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광나루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기분 중에 책읽기를 좋아하고 신학 연구에 열심이었던 분의 권유로 어느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었습니다.
한 두어번 모임에 간 이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리 모임의 분위기나 성격이 저와는 맞지 않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신학을 공부할 뜻을 고향교회 전도사님께 말씀드리자 두 가지를 권면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서울로 가서 공부할 것과 다른 하나는 신앙은 보수적이되 신학은 다양성에 기반을 두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은사 목사님의 이러한 권면은 시의적절했고 바른 조언이었다고 여기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아리 모임에 개인적으로 실망했던 이유는 그 모임의 주축 멤버들에게서 신앙과 신학의 구분이 안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간단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물위에 떠 있는 기름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에게 진리를 설명하고 전해야 할 사명이 있는 기름이라면 물 밖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라는 바벨론을 벗어나서 독야청청 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영적 감각은 균형과 조화라 하겠습니다.
그런점에서 시대를 향한 복음 전파라는 사명 감당의 두 가지 틀이 있다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담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체득하게 되는 것은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의 문제는 일부인들의 논쟁거리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같다는 입장입니다.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표현할 때 동전의 양면이라 하듯이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문제 역시 같은 이치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예가 있기에 소개합니다.
<1990년대 초 펜실베니아와 뉴욕에서는 진료성적표 제도를 도입했다. 진료성적표는 어떤 병원과 의사가 환자의 진료를 잘하는지를 시민들이 알게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진료성적표를 통해 환자의 호전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합리적인 제도인가? 일반 시민들은 어떤 병원이 좋다더라라는 풍문만 주변에서 들을 수 있을뿐이지 환자 치료 능력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보기가 힘들다.
물론 그런 자료가 있는 경우도 없고 말이다. 주정부는 각 병원과 의사의 성적을 공개함으로써 온전한 시장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다.
실력좋은 병원이나 의사는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 좋고 그렇지 못한 병원과 의사들은 경쟁의식 속에 꾸준하게 성적을 높이려고 할 터이니 말이다.
결국 진료성적표를 통해 의료 서비스와 수준을 동시에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드라노브 연구팀은 진료성적표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고령환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진료성적표는 충격적인 부작용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쁜 성적을 받는 것이 두려워 생명이 위중한 환자를 일부러 치료하지 않는 행태가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다. 반대로 굳이 수술까지 할 필요가 없는 환자들은 적극적으로 수술을 했다.
진료성적표는 도입 취지와는 정반대로 병원과 의사들이 최악의 서비스를 제공하게 했으며 환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일취월장,120-121쪽, 고영성, 신영준, 로크미디어)
펜실베니아주의 사례는 시스템과 개인(병원)의 관계에 대한 좋은 실례라 하겠습니다. 흔히 제도의 문제인가, 또는 사람의 문제인가도 같은 이치라 하겠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완전한 제도(시스템)와 사람은 지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에 판단 기준도 기본적으로 자아에 두기 때문입니다.
보통 보수적 전통인 교단들은 개인 구원에 치중을 하는가 하면 진보적 성향의 교단들은 사회 구원을 주창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합심기도를 말씀하면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