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대중목욕탕 다방과 이발소도 겸업했던 목욕탕, 수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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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3. 01:18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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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대중목욕탕
다방과 이발소도 겸업했던 목욕탕, 수월루
요약 1905년경 서울 서린동 근방, 다방과 이발소까지 겸업한 초기의 목욕탕 개업.
한옥을 개조해 욕조를 들이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들어가 공동으로 목욕하는 형태의 '목욕집'.
사대부 양반들은 모두 벗고 여럿이 모인 곳에 갈 수 없는 등 이용자가 극히 제한됨.
1920년 전후로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늘어나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김.
우리 나라에 지금과 같은 대중목욕탕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1920년 무렵 평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또 하나의 우리말 신문이었던 <매일신문>을 참고해보면 목욕탕이 처음 등장한 곳은 1905년경 서울 서린동 근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는 1936년 1월이 시작되면서 연재한 것으로, 제목은 '현대 조선 원조 이야기'로 되어 있고, '그것은 누가 시작하였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제13회 '요리편'을 보면 "30여 년 전 죽첨정 공설시장 부근에 목욕탕과 아울러 커피차 파는 다방이 있었고, 그후 광교 남쪽 천변에 수월루(水月樓)라는 목욕탕이 있어, 그곳에는 다방과 이발소까지 겸업을 하야···"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대중목욕탕이 지금의 서린동 근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때에는 물론 목욕탕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한 때였다. 또한 그곳에 가면 목욕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이발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목욕탕은 곧 동네 이름을 따서 사직탕이나 전동탕이니 하는 명칭으로 바뀌어졌고, 누구나 그런 곳이 바로 대중목욕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서민들이 애용하는 목욕탕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모되지 않은 셈이다.
1900년대 초기의 서린동 근방 사진을 보면 한옥이 즐비한 가운데 너른 개울이 보이고,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다. 다방과 이발소까지 겸업했다는 초기의 목욕탕도 분명 이런 사진 속의 어느 한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즉, 한옥을 개조해서 욕조를 들여놓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들어가 공동으로 목욕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곳을 사람들은 그냥 목욕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용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남자들도 강심장이 아니면 내놓고 드나들지 못했다. 남자나 여자나 아무리 목욕을 한다지만, 옷을 모두 벗고 여럿이 모인 곳에 갈 수 없는 게 사대부 양반들이었다.
물론 서민들의 경우엔 달랐다. 서린동으로 흘러 내려가는 개울에서는 밤이면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멱을 감고 놀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럿이 발가벗고 목욕하기엔 도무지 어색하기만 해서 대중목욕탕은 개점 휴업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런 목욕탕이 1920년 전후부터는 전국의 도시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일본인들의 발길이 늘어나는 사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기후 관계로 목욕이 생활의 주요한 부분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 대중목욕탕은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얄궂은 일본인 때문에 목욕탕이 발칵 뒤집히고 신문에까지 보도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3일자에 실린 다음의 기사는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여탕 안에 남자'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우리 나라에 대중목욕탕이 자리 잡을 때까지의 우여곡절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나간 3월 그믐날 저녁···. 적선탕에서 한 괴악한 야만의 행위가 있었으니, 곧 경성부청에 다닌다는 일인 관리가 목욕하러 와 남탕은 사람이 많아 들어갈 수 없다고 핑계하고 여탕으로 발가벗고 들어갔다. 그때에 목욕하던 여탕의 여자들은 '에그머니' 하며 놀라 뛰어나왔다. 그 소리에 남탕에 있던 조선남자들이 나와보니 기가 막히는 광경인지라. 곧 주인을 불러 단단히 꾸짖고··· 그 동네 사람들은 기막혀 말하되 일본에는 그런 만풍이 있을지 모르나 세계 각국 어느 문명한 곳에 그런 풍속이 있을가 하며 목욕탕 주인의 묵인함과 당국의 취체 완만함을 분개하더라."
여탕에 들어갔던 남자는 오늘의 서울시청 직원인 셈인데, 목욕탕 주인의 묵인하에 그런 짓을 한 듯하다. 그 남자는 조선남자들에 의해 남탕으로 끌려나갔다는데, 곧 샛문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는 일본인들의 목욕 풍습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이라 할 수도 있다. 당시 일본인들의 대중목욕탕은 입구만 다를 뿐 안에 들어가면 남녀 구별이 없었다. 이는 물론 시골의 농민들이 사용하는 간이 목욕탕 같은 것이었고, 여자가 목욕을 하고 나오면 남자가 하는 식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겐 그것이 '만풍'으로 보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아예 처음부터 목욕탕에 남녀 유별의 철칙을 확실하게 정해놓고 그 전통을 아직껏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