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분명한 것은, 연구, 투자, 그리고 응용면에서 모든 것이 직빵으로 승패의 효과를 보게 되어있는 전쟁분야에서 만큼은 "효율이 곧 생명이며, 효율이 없는 것은 쓰지않는다"는 것이 거대한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시각각에 도입된 신기술이나 신경향이 곧장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는 대개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여 처절하게 패배한 사람들을 서술할 때 많이 나오죠. ^^
갑옷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그다지 집약적인 발전을 보이지 않은 갑옷이 중세로 들면서 굉장히 커다랗게 부곽되고, 다시 중세가 끝나면서 갑옷의 발달사 또한 함께 몰락했다는 식으로 갑옷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것은 전술적인 면 보다는 전략적인 조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천년전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교한 국가조직을 정비한 고대 서양에서는 개개인의 병사들의 전투능력보다는 전체적인 전략적인 조건을 통해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스케일이 큰 전쟁행위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갑옷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중세에 들면 분명히 갑옷의 방어력이란 것이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분명, 무적은 아니지만, 갑옷을 장착하여 높은 방어력을 갖고 있는 군인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1)그와 똑같은 수준의 군인을 양성하거나, 2)개개인의 전투력과는 무관하게 잘 조직되고 훈련된 많은 병사들러 대항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갑옷의 무용론이 서구에서도 등장한 시기는 르네상스가 진행되던 도중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는 갑옷이 중요한 도구라는 인식이 서양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한 16세기에 들면 선지적인 군사학자들이 조심스럽게 갑옷의 폐지론을 논의하기 시작하고, 그 후 약 150년이 되면 대규모로 양성된 보병들의 흉갑 같은 예에서 과거의 흔적을 겨우겨우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18세기에 들면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의 군대에서 갑옷이 완전철폐되기에 이르죠.
정기적인 군사예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세에서는 갑옷을 갖추는 것에도 돈이 많이 들었을 뿐더러, 그러한 갑옷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를 제작하는데에도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무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정규군을 양성할 만큼의 재력도 물론, 없었죠. 한낱 벼락치기 훈련을 받고 몽둥이 정도로 무장한 오합지졸들에게 말탄 기사를 상대로 맞서서, 갑옷의 약점을 파악하여 공격하거나, 기마대열의 돌격을 막아내고 기사들을 땅으로 떨어뜨려 죽일만한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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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의 방어력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휘두르는 공격'에 강하다는 것입니다. 일반화시키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대체로 당시에 동양이든 서양이든 가장 간단하게 시킬 수 있는 군사교육은 칼을 들고 휘둘러 베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갑옷은 난전에서 그것으로 몸을 둘러싼 사람을 보호해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즉, 숙련도가 낮을 수록 장검을 들고 크게 휘두르는 동작이 주가 되는데, 질서계통이 비교적 약한 난전에서 그러한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글라디우스검을 로마군이 도입한 것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크게 휘둘러 베는 장검으로는 촘촘하고 질서있는 대열 속에서 싸우기가 힘듭니다. 짧은 칼로 무장하여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고, 상대의 공격을 막거나 흘려버린 후에 강력한 찌르는 공격을 펼치는 단검으로 무장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는 것이죠.
병사들에게서 그러한 숙련도를 보장할 수 없는 중세의 전투에서는 분명, 갑옷은 커다란 의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갑옷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갑옷을 아예 부숴버리거나, 작은 공간에 집중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갑옷을 뚫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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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시기를 중점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가.. 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16세기 이후의 서양이라면 분명 페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갑옷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시기니까요.
동양쪽으로는 글쎄요.. 음.. 그쪽의 군사상식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고 할 수 없지만 한번 추측해본다면, 기본적으로 서양과는 달리 매우 높은 인구밀집도와 통일왕국에 대한 지향성이 보여주듯, 그에 따라 전통적으로 동양의 전쟁은 꽤나 규모가 크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양의 암흑시대에서 한명의 영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야 수백.. 중세만해도 수천 정도이고.. 수만명 단위로 전장에 투입할만한 능력이 된 것은 15세기 전후이죠. 반면, 동양은 기원전부터 꾸준히 수만명 단위로 전쟁에 투입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많은 병사들의 개개인의 갑옷에 신경쓸만한 여유는, 또, 그럴 필요는 동양에서는 크게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서양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았던 환경에서 판금구조의 쇠갑옷을 만들지 않은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