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달콤한 향기를 토하며 꽃밭을 지키던 수국 꽃이 점점 빛깔이 바래고 시들해 지니 주먹만 한 꽃송이를 잘라주었다. 그랬더니 그 곁에 하얀 마가렛 꽃이 제가 주인공인양 더욱 선명하게 미소를 짓는다. 오늘 따라 붉은 색 제라늄들보다 하얀 종이꽃과 카랑코레가 눈에 들어온다. 조루를 들고 꽃에 조금씩 물을 주며 유독 흰 꽃을 좋아하는 친구 생각에 젖어든다. 모습과 심성이 꽃처럼 어여쁘고 희귀한 꽃나무 이름도 가르쳐주는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심이 많은 절친사이인 친구를 만나는 날이다.
장롱을 열고 옷을 고르다 화사함이 도리어 친구에게 사치겠다 싶어 그녀를 만날 때 자주 입던 원피스를 골랐다. 부요함이 넘치면서도 언제나 내 앞에서 수수하게만 보이려던 그녀의 겸손이 거울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듯하다.
친구란 무엇일까? 혹자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 나이가 비슷한 사람 ,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밥을 같이 먹는 사람,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 등 굳이 신분의 높낮이를 맞추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를 사랑 할 수 있으면 친구 사이라고 말한다. 우정은 또 어떤 것 일까? 친구를 만나려고 외출준비를 하며 곰곰이 그녀를 떠올려보니 단어의 의미처럼 그녀는 단연코 나의 친구이고 우정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초동친구 학교친구 직장친구, 또 자녀를 키우면서 딸들의 친구 엄마가 나의 친구가 되고, 사회요소요소에서 만나는 친구까지 그 숫자를 헤아려보니 세월의 순간마다 소중했던 친구의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눈에서 멀어지니 친했던 친구와의 우정도 어느덧 소원해지고 그나마 애경사에 얼굴을 보는 게 전부이니 가까이 사는 이웃사촌이 멀리 있는 친척보다 낫다는 말이 생각난다. 시절마다 좋았던 친구조차 잊혀져가는 추억속의 한 구절이 되다니 얼마나 덧없는 인생인가, 아니면 현대의 바쁜 삶을 사는 이유 때문인가, 누구의 탓도 아니건만 뇌리 속에 스치는 친한 벗들의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건다지만 지난날의 옛정은 간데없고 각박한 현실에 안주하며 사는 느낌이다.
꽃을 남달리 사랑하는 그녀의 넓은 정원에는 금계화가 실바람에 나폴 거렸다. 이십 오년지기 우리는 지란지교를 꿈꾸며 백년지기만큼이나 마음이 같고 생각이 닮은 나에게는 보석 같은 친구이다. 굳이 수화기를 잡지 않고도 마음이 울적하다 싶을 때 달려가면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고, 살며 고뇌하는 자신의 심정을 나에게 쏟아 놓고선 후련해 하는 마음이 순한 믿음의 벗, 얼굴한번 붉힌 일 없이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우정이라는 커다란 선물이다. 초봄에 피어나던 어사화 꽃가지를 받쳐주며 내년에는 더 멋지게 피어나라 하던 그녀의 꽃 사랑이 아직 가시지 않는데 한번 피었다 지는 인생이란 수레바퀴는 멈추면 그만 아닌가, 차를 세우고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지난주 암 진단을 받고 온 그녀가 며칠 후 사투를 벌일 앞날이 걱정이 되었다. 전보다 핼쑥해진 얼굴로 그녀가 나왔다.
“어디 갈까?” “제일가고 싶은 곳 말해봐!” “그냥 박 권사만 있으면 돼”...우리는 자주 가던 추억의 들길을 돌아 집으로 왔다. 그녀는 베란다에 피어있는 하얀 꽃 앞에 오도카니 앉아 “천생 여자여, 나에게 과분한 친구 였어” 한다. 내 삶에 다시 친구와 이 꽃을 볼 수 있을까 했다. 암 수술을 받고도 폐까지 전이가 되었다면 한 달 뒤 재수술을 받아야 한다네... 남의 이야기하듯 담담히 쏟아내는 친구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어 딴전부리며 괜찮을 거야 했다. 한 개의 슬픔이 천개의 기쁨을 뺏어간다더니 조심스레 침묵만 흐른다. 손주들 버팀목으로 칠십 다섯까지는 살자고 농담처럼 주고받던 우리의 말이 무색하기만 하다. 왜 하필 나일까? 아냐, 의술이 좋아서 암도 꼭 살려낼 거야, 포기하지 말고 이겨내 보자.
“나 각서 썼어, 치료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사는 것 포기하고 신의 섭리대로 순적히 받아들이기로 했어“ 신앙인답게 순례의 길을 떠나겠다는 그녀의 신념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둘이 포옹을 했다.
친구란 “등짐을 대신 지고 가는 자”라고 하는데 나는 어쩌란 말인가,
목숨까지도 우릴 위해 내어놓으신 그분을 생각하며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간다.
신의 섭리를 알 수 없으나 그녀를 위한 나의 마지막 맑은 눈물을 쏟으며 주여!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사랑하는 나의 친구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