 맺으신 새 계약의 표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 안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두의 생명을 위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임쓰신 가시관'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62phnjNmuNk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53)
예수님의
아픈
마음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 조차
매몰차게
외면하는
차디찬
우리들
마음입니다.
가장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기로
오히려
결의합니다.
우리의
모진 마음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와
부딪힌다고
의견이
다르다고
모질게
제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결심 중의
결심은
살리고
살게하는
결심입니다.
못된 마음을
떼어내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쓰고 버리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은총과
용서 없이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십자가의
이 길입니다.
뻔뻔한
우리의
결의 앞에
용서를
건네시며
아프게
떠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의 끝자락이
누군가를
살리기로
결의하고 다짐하는
은총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의 다짐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