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도진창과 기습, 정면 공격하는 척 기만 후 은밀하게 우회 습격하라
잔도 없애 항우 안심시키고 힘 키운 유방
잔도 복구하는 척하며 항우군 속이고
우회 후 진창 점령 漢 건국 발판 마련
미·영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전서 사용
기사사진과 설명
![](https://t1.daumcdn.net/cfile/cafe/222CC34058BDBCBD23)
중국 장가계나 계림 등에 있는,
절벽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잔도. 필자 제공 |
중국을 찾는 여행객들은 오랜 역사와 웅장한 자연에 놀라워한다. 장가계나 계림 곳곳에는 높은 산허리를 가로질러
만든 나무다리 잔도(棧道)가 산재한다. 한(漢)나라 유방은 이 잔도를 불태워 항우를 속였다.
暗·어두울 암 渡·건널 도 陳·펼칠 진
倉·창고 창: 아무도 모르게 건너가 진창을 점령하다
잔도를 수리하고 진창으로 몰래
건너가다
적전계 8계 암도진창은 아무도 모르게 건너가(暗渡) 진창(陳倉)을 점령한다는 뜻이다. ‘암도’는 협곡을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인 잔도를 몰래 건너가는 것으로 진창 점령을 위한 수단이나 방책이다. 진창[오늘날의 바오지(寶鷄) 시]은 시안 서쪽의
도시로서 군량과 마초(馬草) 창고가 있는 군수기지였다. 중국 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관문인 이곳을 거쳐 티베트·쓰촨·간쑤에서
시안·베이징·상하이로 갈 수 있다.
암도진창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회음후 열전(淮陰侯 列傳) 한신 편에 등장한다. 회음후는
회음[오늘날의 화이안(淮安)] 땅에 봉해진 후(侯·지방 제후)라는 뜻이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전성기인 무제(기원전 141∼87) 때의 역사가다.
『사기』에는 중국 상고시대부터 무제까지 3000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책은 본기 12편과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모두 130편으로
구성됐다. 그중 열전에는 왕은 아니지만 역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독자들은 36계를 통해 여러 중국
고전을 접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아본 7개 전술만 보더라도 영락대전·병경백자·손자병법·한비자·육도삼략·노자 등에서 인용됐다. 36계의 각 전술과
함께 여러 병서와 중국 역사를 살펴보는 묘미가 덤으로 있다. 진(秦)나라 이후 두 번째 통일제국인 한나라는 장량의 암도진창계로
건설됐다.
잔도를 불태워 漢 제국 건설
기원전 207년 진 왕조는 반란에
휩싸였다. 유방과 항우는 전략적 요충지인 관중을 차지하려고 서로 경쟁했다.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오늘날의 쉬저우(徐州)]은 황하 하류의
곡창지대였다. 항우는 유방의 야심을 경계해 관중 땅을 8개로 나누고 그중 가장 먼 서쪽 오지로 그를 밀어냈다. 유방이 쫓겨간 파촉(巴蜀)은
쓰촨(四川)과 간쑤(甘肅) 지방의 옛 이름이다. 항우는 파촉과 팽성 사이를 3개 지역으로 구분해 장한·사마흔·동예에게 각각 맡겼다. 이른바
중립지대로 파촉에서 중원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이 세 곳을 지나야 했다.
유방의 참모 장량은 파촉으로 가면서 험한 벼랑의 잔도를 모두
태워야 한다고 했다. 화소잔도(火燒棧道)다. 유방이 복수를 위해 동쪽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음을 일부러 드러내야 항우가 안심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방은 파촉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번쾌로 하여금 잔도 120㎞를 수리하게 했다. 장한은 이들이 잔도를 복구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이 틈에 유방은 잔도를 우회, 진창을 기습 공격해 점령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다. 오늘날의 유럽 지도도 암도진창 전술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그려졌다.
진창 파리로 가다,
노르망디 상륙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미·영 연합군은 한판 승부수를 던졌다. 상륙작전 지역을 기만하는 ‘불굴의
용기(fortitude)’ 작전이었다. 연합군은 이를 통해 독일군이 상륙 지역을 오인하게 하거나, 최소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즉각적인
반격 능력을 떨어뜨리려 했다. ‘불굴의 용기’ 작전은 다시 나누어지는데 ‘북 포티튜드’ 작전은 연합군이 노르웨이를 거쳐 덴마크로 진출, 소련과
연결 통로를 확보하고 독일 북쪽으로 쳐들어갈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영국 폭격기들은 노르웨이 해안선에 배치된 독일군 감시초소와
공군기지를 폭격해 독일군을 묶어 두었다.
‘남 포티튜드’ 작전은 연합군이 영국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파드칼레에 상륙하는 것처럼
기만을 했다. 수만 대의 모형 탱크와 트럭을 켄트 주변 항구 공터에 보이도록 배치하고, 상륙 주력이 배치된 지역은 위장천막을 쳐 독일공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일부러 패튼 장군의 위치를 노출하는 무전 신호도 흘렸다. 독일군은 파드칼레에 19개 이상의 사단을 배치하고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는 18개 사단만 배치했다. 결국 연합군 100만 명은 노르망디에 상륙해 1944년 8월 25일 파리에 입성했다. 노르망디가 암도, 파리가
진창이었다.
<오홍국 전쟁과 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