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9
4월26일[부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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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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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77O3KPOEKg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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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젊은 시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그것도 높고 험준한 산을. 한번은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눈도 내리고 있고, 시간적 여유도 없고, 안전하게 올라온 길로 신속히 내려가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내 사전에 올라온 길로 내려가는 법은 없다며 홀로 능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옆으로 빠져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능선만 이어졌습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져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얼어 죽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능선 타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길도 아닌 길고 긴 계곡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죽을 고생 끝에 동사 및 아사 일보 직전, 그것도 심야에 겨우겨우 한 민가에 도착했습니다. 기진맥진해 한 집 문을 두드리다가 간첩으로 오해받아 경위 조사까지 받고 귀가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길도 길이 아닌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 가면 ‘개고생’이 분명한 길, 멸망으로 가는 길, 인생 종치는 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네 인생에서 돈이나 명예, 권위나 자리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 것은 아닌지요?
사실 돈이라는 것은 돌고 돈다 해서 돈이 아닌가요? 없다가도 생기는 것, 목돈 좀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손에 쥔 한 줌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차지하게 되는 권한이나 직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맡겨진 임기가 채워지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물려주고 내려와야 할 부초나 뜬구름같이 허망한 별 것 아닌 자리입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결국 우리가 선택할 최종적인 길, 진리와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올라가셨던 길입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올라갔던 예루살렘 언덕길입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은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계획하셨으니 올라갔던 골고타 언덕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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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quIz7LCp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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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난 사람의 삶의 방식>
금쪽같은 내새끼 116회에서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무섭게 돌변한 금쪽이, 심지어 주먹질까지?!’란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들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 캐릭터의 가치가 자신에겐 너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싸움은 나의 귀한 것을 누군가 때문에 잃었다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누가 나의 똥을 훔쳐 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가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왜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어른으로 성장할 탈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숲에 있는데 뒤에서는 불이 나서 계속 내가 있는 곳으로 타고 있고 앞은 큰 강이 흐르는 수렁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불안하고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 장소를 다른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싸움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그 수렁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그 자리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진리란 말은 그 다리가 하나뿐이란 뜻이고, 생명이란 말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죽음뿐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용서’가 그 생활 방식이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이 모두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칠 때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계단을 만나야 합니다. 위 금쪽이들의 이야기에서 금쪽이들의 다리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휘청거려 아이들의 평화가 깨진다면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갇히고 맙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위 아이들의 부모는 매일 싸우고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워할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감 가지고 아이와 싸운다면 저는 아직 어른이 되는 다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여자도 사귀며 결혼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일은 다 잊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합니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행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숟가락에 주며 쏟지 말고 성을 한 바퀴 돌면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성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숟가락의 기름이 쏟아지는 줄 몰랐습니다.
현자는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는 기름에 주의를 더 기울이다가 주위의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자는 행복의 비법은 기름을 쏟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자는 그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주면서 그 사람이 이 세상 것들에 정신을 쏟을 존재가 아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은총과 진리라는 두 방울의 기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미워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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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메주고리예에서 미사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데 그분들은 이미 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8년 전부터 제가 매일 쓰는 강론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메주고리예에 순례 와서 미사에 참례했는데 제가 미사 주례를 해서 정말 놀랐다고 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는데 저의 글이 인터넷이라는 마차를 타고 참 멀리도 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가 있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참 좋은 가사의 성가입니다. 부족한 저의 묵상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부족한 저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혼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졌습니다. 잠시 스쳐지나간 만남이지만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안에 은총의 성지순례가 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메주고리예에는 발현산과 십자가 산이 있습니다. 발현산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곳입니다. 성모님은 나타나셔서 5가지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기도를 하라는 것, 특히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성심껏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단식하라는 것입니다. 미사참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발현지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이 특별한 기적과 표징일 수 있겠지만, 성모님의 발현은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의미입니다. 순례에 온 분들은 발현산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십자가 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산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1900년을 기념해서 1933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십자가 산에는 14처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15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 산에는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신부님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십사처를 세웠고,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쓰러졌는데 그 시간이 오후 3시 였다고 합니다. 거칠고 뾰족한 돌산을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을 하는 의미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메주고리예’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평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평야에 ‘야고보 성당’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5시에 묵주기도와 미사가 있습니다. 매일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와 미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당 안에서만 했었는데 순례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야외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이야기를 따라서 성당 마당에는 각 언어별로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고백성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매년 8월에는 젊은이의 신앙대회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발현산으로 오르면서 묵주기도를 하고, 십자가산으로 오르면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볼 곳도 많이 있는데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위해서 메주고리예에를 찾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신앙 안에서 기뻐하고, 신앙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고, 신앙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메주고리예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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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혼란스러워하자 그들을 위로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며,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바칠 하느님의 나라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이 집, 하느님의 이 성전, 하느님의 이 나라와 하늘나라는 지금, 여기서 지어지고 세워지고 준비되고 있다. 거기에 거처가 마련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살며 감사하는 삶으로 마련하는 자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 이렇게 살아서 그 자리가 마련되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게 되리라 하신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은 바로 그분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므로 우리가 있게 될 거처는 바로 그분이시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그 길을 아는 것이다. 이 길은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을, 진리는 거룩한 교회를,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길은 완덕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복된 목적지,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아들을 통하는 길이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므로 아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라고 하면, 아들이신 하느님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아드님은 참되신 분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죄의 저주로 죽은 우리를 되찾아 태초의 상태로 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생명에 도달하는 방법은 그러므로 세 가지가 있다. 온갖 덕을 실천함으로써, 올바른 믿음으로써,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올 삶을 소망함으로써이다. 우리의 인도자요 수단이 되는 분이 바로 아들이시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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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이 말씀보다 우리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을까요? 이 내용 바로 전에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가운데 마지막으로 주시는 당부가 전해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슬픔과 상실감으로 복잡해진 것을 아시자 그들의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십니다. ‘산란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타라소’로, 마치 바다가 폭풍우에 휩싸여 모든 것이 휘저어진 상태, 심연과 표면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요동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그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모나이’는 ‘머무는 장소’, ‘방’을 의미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아버지의 ‘집’, 방이 많은 ‘가정’으로 은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시며, 그 길은 “진리”를 선택할 때 걷게 되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참된 “생명”을 준다고 선언하십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전합니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관계’이고, 지금은 행복해도 언제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산란하고 평온하지 못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삶에 끊임없이 노출된 우리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에서 보호되고 도착지로 인도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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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1) 이 말씀 바로 앞에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3,38) 그리고 그 앞의 21절에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요한 13,21)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거나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은 더욱더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지금 이런 상황 때문에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실 때마다 부활 예고 말씀도 하셨는데,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들었고,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그랬을 것입니다.>
2)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실패란 없다는 것을 믿어라. 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온 내가 하는 일도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30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요한 14,30)
적대자들과 박해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 권한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저승의 세력’은 ‘악의 세력’일 수도 있고 ‘죽음의 세력’일 수도 있는데, 어떤 세력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예수님의 힘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의심과 불안감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인류 구원 사업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 했는가? 그냥 처음부터 부활로 직행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파스카의 신비’ 라고 표현합니다.
‘신비’라는 말은,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일들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이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고, 그 일들을 통해서 인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은 ‘악’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악’이 하느님의 뜻은 아닌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저도’ 당신의 뜻을(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 모든 과정과 결과를 ‘하느님의 섭리’라고 표현합니다.
4)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활동의 끝’이 아니라, ‘한 과정’이라는 것을, 즉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다시 와서”는,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부활 후의 현존’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아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유일한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고, 흔들리지 말고 당신만 믿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의심과 불안’은 믿음을 흔들어대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면서, 더욱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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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함을 내다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행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고, 서열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엄중하게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이어갈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해졌다.(요한 13장)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식이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스승을 팔아넘기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사탄의 굴레를 쓰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제자단의 으뜸인 베드로조차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룻밤을 넘기기도 전에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고별식장의 분위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다. 여기까지가 요한복음 13장의 흐름이다.
고별식장의 삼엄한 분위기는 모두를 걱정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당장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대체 스승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제자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이나 불안에 듣는 약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동시에 희망이며 신뢰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제자들의 걱정과 불안이 제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 무지(無知)에서 불안과 걱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가심'은 잠시의 이별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 나라에 모두를 위한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이별이며, 있을 곳이 마련되면 다시 와서 모두를 데려가실 때까지의 이별이다.(2-3절)
예수께서는 이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제자들의 '앎'(지식)을 전제하신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동반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라고 반문한다.
토마스는 아직도 불안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그 길'에 대한 자신의 앎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표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요,
그 길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혀주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께서 가실 곳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이란 아버지 자신을 말한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닌 아들의 고향이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곳에 친히 가서 제자들의 집을 마련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비유법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도식을 사용한 자기계시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지식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식시키셨다. 믿음에 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만큼은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음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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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길이신 그리스도>
출장이 유난히 잦은 나에게 어떤 자매가 <신부님, 운전을 좋아하시나봐요?>라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 길을 좋아하지요.>라고 답했다. 수도생활 여정 안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나의 테마는 <길>이다.
얼마 전에는 10여년 전 양로원 할머니들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다녔던 비포장길을 다시 가본 적이 있다. 이제는 너무도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언제 지나쳤나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때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비가 온 뒤면 버스가 패인 웅덩이를 피해 곡예 운전을 하고 한 시간쯤 여정을 마치고 나면 마치 말을 탄 듯 속이 확 뒤집어지는 체험도 하였는데...
그 당시에 그 비포장길은 나에게 길에 대한 많은 묵상꺼리를 제공하였었다. 우리 인생살이, 수도생활의 여정도 바로 이런 비포장길이라는 것, 때론 웅덩이도 있고 큰 돌멩이도 있어 피해 가야 할 때도 있고 느리지만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 고속도로는 절대로 아닐 것이라는 것, 이 길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었고,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도 유난히 시골길을 즐겨 찾는다. 갈수록 도로확장으로 인해 오지길이 없어지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길을 걸을 때마다, 길을 달릴 때마다, 그림 속에 있는 길을 볼 때마다, <길이신 그분>을 만난다. 그분이 나의 길이다.
그분이 나를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시는 안내자이다. 나는 그 길을 즈려밟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 길이 없다면 나는 길없는 길을 무작정 헤메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건는다. 노랫말처럼, 무작정, 정처없이 걷는 나그네 길이 아니고 그분과 함께 그분을 밟고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희망의 길이다. 이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이 많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선물이다.
이렇게 함께 길을 걷는 도반들과 그분을 즈려밟고 하느님 나라로 향해가는 이 발걸음이 어찌 무거울 수 있으리오? 고속도로를 경쟁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보다 느리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도반들이여, 오늘도 함께 걸읍시다. 길이신 그분과 함께 그분을 살며시 즈려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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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만남 등의 단어들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생명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지고지순한 바람이겠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인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쉽게 그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믿음을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어 나가고 있지요. 성찬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한 전례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 된, 너무나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거나 세련된 예식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손쉬운 몸짓들이 성찬례에 녹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줄곧 예수님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고, 마실 것을 주면 마시면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때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배고파하는지, 무엇을 목말라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굳이 필요 없는 것조차 끝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욱더 많이 채우려 덤비는 오늘의 세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고픔을 묵상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배고플 때 모든 음식이 맛있어 보이듯, 우리가 무엇에 정말 배고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이 맛볼 참된 양식을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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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14,6)
살아오면서 마음이 산란한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13,33)라는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스승이신 주님께서 자기들의 곁을 떠나신 다음에 남아 있을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마음이 산란해졌습니다. 모든 희망을 다 걸고 따르며 살았던 그들에겐 스승의 떠남(=죽음)은 엄청난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4,1)라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주님을 다시 볼 수 없고, 자신들을 떠나신다는 예고는 분명 제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 산란(=때론 마음이나 정신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의 방점은 제자들의 산란해진 마음을 질책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산란한 마음을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에 걱정하고 있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를 주는 듯싶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것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사실(14,2~4) 하고 재차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떠나야 하는 까닭이란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양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영원히 아버지 집에서 당신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지금 겪어야 할 이별의 슬픔을 잘 견디어 내라는 당부와 같습니다. 헤어짐은 잠시이지만 다시 만나 아버지 집에서 함께할 시간은 영원할 것이기에 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며 믿음으로 꿋꿋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다소 생뚱맞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하고 길이신 주님께 길을 묻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산란한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서 제자들은 진정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깨닫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의 어떤 누구도 홀로 길 없는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작고한 최인호의 소설 중에 「길 없는 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4권으로 된 장편소설인데 그 제목부터 무겁고 심오한 소설입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대학교수가 선승 ‘경허’의 발자취를 뒤쫓는 내용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 경허는 홀연히 환속하여 ‘박란주’라는 이름으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사라집니다. 그는 ‘길 없는 길’을 혼자 걸었으며 결국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또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요.” 이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합니다.
길 없는 길을 먼저 걸으시고 새로운 길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14,6)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바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 길을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16,28) 하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이란 사람들을 구원해서 구원된 사람들을 아버지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길은 바로 당신 인격과 당신의 파스카 여정을 통해서 도달하기에 “그 길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14,6) 하고 명확히 밝히십니다.
주님이 아니시고는,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도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실존의 한계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부하신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살아갈 때만이, 예수님이 우리가 의지하며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의 사랑!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산란해진 마음을 되잡고 주님의 떠나신 이후에도 꿋꿋하게 걸어갈 힘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곧 갈라진 마음 없이 내 사랑을 믿고 의지하라!! 사랑만이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살아갈 때 이미 우리는 그 길 위에 있는 것이며, 그 길인 예수님과 함께 마침내 그 길의 끝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에, 이 사랑이 바로 길인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 자체입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은 길 없는 길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14,6) 곧 예수님의 사랑이 없이는 사랑이요 생명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눈을 뜬 사람과 사랑으로 눈을 뜬 사람에게는 그 길과 아버지의 집이 분명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길을 가면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살 때 이미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 자유와 진리를 충만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의 산란함이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며 길 없는 길이 아닌 길을 통해서 힘차게 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예수의 길은 좁은 길이며 험한 길(마7,13-14)이기에 모든 이가 길의 끝까지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려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기에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길 없는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되시고, 그 길을 걸으면서 살아야 할 진리를 사셨기에 마침내 아버지의 집에 먼저 이르러서 우리가 아버지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실 것이기에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갑시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집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 겪을 모든 어려움을 사랑의 산제물로 봉헌하면서 우리 모두 다 함께 아버지의 집에 도달합시다. 저는 혼자 가기 싫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가자고요!!! 그러기에 제가 좋아하는 정 호승님의 「봄길」을 보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 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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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적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어떤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예속되고 지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답습되던 것들에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에 갇혀 있게 됩니다. ‘왕년에 말이야~’라면서 하는 말,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 이런 모습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과거에 갇혀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더 예속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를 따르면 그만큼 실패 확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에서 찾게 되는 기쁨을 얻기는 힘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이라는 과거를 따르라고 그토록 요구했고, 그러지 않은 예수님 모습을 반대해서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님 모습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새로운 마음으로 더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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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랐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길 희망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지길 기원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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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모두가 길이 되건만 누군가는>
요한 14,1-6 (아버지께 가는 길)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모두가 길이 되건만 누군가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빛의 길을 걸으며
빛의 길을 내고
마침내 빛의 길이 되고
누구는
어둠의 길을 걸으며
어둠의 길을 내고
마침내 어둠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사랑의 길을 내고
마침내 사랑의 길이 되고
누구는
탐욕의 길을 걸으며
탐욕의 길을 내고
마침내 탐욕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진리의 길을 걸으며
진리의 길을 내고
마침내 진리의 길이 되고
누구는
허위의 길을 걸으며
허위의 길을 내고
마침내 허위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누구는
살림의 길을 걸으며
살림의 길을 내고
마침내 살림의 길이 되고
누구는
죽임의 길을 걸으며
죽임의 길을 내고
마침내 죽임의 길이 된다
모두가
길을 걸으며
길을 내고
마침내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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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길>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예수님-
문없이 살 수 없듯이 길없어도 살 수 없습니다. 빛을 찾는 인간이듯 문을 찾는 인간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서면 우선 창문에 눈길이 가고 밖에 나서면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은 길에 대한 묵상입니다. 길에서 나서 길을 가다가 길에서 죽는 인생입니다. 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도인(道人)인 인간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길을 찾는 인간입니다. 길하면 넷이 생각납니다.
1. 하숙생의 길입니다. 1960년대 풍미했던 인기의 절정이요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해 많이 불렀던, 지금도 70-80대 노년 인생들이 잊지 못할, 지금은 고인이 된 최희준 비오의 하숙생 노래입니다. 당시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인생 후반 재혼과 동시에 아내의 권유로 세례받았으며 성당 활동은 내 인생의 기쁨이라 고백한 최비오 가수입니다.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이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간다”
들을 때마다 온몸과 온맘에 촉촉이 적셔드는 느낌의 가사와 곡의 노래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믿는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 간다고 고백합니다. 믿는 이들 앞에 놓여있는 “나는 길이다” 천명하신 하늘길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2. 길하면 생각나는 2014년 안식년 때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인생길을 압축한 듯한 순례길이요 지금도 순례길을 걷듯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여정의 길이요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걷게 될 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명심할 요소는 목적지, 이정표, 도반, 기도요, 날마다의 길을 걷는 여정에 상기해야 할 필수요소들입니다. 내 인생길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자주 점검해 보는 것도 산티아고 순례 덕분입니다.
3. 날마다 아침식사후 맨발걷기 한지도 7개월째입니다. 집무실에서 십자가의 길 따라 가다가 하늘길 따라 수도원 정문까지 갔다가 다시 역순으로 걸어서 집무실로 돌아오는 참 상징성이 깊은 하늘길과 십자가의 길입니다. 순례길 걷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걷습니다. 집무실의 위치가 십자가의 길 14처가 끝나는 지점 바로 위에 위치해 있어 저는 집무실을 제15처 ‘부활의 집’, ‘지족암(知足庵), 천장암(天藏庵)이라 부르기도합니다.
4.하늘길이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23년전 요즘 때 글이지만 하늘빛을 간절히 찾는 당시의 제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요, 그 굽이굽은 굽은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하늘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온갖 초목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사랑 소나무야!”-2001.4.21.
길을, 하늘길을 찾는 인간이요 이 길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이요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길이라 다 길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제대로 인생길을 가고 있는지요? 문중의 문 하늘문은, 길중의 길 하늘길은, 단하나 예수님뿐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하늘길을 걷는 이들은 저절로 다음 옛 어른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지위나 명성이 아니라, 하루하루 충실하게 쌓아가는 일상이다.”<다산>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을 지키고, 인(仁)에 의지하고, 예(禮)에서 노닌다.”<논어>
하늘문,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떠나,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근심걱정에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어리석게 멀리 밖으로 찾아갈 것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하늘문, 하늘길이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가는 하늘길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몰라 전전긍긍 불안해 하는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하늘길 예수님이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는 물론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말씀입니다.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하늘길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이미 지금부터 앞당겨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를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토마스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로 환히 드러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복음이 이 한구절로 요약됩니다. 거짓 길도, 거짓 진리도, 거짓 생명도 거짖 빛도 참 많습니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하기 힘든 세상이듯 가짜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바로 진위를 식별하는, 분별하는 잣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수록 지혜로운 분별이요, 아버지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기쁘게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걷게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에서서의 진리와 생명의 삶,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문을 드나들면서 풍성한 은총에 충만한 삶이듯 예수님의 하늘길을 걸으면서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늘길이신 주님을 통해 구원의 감격을 고백하는 바오로의 강론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소식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되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날마다 오늘 부활하시는 예수님이시오, 날마다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하시는 하늘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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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살아 행복하고, 죽어 구원 받는>
옛날 형제들을 양성할 때 많이 얘기한 것이 성숙입니다. 양성이란 미성숙한 형제를 성숙한 형제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숙과 미성숙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왜 사냐고 묻는 것이지요.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는지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방황이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인데 목적이 뚜렷이 없으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출가해야 하는데 가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서 수행하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집을 나서면 출가인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집이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서면 가출이지요.
그리고 가출하여 방황하는 미성숙한 인생은 열심히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갈 데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갈 수 있습니까?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어슬렁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목적이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열심히 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사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 목적이 단기적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는 것이 목적이고, 대학 가서는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고, 취직해서는 결혼하고 애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적입니까?
일찍이 저는 이 인생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와 방황을 했고 그 인생길을 찾고자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찾다가 10여 년 만에 찾은 목적이 바로 사는 동안 ‘행복한 것’,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고, 행복과 구원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행복이요,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이 길에 길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사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찾기 위해 석가에게도 가고, 힌두 명상가들에게도 가고, 노자 공자에게도 갔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길을 찾고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오늘 주님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일생 감사하는 저인데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이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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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4,1-6)의 제목은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고 말씀하시자, 의심의 사도인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아버지 품'입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예수님처럼 살다가려고 애를 씁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길을 몰라서, 그리고 길을 찾지 못해서 우리는 종종 방황을 합니다. 생명의 길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라 종종 죽음 길로 들어서곤 합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지옥의 상태를 체험하곤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지금 여기에서의 기쁨과 평화와 행복'입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이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가 기쁘지 않고 평화롭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돈과 권력과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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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q1WxCB4V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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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생명과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생명과 진리는
끊이지 않고
예수님의 삶으로
이어저 있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과
당신의 진리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온전히
내어맡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내어맡기는 것이
길이며
내어맡기는 것이
진리이며
내어맡기는 것이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내어맡기는
하나의 진리 속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내어맡기는
실천의 힘을 통해
우리의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무르익어 갑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어우러지는
삶을 우리가
살길
바라십니다.
참된 진리를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들은
주어진 길을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걸어갑니다.
예수님에게서
길이 시작되었고
진리가 이어졌고
모든 생명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참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참된 진리와
참된 생명이
되시어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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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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