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형과 나의 사례는 성경 해석상의 차이가 얼마나 사물을 다르게 보고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교회, 같은 공동체에서 자랐다. 우리는 마치 쌍둥이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신학교를 갔으며, 그곳에서 문자적 해석, 세대주의적 해석 그리스도중심의 영적해석을 배웠다.
나는 그리스도 중심의 영적 윤리를 가르치는 학교에 갔다.
형과 나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이혼, 총기규제, 이민문제, 이라크 전쟁과 같은 민감한 현안이 발생하면 형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약성경을 찾았다. 나는 바른 통찰력을 갖게 위해, 먼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가령 사형제도가 이슈가 제기 될 때, 형은 "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 라는 출애굽기 21장 23-24 절에 의존하였다. 반면 나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한 사실을 예를 들면서 " 예수님께서 저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할 만큼 악한 사람이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형은 성경을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다.
형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 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에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가 팔레스타인처럼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정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다행히 형과 나는 상대의성경 해석 방식에 대한 깊은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의견은 달라도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이 배웠다.
많은 사람들은 이부분에서 실패했다...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정수 > 책중에 나온 본문을 발췌해서 옮겨 보았습니다.
저자: 팔머베커
첫댓글 저자의 형제가 성경을 보는 관점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가 변함없다는 것은 놀랍다
우리나라의 우리 세대들은 토론이라는 것을 해 본 경험이 극히 미비하고 주입식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의문이나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극히 혐오하는 편이다
이런 꼰대 기질로는 아마 복음의 전파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울뿐아니라 방해할것이다.
저자가 마지막에 쓴 말인 " 많은 사람들이 이부분에서 실패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일단 구원론부터 자기가 생각한 것과 틀리면 이단시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성경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나 견해를 살펴보거나 재조명하려는 의도 없이 덮어놓고 비난하거나 감정을 상해하는 모습을 흔히 볼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친구나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일어날수 있는 일이므로 애석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서로가 깊이 상고한 부분에 대하여 진정한 대화를 나눌수 있어야 하는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남대문을 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을 본사람을 이긴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런 경우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