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욜 1:4, 개역한글)
20대초 청년 때 조용기목사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 요엘서 1:4의 본문을 통해 독특한 해석을 듣고 지금까지도 기억하게 된다. 조목사님은 교회가 겪게될 시련으로 해석을 하였다. 지금와 생각건대는 본인이 스스로 묵상해서 깨달은 말씀이라기 보다는 해외집회를 많이 하다보니 아마도 외국목사의 설교에서 얻은 정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요엘은 네가지 해충을 제시했는데, 사실은 모두 메뚜기에 대한 특징적인 히브리식 표기일 뿐이다. 요엘의 예언은 이스라엘민족이 장차 겪게될 환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환란을 당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를 왜 에덴에서 내쫒았느냐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약속의 실천일 뿐이다. 말씀의 순종이 곧 예수동행이다.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욕심때문인데, 욕심이 곧 죄의 본질이다.
자기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즉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우선하지 않는다. 바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이다. "할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겪은 고뇌와 그 고뇌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죽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의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쳐주셨다. 예수동행은 바로 믿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바로 믿는다는 것은 옳바른 성경이해-옳바른 성경해석의 바탕에서 출발한다.
뱀은 주저하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틀어서 제시했고, 욕심에 이미 무너진 하와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말았다. 욕심앞에서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죽을까하노라가 아니다. 즉시 사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주여 내 생각을 들어주옵소서라고 엉뚱한 담판을 시도하고 있다. 주여 오늘 하루도 절대로 자아가 꿈틀대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내가 사는 길은 죽고 또 죽는 길 뿐임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