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군단기 ‘벡실럼’, 그리스 방패 창조적 계승… 형식은 같게 내용은 다르게
수호의 대상 도시에서 군단으로 변화
절대적 신 대신 황제·관련 상징으로
승리·행운의 여신 등 직접 그려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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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미네르바의
1군단’ |
로마 군단을 대표하는 여러 깃발 가운데 독수리기(아퀼라)를 제외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깃발이 ‘벡실럼’이다. 우리말로 ‘군단기’로 해석되는 벡실럼은 대개 창끝에 군단의 상징(문양·숫자·지역·구호 등)을 새긴 직사각형의 천을
매달았다. 오늘날 ‘부대기’의 먼 조상쯤으로 볼 수 있다.
군단 사용 상징 39개 식별
가능
현재 확인 가능한 로마 군단은 모두 44개다. 그런데 군단 번호는 최고 30번(제30군단)을 넘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부대 번호를 가진 여러 개의 군단이 서로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존재했음을 뜻한다. 이들은 기면 가장 하단에 새겨진 군단의 이름을
가지고 구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군단이 사용한 상징인데 식별 가능한 것이 39개 정도 된다. 지금부터 이를 중심으로 로마 군단이 사용한
상징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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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아폴론의
15군단’ |
기사사진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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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키레나이카
3군단’ |
로마 군단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로마는 그리스를 계승했기 때문에 그리스 방패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리스 방패와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표현 방법이 다르거나 아예 다른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독특함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인들이 숭배했던 신이나 동물·무기와 같은 상징물이 방패에서 깃발의 형태로 계승되기는 했지만, 황제가 등장하면서 절대적 신의 개념은
약화된 듯하다. 다른 상징들은 동물 하나의 형태로 단순화되면서 신이 아닌 황제나 군단에 관련된 것들로 대체됐다.
이제부터는 군단의
이름·황제·지역 등의 세부정보와 상징을 연결시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소개하는 군단기는 모두 비교적 최근에 재현된
것으로서 충분한 고증이 필요하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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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
여신. |
신들이여, 로마 군단을 보호하소서!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 신들에 비해 소홀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그리스 방패에 새겨진 상징 대부분은 도시의 수호신과 관련이 있었는데, 로마에서는 수호의 대상이
도시에서 군단으로 바뀌게 돼 신은 깃발 위에 내걸렸다. 로마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를 군단에 주며 ‘군단=로마’로 인식했기 때문에 도시와 군단의
수호신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 방패에 새겼던 제우스·아테나·포세이돈·아폴로·헤라클레스는 로마의 군단기와 겹치지만 새로운 신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특히 황제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신을 담은 깃발의 숫자가 줄었고 표현 방식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① 전쟁의 신이 수호하는 군단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86년에 게르만족에 맞서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독일의 본(Bonn) 일대에서 창설한 군단이 있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며 군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한
‘미네르바(Minerva)’를 군단의 수호신으로 정한 이 군단은 ‘미네르바의 1군단’으로 불렸다. 군단기에는 투구를 쓰고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미네르바와 그를 상징하는 올빼미가 보인다.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숭배한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는 지혜의 동물 올빼미나 메두사 또는 고르곤의 형상을
사용했고 시칠리아에선 세 다리 사이에 메두사의 얼굴을 그려 넣기도 했다.
② 주피터·넵튠·아폴론의
군단
로마 최고의 신 주피터(Jupiter)를 깃발에 새긴 30군단은 서기 100년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창설됐다. 황제의 이름에서 따온 ‘울피아’와 전승을 뜻하는 ‘빅트리스’를 함께 사용해 ‘천하무적 트라야누스 30군단’으로 불린다. 주피터의
형상은 전해지진 않지만 다른 사례(번개를 던지는 주피터)를 보면 상상이 된다. 같은 주피터를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스타일도 있었다.
12군단은 기원전 58년에 시저에 의해 창설됐다. 주피터의 상징인 번개를 사용해 ‘번개 12군단’으로 불린다. 골족과의 갈리아
전쟁에 투입돼 많은 무공을 세웠는데 그 유명한 알레시아 공성전에도 참전한 바 있다. 12군단과 같은 날, 같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11군단은
바다의 신 넵튠(Neptune)을 수호신으로 깃발 위에 내걸었다. 얼핏 보면 매끈한 미소년으로 아폴론처럼 보이지만 오른손에 든 세 갈래로
구부러진 삼지창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물론 아폴론이 지켜주는 군단은 따로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41년에 만든 군단으로
현재의 헝가리 일대에서 창설됐다. 깃발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아폴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상징 그리핀(Griffin)이다. 이름은 예상하는 바와
같이 ‘아폴론의 15군단’이다. 그리핀은 사자와 독수리를 합친 전설의 동물로 천리를 내다보는 눈, 단단한 부리, 폭풍을 일으키는 날개를 갖고
있다.
③ 승리·행운의 여신의 군단
그리스 방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호신도 있다.
‘키레나이카 3군단’은 시저에 의해 기원전 46년 현재의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일대에서 창설됐으며, 당시 지명을 따 명명됐다. 이 군단의 상징은
날개 달린 모습으로 한 손에 월계관, 다른 한 손엔 종려나무를 들고 지구를 밟고 서 있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Victoria)’다.
‘프리미게니아 15군단’은 칼리굴라 황제가 39년에 만들어 라인강 변에 투입한 군단이며,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가장 먼저 수호하는 군단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명명했다. 상징은 전해지는 바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일반적인 포르투나의 모습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뿔(Cornucopia)을
들고, 다른 손으론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풍만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간혹 정의의 여신과 함께 눈을 가린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 한다”는 속설은 머리카락이 앞에만 있고 뒤는 대머리인 이 여신의 외형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생사를 좌우하는 전쟁에서 승리와
행운은 누구나 반드시 기대고 싶지만, 범접할 수 없는 절대 신의 영역이어서 군단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충분해 보인다.
위에 소개한
사례 가운데 번개와 그리핀을 제외하면 그리스엔 없었던 새로운 방식이다. 도시 수호신을 상징물로 대신하는 것이 ‘그리스 스타일’이라면, 군단의
수호신을 직접 그려내는 방식은 ‘로마 스타일’인 셈이다.
사진=필자 제공
<윤동일 육사 총동문회
북극성안보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