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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제20장(第二十章) 정(政)의 도(道) 그리고 학문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哀公)이 정사를 묻자,
哀公은 魯君이니 名蔣이라
애공(哀公)은 노(魯)나라 군주(君主)이니, 이름은 장(蔣)이다.
子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存이면 則其政擧하고 其人亡이면 則其政息이니이다
공자(孔子)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정사가 방책(方策)에 펼쳐져 잇으니,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정사가 거행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사가 종식됩니다.
方은 版也요 策은 簡也라 息은 猶滅也라 有是君, 有是臣이면 則有是政矣라
방(方)은 판(版)[판자]이요, 책(策)은 간(簡)[죽간(竹簡)·목간(木簡)]이다. 식(息)은 멸(滅)과 같다. 이러한 군주가 있고 이러한 신하가 있으면 이러한 정사가 있는 것이다.
人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니이다
사람의 도(道)는 정사에 빠르게 나타나고, 땅의 도(道)는 나무에 빠르게 나타나니, 정사의 신속한 효험은 쉽게 자라는 갈대와 같습니다.
敏은 速也라 蒲盧는 沈括이 以爲蒲葦라하니 是也라 以人立政은 猶以地種樹하여 其成速矣요 而蒲葦는 又易生之物이니 其成尤速也라 言 人存政擧가 其易如此라
민(敏)은 빠름이다. 포로(蒲盧)는 심괄(沈括)이 “포위(蒲葦)[갈대]이다”라 하였으니, 옳다. 사람으로서 정사를 세움은 마치 땅에다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 그 이루어짐이 빠르며, 갈대는 또 쉽게 자라는 물건이어서 그 이루어짐이 더욱 빠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정사가 거행됨이 그 쉬움이 이와 같음을 말씀한 것이다.
故로 爲政在人하니 取人以身이요 修身以道요 修道以仁이니이다
그러므로 정사를 함이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되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되 도(道)로써 하고, 도(道)를 닦되 인(仁)으로써 해야 합니다.
此는 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라 爲政在人은 家語에 作爲政在於得人하니 語意尤備라 人은 謂賢臣이요 身은 指君身이라 道者는 天下之達道요 仁者는 天地生物之心而人得以生者니 所謂元者善之長也라 言 人君爲政이 在於得人이요 而取人之則(칙)이 又在修身하니 能仁其身이면 則有君有臣而政無不擧矣니라
이는 위 글의 ‘사람의 도(道)는 정사에 빠르게 나타난다.’는 말을 이어 말씀한 것이다. 위정재인(爲政在人)은 《가어(家語)》에 ‘정사를 함이 사람을 얻음에 있다.〔爲政在於得人〕 ’로 되어 있으니, 말뜻이 더욱 구비되었다. 인(人)은 현신(賢臣)을 이르고, 신(身)은 군주의 몸을 가리킨다. 도(道)는 천하(天下)의 달도(達道)요, 인(仁)은 천지(天地)가 물건을 내는 마음으로 사람이 얻어서 태어난 것이니, 《주역(周易)》〈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이른바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란 것이다. 인군이 정사를 함은 사람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취하는 법은 또 몸을 닦음에 있음을 말씀하였으니, 능히 그 몸을 인(仁)하게 하면, 훌륭한 군주가 있고 훌륭한 신하가 있어서 정사가 거행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仁者는 人也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쇄) 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니이다
인(仁)은 사람의 몸이니, 어버이[친척]를 친히 함이 큰 것이 되고, 의(義)는 마땅함이니, 어진이를 높임이 크니, 친척을 친히 함의 줄어듦과 어진이를 높임의 등급이 예(禮)가 생겨난 이유입니다.
人은 指人身而言이라 具此生理하여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하니 深體味之면 可見이라 宜者는 分別事理하여 各有所宜也요 禮는 則節文斯二者而已라
인(人)은 사람의 몸을 가리켜 말하였다. 이 생리(生理)를 갖추고 있어 자연히 측달(惻怛)하고 자애(慈愛)로운 뜻이 있으니, 깊이 체득(體得)하여 음미(吟味)하면 볼 수 있다. 의(宜)는 사리(事理)를 분별하여 각기 마땅한 바가 있게 하는 것이요, 예(禮)는 이 두 가지를 절문(節文)할 뿐이다.
(在下位하여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鄭氏曰 此句는 在下하니 誤重在此라
정씨(鄭氏)[정현(鄭玄)]가 말하였다. “이 구는 아래에 있으니, 잘못 중복되어 여기에 있다.”
故로 君子는 不可以不修身이니 思修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요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요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으니,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할진댄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어버이를 섬길 것을 생각할진댄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알 것을 생각할진댄 하늘의 이치를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爲政在人하고 取人以身이라 故로 不可以不修身이요 修身以道하고 修道以仁이라 故로 思修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요 欲盡親親之仁인댄 必由尊賢之義라 故로 又當知人이요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皆天理也라 故로 又當知天이라
정사를 다스림은 사람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취함은 몸으로써 하기 때문에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몸을 닦음은 도(道)로써 하고, 도(道)를 닦음은 인(仁)으로써 하기 때문에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어버이[친척] 를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친친(親親)의 인(仁)을 다하고자 할진댄 반드시 존현(尊賢)의 의(義)를 말미암아야 하기 때문에 또 마땅히 사람을 알아야 하는 것이요, 친친(親親)의 줄어듦과 존현(尊賢)의 등급이 모두 천리(天理)이기 때문에 또 마땅히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天下之達道五에 所以行之者三이니 曰君臣也와 父子也와 夫婦也와 昆弟也와 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요 知(智) 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니 所以行之者는 一也니이다
천하(天下)의 달도(達道)[공통된 도(道)]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셋이니, 군신간(君臣間)과 부자간(父子間)과 부부간(夫婦間)과 곤제간(昆弟間)[형제간(兄弟間)]과 붕우간(朋友間)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天下)의 달도(達道)요, 지(智)·인(仁)·용(勇) 이 세 가지는 천하(天下)의 달덕(達德)[공통된 덕]이니,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니 卽書所謂五典이요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라 知(智) 는 所以知此也요 仁은 所以禮此也요 勇은 所以强此也니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이나 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요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니 然이나 一有不誠이면 則人欲間之하여 而德非其德矣리라 程子曰 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니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달도(達道)는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함께 행하여야 할 길이니, 《서경(書經)》〈순전(舜典)〉에 이른바 ‘오전(五典)[오륜(五倫)]’이란 것이요, 맹자(孟子)가 말씀하신 ‘부자간(父子間)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간(君臣間)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간(夫婦間)에는 분별이 있고, 장유간(長幼間)에는 차례가 있고, 붕우간(朋友間)에는 신(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지(智)는 이것을 아는 것이요, 인(仁)은 이것을 체행(體行)하는 것이요, 용(勇)은 이것을 힘쓰는 것이니, 이것을 달덕(達德)이라고 이르는 것은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함께 얻은 바의 이(理)이기 때문이다. 일(一)은 곧 성(誠)일 뿐이다. 달도(達道)는 비록 사람이 똑같이 행하는 바이나 이 세 가지 덕(德)이 없으면 이것을 행할 수 없고, 달덕(達德)은 비록 사람이 똑같이 얻은 바이나 한 가지라도 성실(誠實)하지 못함이 있으면 인욕(人慾)이 사이에 끼어서 덕(德)다운 덕(德)이 아닌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른바 성(誠)이란 것은, 다만 이 세 가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외에 다른 딴 성(誠)이 없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여는 一也니이다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여는 一也니이다
혹은 태어나서 이것[달도(達道)]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成功)함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知之者之所知와 行之者之所行은 謂達道也라 以其分而言하면 則所以知者는 知(智)也요 所以行者는 仁也요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는 勇也며 以其等而言하면 則生知安行者는 知也요 學知利行者는 仁也요 困知勉行者는 勇也라 蓋人性이 雖無不善이나 而氣稟有不同者라 故로 聞道有蚤莫(早暮) 하고 行道有難易라 然이나 能自强不息이면 則其至는 一也니라 呂氏曰 所入之塗雖異나 而所至之域則同하니 此所以爲中庸이라 若乃企生知安行之資하여 爲不可幾及하고 輕困知勉行하여 謂不能有成이라하면 此道之所以不明不行也니라
지지(知之)의 알 바와 행지(行之)의 행할 바는 달도(達道)을 이른다. 그 분별로써 말하면, 아는 것은 지(智)요, 행하는 것은 인(仁)이요, 이것을 알고 성공하여 똑같음에 이르는 것은 용(勇)이며, 그 등급으로써 말하면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은 지(智)요, 학지(學知)와 이행(利行)은 인(仁)이요,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은 용(勇)이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비록 불선(不善)함이 없으나 기품(氣稟)이 동일(同一)하지 않으므로 도(道)를 들음에 이르고 늦음이 있으며, 도(道)를 행함에 어렵고 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능히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으면 그 이르는 경지는 똑같은 것이다.
여씨(呂氏)[여대림(呂大臨)]가 말하였다. “들어가는 길은 비록 다르나 이르는 경지는 똑같으니, 이 때문에 중용(中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생지(生知)와 안행(安行)의 자품(資稟)을 바라 따라갈 수 없다고 여기고, 곤지(困知)와 면행(勉行)을 가벼이 여겨, 성공이 있지 못하다고 이른다면, 이것은 도(道)가 밝아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는 소이(所以)이다.”
(子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恥는 近乎勇이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학문(學問)을 좋아함은 지(智)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勇)에 가깝다.
子曰 二字는 衍文이라 此는 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니 通上文三知爲知와 三行爲仁이면 則此三近者는 勇之次也니라 呂氏曰 愚者는 自是而不求하고 自私者는 徇人欲而忘返하고 懦者는 甘爲人下而不辭라 故로 好學이 非知나 然이나 足以破愚요 力行이 非仁이나 然이나 足以忘私요 知恥가 非勇이나 然이나 足以起懦니라
자왈(子曰) 두 글자는 연문(衍文)이다.
이는 달덕(達德)에 미치지 못하여 덕(德)에 들어가기를 구하는 일을 말씀하였으니, 위 글의 삼지(三知)[생지(生知)·학지(學知)·곤지(困知)]는 지(智)가 되고, 삼행(三行)[안행(安行)·이행(利行)·면행(勉行)]은 인(仁)이 됨을 통해 보면, 이 세 가까움은 용(勇)의 다음인 것이다.
여씨(呂氏)[여대림(呂大臨)]가 말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 하고 찾지 않으며,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자는 인욕(人慾)을 따라 돌아올줄 모르며, 나약한 자는 남의 아래가 되기를 좋아하고 사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문(學問)을 좋아함은 지(智)가 아니나 족히 어리석음을 깨뜨릴 수 있고, 힘써 행함은 인(仁)이 아니나 족히 사사로움을 잊을 수 있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勇)이 아니나 족히 나약함을 일으킬 수 있다.”
知斯三者면 則知所以修身이요 知所以修身이면 則知所以治人이요 知所以治人이면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는 바를 알 것이요, 몸을 닦는 바를 알면 남을 다스리는 바를 알 것이요, 남을 다스리는 바를 알면 천하(天下)와 나라와 집안(國家)을 다스리는 바를 알 것이다.
斯三者는 指三近而言이라 人者는 對己之稱이요 天下國家는 則盡乎人矣라 言此하여 以結上文修身之意하고 起下文九經之端也라
이 세 가지란 삼근(三近)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다. 인(人)[남]은 자기를 대칭(對稱)한 것이며, 천하(天下)와 국가(國)가(家)는 남을 다한 것이다. 이것을 말씀하여 위 글의 수신(修身)의 뜻을 맺고, 아래 글의 구경(九經)의 단서를 일으킨 것이다.
凡爲天下國家 有九經하니 曰 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니라
무릇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를 다스림에 구경(九經)[아홉 가지 떳떳한 법] 이 있으니, 몸을 닦음과 어진이를 높임과 친척을 친히 함과 대신(大臣)을 공경함과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體察)함과 여러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함과 백공(百工)들을 오게 함과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懷柔)함과 제후(諸侯)들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다.
經은 常也라 體는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라 子는 如父母之愛其子也라 柔遠人은 所謂無忘賓旅者也라 此는 列九經之目也니라 呂氏曰 天下國家之本은 在身이라 故로 修身이 爲九經之本이라 然이나 必親師取友然後에 修身之道進이라 故로 尊賢이 次之하고 道之所進이 莫先其家라 故로 親親이 次之하고 由家以及朝廷이라 故로 敬大臣, 體君臣이 次之하고 由朝廷以及其國이라 故로 子庶民, 來百工이 次之하고 由其國以及天下라 故로 柔遠人, 懷諸侯가 次之하니 此는 九經之序也라 視群臣을 猶吾四體하고 視百姓을 猶吾子하니 此는 視臣視民之別也니라
경(經)은 떳떳함이다. 체(體)는 자신이 그 처지에 처한 것으로 가설하여 그 마음을 체찰(體察)하는 것이다. 자(子)는 부모(父母)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는 것이다.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한다는 것은 《맹자(孟子)》에 이른바 ‘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구경(九經)의 조목을 나열한 것이다.
여씨(呂氏)[여대림(呂大臨)]가 말하였다. “천하(天下)와 국가(國家)의 근본은 몸에 있기 때문에 수신(修身)이 구경(九經)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친히 하고 벗을 취한 뒤에 수신(修身)의 도(道)가 진전되기 때문에 존현(尊賢)이 그 다음이 되는 것이요, 도(道)의 진전되는 바가 자기 집안보다 먼저 함이 없기 때문에 친친(親親)이 그 다음이 되는 것이요, 집안으로 말미암아 조정(朝廷)에 미치기 때문에 경대신(敬大臣)과 체군신(體群臣)이 그 다음이 되는 것이요, 조정(朝廷)으로 말미암아 나라에 미치기 때문에 자서민(子庶民)과 내백공(來百工)이 그 다음이 되는 것이요, 나라로 말미암아 천하에 미치기 때문에 유원인(柔遠人)과 회제후(懷諸侯)가 그 다음이 되는 것이니, 이는 구경(九經)의 차례이다. 군신(群臣)을 보기를 나의 사체(四體)와 같이 하고, 백성을 보기를 나의 자식과 같이 하니, 이는 신하를 봄과 백성을 봄의 구별이다.”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重하고 子庶民則百姓勸하고 來百工則財用足하고 柔遠人則四方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道)가 확립되고, 어진이를 높이면 의혹되지 않고, 친척을 친히 하면 제부(諸父)[숙부(叔父)]와 형제(兄弟)들이 원망하지 않고, 대신(大臣)을 공경하면 혼란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체찰(體察)하면 선비들의 보답하는 예(禮)가 중하고, 여러 백성들을 사랑하면 백성들이 권면(勸勉)하고, 백공(百工)을 오게 하면 재용(財用)[재정(財政)]이 풍족하고,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하면 사방이 돌아오고, 제후(諸侯)들을 은혜롭게 하면 천하가 두려워한다.
此는 言九經之效也라 道立은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니 所謂皇建其有極이 是也라 不惑은 謂不疑於理요 不眩은 謂不迷於事라 敬大臣이면 則信任專而小臣不得以間之라 故로 臨事而不眩也라 來百工이면 則通功易事하여 農末相資라 故로 財用足하고 柔遠人이면 則天下之旅가 皆悅而願出於其塗라 故로 四方歸하고 懷諸侯면 則德之所施者博而威之所制者廣矣라 故로 曰天下畏之라하니라
이는 구경(九經)의 효험을 말씀한 것이다. 도립(道立)은 도(道)가 자기 몸에 이루어져 백성들의 의표가 될 만함을 이르니, <《서경(書經)》〈홍범(洪範)〉에> 이른바 ‘황제(皇帝)가 극(極)을 세운다.’는 것이 이것이다. 불혹(不惑)은 이치에 의혹하지 않음을 이르고, 불현(不眩)은 일에 혼란하지 않음을 이른다. 대신(大臣)을 공경하면 신임(信任)이 전일(專一)하여 낮은 신하들이 이간질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을 당하여 혼란하지 않는 것이다. 백공(百工)을 오게 하면 기술을 통하고 일을 바꿔 하여 농업(農業)과 말업(末業)[상공업(商工業)]이 서로 의뢰하므로 재용(財用)이 풍족해지는 것이다. 먼 지방의 사람을 회유하면 천하의 나그네가 모두 기뻐하여 그의 길로 나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방(四方)이 돌아오고, 제후(諸侯)들을 은혜롭게 하면 덕(德)의 베풀어짐이 넓고 위엄의 제어하는 바가 넓어지기 때문에 천하가 두려워한다고 말한 것이다.
齊明盛服하여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요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요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요 官盛任使는 所以勸大臣也요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요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요 日省月試하여 旣稟(餼廩)稱事는 所以勸百工也요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요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는 所以懷諸侯也니라
재계(齊戒)하고 깨끗이 하며 성복(盛服)[성장(盛裝)]을 하여 예(禮)가 아니면 동(動)하지 않음은 몸을 닦는 것이요, 참소하는 이를 제거하고 여색(女色)을 멀리 하며 재물을 천히 여기고 덕(德)을 귀하게 여김은 어진이를 권면(勸勉)하는 것이요, 그 지위를 높여 주고 녹(祿)을 많이 주며 좋아함과 싫어함을 함께 함은 친친(親親)을 권면(勸勉)하는 것이요, 관속(官屬)이 많아서 사령을 마음대로 맡기게 함은 대신(大臣)을 권면하는 것이요, 충신(忠信)[성심(誠心)]으로 대하고 녹(祿)을 많이 줌은 선비들을 권면하는 것이요, 철에 따라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둠은 백성들을 권면하는 것이요, 날로 살펴보고 달로 시험하여 창고에서 녹(祿)을 줌을 일에 맞추어 함은 백공(百工)을 권면하는 것이요, 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잘하는 이를 가상히 여기고 능하지 못한 이를 가엾게 여김은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것이요, 끊긴 대(代)를 이어주고 폐지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혼란한 나라를 다스려 주고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어 주며, 조회(朝會)와 빙문(聘問)을 때에 따라 하며, 가는 것을 후(厚)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薄)하게 함은 제후(諸侯)들을 은혜롭게 하는 것이다.
此는 言九經之事也라 官盛任使는 謂官屬衆盛하여 足任使令也라 蓋大臣은 不當親細事라 故로 所以優之者如此라 忠信重祿은 謂待之誠而養之厚니 蓋以身體之하여 而知其所賴乎上者如此也라 旣는 讀曰 餼니餼廩은 稍食也라 稱事는 如周禮稿人職曰 考其弓弩하여 以上下其食이 是也라 往則爲之授節以送之하고 來則豊其委積(자)以迎之라 朝는 謂諸侯見於天子요 聘은 謂諸侯使大夫來獻이라 王制에 比年一小聘하고 三年一大聘하고 五年一朝라 厚往薄來는 謂燕賜厚而納貢薄이라
이는 구경(九經)의 일을 말씀한 것이다. 관성임사(官盛任使)는 관속(官屬)이 많아서 사령(使令)을 충분히 맡길 수 있음을 이른다. 대신(大臣)은 작은 일을 친히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대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충신중록(忠信重祿)은 대하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기르기를 후(厚)하게 하는 것이니, 자신으로써 체찰하여 그 윗사람에게 의뢰함이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다. 기(旣)는 희(餼)로 읽으니, 희품(餼稟)은 초식(稍食)[녹봉(祿俸)]이다. 칭사(稱事)는 《주례(周禮)》〈고인직(稿人職)〉에 ‘궁노(弓弩)를 상고하여 그 먹는 것[녹봉(祿俸)]을 올리고 내린다.’는 것이 이것이다. 갈 때에는 그를 위하여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고, 올 때에는 위자(委積)[물자]를 풍족히 하여 맞이한다. 조(朝)는 제후(諸侯)가 천자(天子)에게 뵙는 것을 이르고, 빙(聘)은 제후(諸侯)가 대부(大夫)로 하여금 천자국(天子國)에 와서 예물(禮物)을 올리게 함을 이른다. 〈왕제(王制)〉에 “비년(比年)[매년(每年)] 마다 한번 작은 빙문을 올리고, 3년에 한번 큰 빙문을 올리고, 5년에 한번 조회한다.” 하였다. 후왕박래(厚往薄來)는 잔치와 하사(下賜)를 후(厚)하게 하고, 공물(貢物)을 바침을 박(薄)하게 함을 이른다.
凡爲天下國家 有九經하니 所以行之者는 一也니라
무릇 천하(天下)와 국(國)가(家)를 다스림에 구경(九經)이 있으니, 이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一者는 誠也니 一有不誠이면 則是九者皆爲虛文矣라 此는 九經之實也라
일(一)은 성(誠)이니, 한 가지라도 성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 구경(九經)이 모두 빈 글이 된다. 이는 구경(九經)의 실제이다.
凡事는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모든 일은 미리 하면 성립되고, 미리 하지 않으면 폐해진다. 말을 미리 정하면 차질이 없고, 일을 미리 정하면 곤궁하지 않고, 행동을 미리 정하면 결함이 없고, 도(道)를 미리 정하면 궁하지 않다.
凡事는 指達道, 達德, 九經之屬이라 豫는 素定也라 跲은 질也요 疚는 病也라 此는 承上文하여 言 凡事를 皆欲先立乎誠이니 如下文所推是也라
모든 일이란 달도(達道)·달덕(達德)·구경(九經)의 등속을 가리킨다. 예(豫)는 평소에 미리 정함이다. 겹(跲)은 넘어짐이요, 구(疚)는 병(病)[하자나 결함] 이다. 이는 위 글을 이어 모든 일을 다 먼저 성(誠)에 서고자 함을 말씀하였으니, 아래 글에 미루어 나감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在下位하여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가 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信任)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붕우(朋友)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붕우(朋友)에게 믿음을 받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붕우(朋友)에게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버이에게 순함이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할 것이다. 몸을 성실히 함이 방법이 있으니, 선(善)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성실히 하지 못할 것이다.
此는 又以在下位者로 推言素定之意라 反諸身不誠은 謂反求諸身하여 而所存所發이 未能眞實而無妄也라 不明乎善은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하여 而眞知至善之所在也라
이는 또 아랫자리에 있는 자로써 평소에 미리 정하여야 하는 뜻을 미루어 말씀한 것이다. 자기 몸에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기 몸에 돌이켜 찾아봄에 마음에 둔 바와 발(發)하는 바가 진실(眞實)하고 망령됨이 없지 못함을 이른다. 선(善)을 밝게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심(人心)과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살펴 지선(至善)이 있는 곳을 참으로 알지 못함을 이른다.
誠者는 天之道也요 誠之者는 人之道也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여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요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道)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道)이니,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도 도(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서 종용(從容)히 도(道)에 맞으니, 성인(聖人)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
此는 承上文誠身而言이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니 天理之本然也요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라 聖人之德은 渾然天理라 眞實無妄하여 不待思勉而從容中道하니 則亦天之道也요 未至於聖이면 則不能無人欲之私하여 而其爲德이 不能皆實이라 故로 未能不思而得하여 則必擇善然後에 可以明善이요 未能不勉而中하여 則必固執而後에 可以誠身이니 此則所謂人之道也라 不思而得은 生知也요 不勉而中은 安行也라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요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라
이는 위 글의 성신(誠身)을 이어 말씀한 것이다. 성(誠)은 진실(眞實)[성실(誠實)]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이르니,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이요, 성지(誠之)는 능히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지 못하여,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고자 하는 것을 이르니, 인사(人事)의 당연(當然)함이다. 성인(聖人)의 덕(德)은 혼연(渾然)히 천리(天理)여서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어 생각함과 힘씀을 기다리지 않고도 종용(從容)히 도(道)에 맞으니 그렇다면 이 또한 하늘의 도(道)인 것이다.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없지 못하여 그의 덕(德)이 다 진실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고 알 수가 없어서 반드시 선(善)을 택한 뒤에야 선(善)을 밝게 알 수 있고, 힘쓰지 않고 도(道)에 맞을 수가 없어서, 반드시 굳게 잡은 뒤에야 몸을 성실히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람의 도(道)란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도 앎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생이지지(生而知之)]이요, 힘쓰지 않고도 도(道)에 맞음은 편안히 행하는 것[안이행지(安而行之)]이다. 선(善)을 택함은 배워서 아는 것[학이지지(學而知之)] 이하의 일이요, 굳게 잡음은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이행지(利而行之)] 이하의 일이다.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이것을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
此는 誠之之目也라 學問思辨은 所以擇善而爲知(智)니 學而知也요 篤行은 所以固執而爲仁이니 利而行也라 程子曰 五者에 廢其一이면 非學也니라
이것은 성실히 하는 조목(條目)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함은 선(善)을 택하는 것으로서 지(智)가 되니, 배워서 아는 것이요, 독실히 행함은 굳게 잡는 것으로서 인(仁)이 되니,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 다섯 가지 중에 그 하나만 폐하여도 학문(學問)이 아니다.”
有弗學이언정 學之인댄 弗能이어든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인댄 弗知어든 弗措也하며 有弗思언정 思之인댄 弗得이어든 弗措也하며 有弗辨이언정 辨之인댄 弗明이어든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인댄 弗篤이어든 弗措也하여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터득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아,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여야 한다.
君子之學이 不爲則已어니와 爲則必要其成이라 故로 常百倍其功하니 此는 困而知, 勉而行者也니 勇之事也라
군자(君子)의 배움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할진댄 반드시 그 완성을 요(要)한다. 그러므로 항상 그 공부(工夫)를 백배(百倍)로 하는 것이니, 이는 애써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자이니, 용(勇)의 일이다.
果能此道矣면 雖愚나 必明하며 雖柔나 必强이니라
과연 이 도(道)[방법]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柔弱)하나 반드시 강해진다.
明者는 擇善之功이요 强者는 固執之效라 呂氏曰 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니 德勝氣質이면 則愚者可進於明이요 柔者可進於强이어니와 不能勝之면 則雖有志於學이나 亦愚不能明하고 柔不能立而已矣라 蓋均善而無惡者는 性也니 人所同也요 昏明强弱之稟이 不齊者는 才也니 人所異也라 誠之者는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니 夫以不美之質로 求變而美인댄 非百倍其功이면 不足以致之어늘 今以鹵莽(노무)滅裂之學으로 或作或輟하여 以變其不美之質이라가 及不能變하여는 則曰 天質不美는 非學所能變이라하니 是는 果於自棄니 其爲不仁이 甚矣로다
밝아짐은 택선(擇善)의 공효(功效)요, 강해짐은 고집(固執)의 공효(功效)이다.
여씨(呂氏)[여대림(呂大臨)]가 말하였다. “군자(君子)가 배우는 까닭은 기질(氣質)을 변화(變化)하기 위할 뿐이다. 덕(德)이 기질(氣質)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가 밝음에 나아가고, 유약한 자가 강함에 나아갈 수 있거니와, 능히 이기지 못하면 비록 배움에 뜻을 두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밝아지지 못하고, 유약한 자가 서지 못할 것이다. 똑같이 선(善)하고 악(惡)함이 없는 것은 성(性)이니, 사람이 동일한 바요, 어둡고 밝으며 강하고 약함을 받은 것이 같지 않음은 재질(才質)이니, 사람이 각기 다른 바이다. 성실히 하는 것은 그 똑같음을 회복하고 다름을 변화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자질로, 변화하여 아름다워지기를 구할진댄 공부(工夫)를 백배(百倍)로 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노무(鹵莽)[거칠고 소략함]하고 멸렬(滅裂)한 배움으로 혹 하기도 하도 혹 중단하기도 하면서 아름답지 못한 자질(資質)을 변화시키다가 변화되지 못함에 이르면, ‘타고난 자질(資質)이 아름답지 못함은 배워서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스스로 포기함에 과감한 것이니, 그 불인(不仁)함이 심한 것이다.”
右는 第二十章이라 此는 引孔子之言하여 以繼大舜文武周公之緖하여 明其所傳之一致하여 擧而措之면 亦猶是爾니 蓋包費隱, 兼小大하여 以終十二章之意라 章內에 語誠始詳하니 而所謂誠者는 實此篇之樞紐也라 又按孔子家語에 亦載此章而其文尤詳하니 成功一也之下에 有公曰 子之言이 美矣至矣나 寡人이 實固不足以成之也라 故로 其下에 復以子曰로 起答辭어늘 今無此問辭而猶有子曰二字하니 蓋子思刪其繁文하여 以附于篇而所刪有不盡者니 今當爲衍文也요 博學之以下는 家語에 無之하니 意彼有闕文이어나 抑此或子思所補也歟인저
우(右)는 제20장(第二十章)이다. 이는 공자(孔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순(大舜)과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전통을 이어, 그 전한 바가 일치(一致)하여, 이것을 들어다가 놓으면 또한 이와 같이 됨을 밝히신 것이니, 비은(費隱)을 포함하고 소대(小大)를 겸하여 12장(章)의 뜻을 마친 것이다. 이 장(章) 안에 성(誠)을 말한 것이 처음으로 상세하니, 이른바 성(誠)이란 것은 진실로 이 편(篇)의 추뉴(樞紐)이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살펴보면 또한 이 장(章)이 실려 있는데, 그 글이 더욱 상세하다. ‘성공일야(成功一也)’의 아래에 “애공(哀公)이 말씀하기를 ‘선생(先生)의 말씀이 아름답고 지극하나 과인(寡人)이 실로 고루(固陋)하여 이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다시 ‘자왈(子曰)’로써 답한 말씀을 일으킨 것인데 이제 여기에는 이 묻는 말이 없는데도 그대로 ‘자왈(子曰)’이란 두 글자가 있으니, 이는 아마도 자사(子思)가 번잡한 글을 삭제하여 편(篇)에 붙이되 삭제한 것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듯하니, 이제 마땅히 연문(衍文)이 되어야 할 것이요. ‘박학지(博學之)’ 이하는 《가어(家語)》에 없으니, 짐작건대, 저 《가어(家語)》에 빠진 글이 있거나 아니면 이것은 혹 자사(子思)가 보충하신 것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