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때 가족들이 살고있는 부산과 서울을 기차로 왕래를 할 때, 부산역앞에는 멀쩡한 청년이 구걸을 하는 경우가 있다. 레파토리가 참 좋다. 일단 표적이 될만한 대상을 물색 후 슬쩍 접근해 대화를 요청한다.
일단 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면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집이 서울인데, 부산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소매치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었다. 자기를 위해 차표 끊을 돈을 빌려주면 반드시 갚겠다"는 것.
이런 경우 크리스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주님은 "너에게 꾸이기를 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 하신다. 그래서 머리를 써서 내가 구입한 차표를 건네줬다. 그 이유는 좌석번호를 알고있기 때문이다.
다시 표를 구입해 앞서 구입했던 좌석을 가 봤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나에게 표를 건네받은 청년은 그 자리에 없다. 왜 없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그 청년은 나에게 건네받은 차표를 바로 환불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출발전에는 10%정도의 수수료를 공제 후 되돌려 받는다.
마음이 쓰려온다. "주님 저는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왜 나를 배신하는 것인가요?"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냥 침묵하셨다. 살아오며 이런 일은 그 후로도 몇차례 더 경험하였다.
아내는 5자매중 셋째딸이다. 큰 처형만 대구에 살고 4자매는 모두 우리 주변에 살고 있다. 아내는 원래 충남쪽에서 생활을 해왔다. 나를 만나 수도권으로 진입을 했다. 결혼당시 둘째 처형은 남편과의 불화로 아들을 데리고 별거중이었는데, 아내의 보살핌이 필요해 바로 우리 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아내는 한명 한명 동생들을 불러들여 네자매는 주변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내 덕분에 이곳에 찾아와 삶의 보금자리를 이룬 세자매는 아내의 고마움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니 도리어 아내에게 피해를 가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목회를 할 때 우리교회를 출석했지만, 사모의 형제로서의 품위를 지켜주기 보다는 도리어 타 교인의 부담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바로밑에 처제는 아내가 가진 것들을 탐내는 마음이 강하다. 그래서 옷이나 물건등을 빌려간 이후로는 되돌려주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밑에 처제는 이따금 언니를 불러내 자신이 쇼핑하는데 자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어제도 남대문시장을 동행해 줄것을 요청해 다녀온 아내는 최악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였다. 물건을 사지는 않고 계속 사람을 이곳 저곳으로 끌고다녀 지칠대로 지쳤다고 하였다.
아내는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참지를 못한다. 그러다보니 화풀이는 엉뚱한 남편에게 하게 된다. 계속 불평을 토해내고, 때로는 욕까지도 한다. 어쩌면 당사자 면전은 아닐찌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속을 푸는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아내는 질그릇 그 자체이다. 너무나 잘 깨지는 질그릇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아내의 행동에 대해 오랫동안 이해를 못했다. 아니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기 보다는 "사모가 그런 일로 그렇게 화를 내서 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었다. 다른 형제들 역시 아내에게 그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사탄은 아내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공격을 한다. 아내는 자매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그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사한 덕분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니 자신들을 이끌어준 아내에게 고마워함이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친절을 심는다. 때로는 아량을 심는다. 그런데 마땅히 날줄로 알았던 씨앗은 발아가 되질 않는다. 도리어 "피해를 봤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주님은 "도움을 준 자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기대를 하게 된다. 도움은 주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도움을 베푸는 것은 예수님의 심정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와 동행하는 자는 자신이 베푼 자선에 대하여 결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자세이어야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