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과 생각(4)
생각의 도구/아르케-원리
우리가 개인적 또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에 부딪쳐 있을 때 그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고속열차나 공기부상 열차를 운행하기 위한 설비, 수 천 톤의 선박을 건조하는 공법 등은 무엇을 근저로 구상하고 집행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데는 그에 상당하는 원리가 필요하다. 원리에 맞게 해결해야 가능한 것이다.
원리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이다. 또한 우리가 당면한 크고 작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
예컨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들과 같은 수학적 원리, 뉴톤의 운동의 법칙과 같은 자연과학 원리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나 그레섬의 법칙과 같은 경제 원리 등이 바로 생각의 도구이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쯤 소아시아 반도에 있는 밀레토스 사람 탈레스(Thales, BC624-BC545)가 원리라는 생각의 도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플라톤은 탈레스를 그리스 문명의 여명기를 연 ‘그리스 7현인賢人’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탈레스의 다음 잠언들을 들어보면 가장 훌륭한 현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인정할 만 하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이다. 신은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주다. 신이 만든 것이므로.
가장 큰 것은 공간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니까.
가장 빠른 것은 마음이다. 모든 것을 꿰뚫으니까.
가장 강한 것은 운명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니까.
가장 현명한 것은 시간이다.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탈레스는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를 아는 것”이라 했고,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가장 유쾌한 일은 “매사가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이라 했다. 가장 올바르고 정의롭게 사는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우리가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우리 스스로 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답했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는 “몸이 건강하고 정신이 지혜롭고 성품이 순수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자연에 관한 탐구를 헬라스 사람들에게 알게 해준 최초의 사람”이며 “그런 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했다. 다시 말해 탈레스는 자연철학의 시조라는 말이다. 전해 내려오는 단편들을 보면 그 또한 그럴 만하다.
탈레스는 한낮에 자신의 키와 그림자의 길이가 일치하는 때에 맞춰 피라미드의 그림자를 잼으로써 그 높이를 측정했다.
탈레스는 또 바다에 떠 있는 배가 해안과 떨어진 거리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는 “한 변의 길이와 그 변 좌우의 각이 같은 두 삼각형은 서로 합동이다”라는 자신이 직접 발견한 5가지 기하학 정리 가운 데 하나의 원리를 이용해서 이 문제를 풀었다.
이러한 얘기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탈레스가 원리란 무엇이며,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뿐 아니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일어날 일식을 예언했고, 황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동지와 하지를 알리는 태양의 지점들과 그 편차를 계산했으며, 해와 달의 크기를 추정했으며, 뱃사람들이 항해할 때 북쪽을 알아보는 데 이용하는 별자리를 큰곰자리에서 작은곰자리(북두칠성)로 바로잡았다.
이런 지식들의 탐구는 분명 삶의 지혜를 전하려는 현인들이 하던 일은 아니다. 탈레스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를 현실 생활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탈레스 스타일’이다. 이와 연관해 플라톤이 짤막하게 소개한 일화가 있다.
“별 보기에 딱 좋은 밤이야!” 탈레스가 집을 나서며 외쳤다. “밤마다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하녀가 따라나서며 투덜거렸다. 밤마다 별을 관측한다면서 산등성이를 오르는 노인의 시중들기가 잔뜩 못마땅한 눈치다.
하지만 탈레스는 못 들은 척 하늘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러다 길가 웅덩이에 빠지며 버렁 나둥그러졌다. 겨우 그를 부축해 꺼낸 후 하녀가 조롱하듯 물었다. “탈레스 님. 당신은 발밑에 있는 것조차 분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탈레스가 하녀에게 무엇이라고 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탈레스는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에 해마다 홍수가 생기는 시기가 에테시아 북풍이 부는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관찰했으며, 그리고 이 북풍이 나일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때문에 강물의 범람하는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 지진이 일어나는 원인을 땅이 마치 나뭇잎처럼 물위에 둥둥 떠 있어 물의 운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탈레스는 자연현상을 주의깊게 관찰한 다음 그것에서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후에 아낙시만드로스가 ‘지구는 어떤 것에도 떠받쳐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으며, 모든 것들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다’는 반박을 받았다. 특기할 것은 아낙시만드로스 당시에는 중력重力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탈레스에 의해서 인류가 처음으로 ‘신화에서 학문으로’ 의미있는 한 걸음을 떼어놓았는데, 이때 그가 사용한 생각의 도구가 바로 ‘원리’이다.
탈레스는 자연의 뒤에서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라, 파악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자연적 원리라고 믿었다. 관찰과 실험 그리고 사고를 통해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 그는 신화로부터 벗어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보편성을 탐구하여 그것이 가진 힘을 현실생활에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 같은 탈레스 스타일의 참신함과 중요성을 실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같은 사고, 곧 원리라는 생각의 도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탈레스 이전의 사람들은 호메로스적 세계관을 갖고 살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사의 뒤에는 언제나 신의 뜻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킬레우스가 자기의 전리품인 여자를 빼앗아간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칼을 빼려고 할 때 여신 아테네가 뒤에서 그의 머리를 낚아채고는 귓속말로 그를 단념시킨다. 그러자 아킬레우스가 칼을 거둔다. 《오디세이아》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충한 하인을 죽이려는 오디세우스에게 역시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참고 잠자리에 들 것을 권하자 순순히 복종한다.
이처럼 호메로스적 인간들은 개인에게든, 국가에서든, 자연에서든,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뒤에는 올림포스 신들의 뜻이 있다고 믿었다. 요컨대 원리라는 생각의 도구를 아직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호메로스적 신화적 사유들도 그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 곧 자연과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어떤 난폭한 마법적 수단이나 신비한 주술에서 나온다는 원시적 사고에서 이미 커다란 한 걸음을 옮겨 놓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합리적 또는 과학적 사유와 설명도 역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 뒤에는 뭔가 ‘본질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다를 게 무엇인가? 단지 그 숨어있는 본질적인 어떤 것이 무엇이냐 하는 내용만 다를 뿐이다. 생각의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호메로스의 신화적 사유가 자연과 인간의 보편성, 곧 원리를 찾으려는 생각의 첫 단계였고, 탈레스로부터 시작하는 합리적, 과학적 사유는 그 다음 단계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전하는 탈레스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당시 밀레토스 사람들은 탈레스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지식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탈레스는 천체를 관찰한 다음, 이듬해에 올리브가 풍작이 될 것을 예측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밀레토스와 인근 지방에 있는 기름 짜는 기계들을 모두 값싸게 예약했다. 이듬해 예상대로 대풍작을 이뤄 기름 짜는 기계의 수요가 폭증하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가격으로 기계를 임대해 주어 큰돈을 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도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진지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이 일화를 통해 원리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원리란 자연과 사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사고하고 추론하여 만들어지며, 그 결과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 또는 변화에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요컨대 관찰-추론-검증이 원리가 탄생하는 일반적인 과정이다.
관찰이 먼저다! 모든 지식은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관찰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 원리 창조의 출발이다. 패턴은 공간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반복되는 유사한 특성들을 통해 파악된다.
원리란 관찰과 사고라는 2개의 날개로 날아오르는 새다. 다음 두 가지의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소장품 가운데 ”플림프톤 322Plimpton 322’라는 이름이 붙은 고대 바빌로니아 유물이 있다. 지금부터 3,900년에서 3,600년 사이에 쐐기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인데, 1945년에 지금의 이라크 남쪽 센케레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그 안에 피타고라스 삼각형의 변의 길이를 적은 15개의 숫자쌍들이 있다. 플림프톤 322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든 그리스인 피타고라스Pytagoras, BC582-BC497보다 적어도 1,000년 이전에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의 3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왜 그들은 피타고라스처럼 그 자료들을 하나의 원리로 만들지 못했을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피타고라스 3쌍을 이루는 숫자쌍들을 개별적으로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 산술표를 만들어 건축이나 측량 같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 자료들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려는 사고를 하지 않았다. 그리스인 피타고라스에 와서야 관찰을 통해 주어진 자료들을 논리적 추론으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변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라는 기하학적 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T.Brache, 1546-1601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놀라운 인내력과 끈기를 가진 관찰자이고 천문학자였다. 1576년에 브라헤는 덴마크 국왕의 후원을 얻어 ‘우라니보르그(Uraniborg, 우주의 성城이라는 뜻)라는 천문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성들의 운행을 지칠 줄 모르고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수집한 행성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에서 그 어떤 보편적 원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반면에 그의 제자인 독일인 요하네스 케플러J.Kepler, 1571-1630는 브라헤가 측정해 모아놓은 엄청난 관측 자료들을 물려받았다. 그는 튀코의 방대한 데이터로부터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가장 간단한 곡선(타원)을 상상을 불허하는 무수한 계산 작업을 통해서 알아내서 이른바 ’케플러 법칙‘을 만들어앴다.
이 두 가지의 역사적 사례는 원리의 발견에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줄 뿐 아니라, 동시에 관찰만으로는 어떤 원리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널리 알려진 ’“내용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관찰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사고없는 관찰은 맹목이다.”
첫댓글 후산 글 잘 읽었네.너무 더워 가을 노래 두곡 듣다가 심오한 철학 강의 읽으니 옛날이 생각나네.무더위에 건강하시길
깊이 있고 방대한 지식에 늘
놀라움을 금할수없네!
건강도 잘 챙겨 가면서
정진하기 바라네!
늘 고마워!
격조 높 은 글 잘 읽었네, 몸 조리 잘 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