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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후 참 내것을 주신다
누가복음 16장 1-9절까지 일전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해석에서 불의의 재물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어째서 불의의 재물이 되느냐고 공격했다
따라서 이제 10절 이하부터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후에는 참 내것을 주신다" 라는
제목으로 계속 상고하면 불의한 재물이 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지 더욱 확실해 진다.
<눅16:10-3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후략(부자와 나사로의 천국비유)….]
여기서 예수님의 상대적인 말씀에 꼭 주목해야 한다.
<작은 것과 큰 것>, <불의한 남의 것과 참된 너희의 것>, <재물과 하나님, 즉 두주인>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것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
<요한까지의 율법과 하나님나라의 복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렇게 상대적인 말에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아내를 버린자와 버리움받은 자에게 장가든자>는 상대적인 말이긴 해도 둘 다
정죄받는 동일인물을 뜻하며, 예수님은 왜 말미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후술하겠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상대적인 말에 주목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어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대적인 말이 한 자리에서 무려 여섯 갈래나 종횡무진으로
펼쳐져 있으므로
어디서나 어떤 연관성도 두지 말고 자신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부숴야 한다.
여기서 종횡무진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라 상대적인 말씀을 하셨으되
어떤 것은 단순히 이것과 저것의 차이로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어떤 것은
모형이 되는 저 구약제단의 인물과 사건 등을 들어 오늘의 실상인 초림 때와
재림 때를 맞은 우리들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한다고 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제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두 주인, 즉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바리세인들 처럼 사람앞에 인정받고 높임받는 일은 하나님 앞에 미움받는 일이라고
하셨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는데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을 뜻한다.
왜 전자는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고 후자는 참 내것이 되는가?
즉 하나님의 것은 모두 부정적이고 나의 것은 모두 긍정적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자면 창세기 1장 창조기사에서 창조 넷째날에
하나님이 정하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 고 하신 기록 중에
적어도 “사시(四時” 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말씀이 아니고 두개의 말씀이다.
처음 것은 초림 예수님이 비유로 주신 말씀이고 둘째 것은 재림 예수님이
그 비유를 낱낱이 창세부터 해독해 주시는 진리의 새 말씀이다.
이 같은 초림 때와 재림 때에 있는 두 개의 말씀은 실상의 말씀이다.
즉 실상으로 두 개의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실상은 구약제단의 모형에서도 그대로 예언되어져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그에 대한 단 한가지 예를 든다면
처음 성소와 지성소, 이렇게 둘이다.
처음 성소는 말씀을 비유로 주신 초림주의 성소(기성교단)를 뜻하는 예언이고
지성소는 말씀을 해독해 주시는 재림주의 성소(택한자 144000)를 뜻하는 예언이다.
따라서 모형제단 2시대와 실상제단 2시대를 합하면 모두 4시가 된다.
이 같이 사시란 모형에서도 2시요, 실상에서도 그와 동일하게 2시가 되기 때문에
구약제단의 모형을 들어서 예수님은 오늘날 실상인 우리들에 대한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이 세례요한이나 바리세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구약제단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을 비유로 들어서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구약제단 사람들이나 사건들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왜 부정적인 전자가 있고 긍정적인 후자가 있는가 이다.
즉 왜 하나님의 불의한 재물이 있고 참 나의 것이 있는가 이다.
게다가 재물이란 말씀을 뜻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불의하고 나의 것은
참 말씀이라고 했으니 너무나 어폐가 심하여 날벼락 맞을 일이 아닌가?
이에 대한 설명을 함께 풀어나가기로 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는 말씀을 주시기로 하셨다.
처음 말씀은 비유로 주시고 나중 말씀은 그 비유의 말씀을 낱낱이 해독한
진리의 새말씀을 주시기로 하셨다. 따라서 이천년전 초림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 가지고 오신 것이며, 오늘날 재림예수님은 말씀을 해독한 진리의 새말으로
오신다.
이처럼 초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비유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불의한 말씀이며’
오늘날 재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시는 진리의 새 말씀이 참 내것이 된다.
그러면 왜 초림주의 비유의 말씀은 불의한 남의 것이고,
재림주의 새말씀이 참 나의 것이 되는가?
초림주의 말씀은 하나님을 명백히 알려주는 말씀이 아니고 비유이므로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물론 성경을 피상적으로 단순하게 얼핏 보면
즉 비유의 말씀임에도 그 비유를 깨닫고자 고민하지 않고 쉽게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면 초림예수님의 비유의 말씀도 구원이 되는듯 기록을 했다.
하지만 비유라는 전제를 깔고 깊이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비유로 구원인듯 영생인듯 기록을 했으나 그것은 비유의 말씀을 받고도
그 비유를 과연 인간들이 영생의 말씀으로 받는지, 아니면 죄 많은 세리와 창기가
죄인이라고 가슴을 쳤듯이,
우리가 비유의 말씀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라고
애통해 하는지 그 정직성을 달아보시는 시험으로 주신 말씀이었다.
우리의 정식성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시험으로 주신 말씀이므로 실상의 율법이 된다.
율법은 종에게 주시는 말씀이지 자녀에게 구원을 주는 생명의 말씀은 아니다.
이처럼 초림주의 비유의 말씀은 율법이지 구원의 말씀이 아님에도 우리가 얼핏
문자 그대로 성경을 보면 마치 구원과 영생의 말씀처럼 들리도록 시험하는 기록을
했다는 뜻에서 초림주의 하나님의 말씀은 “불의한 말씀” 이 된것이다.
또 불의한 말씀을 “남의 것” 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나의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잠정적인 것이라는 뜻에서다.
즉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지 못 깨닫는지 먼저 시험하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지
그것이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충분조건의 내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남의 것이다. 이같이 불의한 것, 남의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처음의 비유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 후에 주시는 나중 말씀은 어떠하기에 그것이 참 나의 것이 되는가?
처음 것으로 주신 하나님의 비유의 말씀은 그 비유를 깨닫는지 깨닫지 못하는지
시험하는 말씀으로 주셨는데, 이 시험에서 이긴 자는 아무도 없었다.
즉 말씀을 깨닫는 자가 아무도 없이 그저 비유의 말씀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경거망동하는 탐욕의 달콤한 선악과에 모두 취해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단 한사람 깨어 있는 자가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우리의 모형인 구약으로 가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밤새도록 싸워 이긴
야곱이 있었다. 왜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겨야만 했는가?
하나님은 성경을 비유로 주셨으므로, 그 비유의 말씀을 반드시 깨닫기 위해서는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이 깨어서 그 비유의 말씀인 하나님과 싸워 이겨야만 했으며
그는 과연 하나님과 싸워 이겼고 따라서 “이긴 자” 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자!
이는 하나님이 숙제로 주신 하나님의 비유의 말씀을 마침내 꿰뚫어 내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알지 못한 가운데 야곱만이 열려라 참깨! 를 외쳐서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깊이 감추어 놓으신 비밀의 보고를 열어제꼈으니 이것이 인간 승리인 것이며
인간승리이므로 이것이 “인간의 참 내것” 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승리를 거두어 낸 야곱을 축배의 잔을 들어 이렇게 칭찬하셨다.
(이사야 53장 전체가 오늘의 야곱, 즉 재림주에 대한 기록으로서 그가 이 같은
승리를 거두기까지는 그리고 승리를 거둔 후에도 얼마나 무서운 형극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는 가운데, 그 중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단 한 구절만 소개한다)
[사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초림 예수님은 비유의 말씀을 가져오실 때 하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었으나
오늘의 재림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성경의 참 뜻을
꿰뚫어 내었던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장쾌한 인간승리 인가를 하나님도 쾌재를
부르시면서 그가 해독해 낸 성경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는 진정한 구세주임을 인준해 주신 것이다.
야곱은 승리했으며 승리했으므로 마침내 인간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시기 위해
족보도 없이 영원 전부터 계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시는 재림주가 되신다.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나라” 라는 국호를 받았다.
이긴자 야곱이 주는 나의 것으로만 이스라엘나라 백성에게 주는 영생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구상품(초림주의 비유) 하나님의 말씀은 “불의한 것” 일 때,
신상품(해독된 새말씀) 나의 것은 불의하지 않는 “참 나의 것” 이 된다.
이러므로 구상품 불의한 것은
신상품 나의 것 앞에서는 반드시 버리운 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전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 초림주의
비유의 말씀을 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그 발이 아름답다고 노래하고
하나님은 버리겠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예수께서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라는 말씀으로 경고하신 것이다. 간음이란 비진리에 빠짐을 뜻하기 때문에,
전자도, 후자도 모두 그 같이 옳지 않는 비진리에 빠졌다는 뜻에서 간음이다.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누구인가? (첫번째 간음자)
하나님은 처음의 불의한 말씀(초림주의 비유, 첫아내)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셨는데,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그 일을 하지 않고 팽개친 자를 뜻하므로 비진리에 빠진 첫번째 간음자가 된다.
다시 하나님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면 그 후엔 반드시 오늘의 이긴자 야곱에
의해 참 나의 것(해독된 새말씀, 새아내)을 주신다.
그런데 이 때 버리움 받은자(초림주의 비유, 첫아내)에게 장가드는 자가 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서 그 재물이 다 없어지면 ,
즉 초림주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어서 마침이 되면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처소로 영접되는 진리의 새말씀을 주신다고 했었는데, 그는 여전히
오늘의 양식이 아닌 과거의 구양식에 합하여 장가드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과거에 안주하고 있으니, 즉 버리움을 받은자에게
장가들고 있으니 그것이 또한 비진리에 빠진 두번째 간음자 이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어제는 어제의 양식(불의한 말씀, 첫아내)을 먹는게 신실한 것이며 오늘은 오늘의
새양식(참 나의것, 새아내)을 먹는게 신실하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창조란 이같이 붙박이가 아니라 진행형임을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한번 입에 물린 낚시밥은 살고자 하여 절대로 놓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 오히려 비진리에 빠진 간음이며 사망이라는 말씀이다.
눅16장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후 참 내것을 주신다” 는 전체적인 뜻을 이로서 마치며
어제는 어제의 일로 흘려보내고
오늘은 오늘의 참 내것을 받아야 함을 인지하길 바란다
첫댓글 ^0^ 퀴즈와 게시글의 연관성있는 게시! 너무 적절하네요. 소중한글 잘먹겠습니다 운영자님 ~♡
운영자 다니엘님이 이렇게 좋은 글을 또 발췌해서 올려주셨네요? 넘 감사합니다~*^^*
이삭님께서 알려주셔서 올린겁니다. 다 읽어보니 명확해 지네요.
이삭님 감사드려요*^^*
사시 부분이 어렵기도해요
초림,재림때 말씀이 2시이고,
모형제단인 처음성소,지성소가2시가 되서
총 4시라는거죠?
네, 맞아요. 사시는 성경의 대맥입니다
그러한 사시를 알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구원이란 말이 나올 수가 없답니다
사람들이 6일창조에서 넷째날에 나오는 사시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성경은 예수님 한분에 대한 기록인데 예수님은 초림과 재림, 이렇게 2시가 됩니다.
그리고 구약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모형으로만 주어졌기 때문에 합이 4시가 되는 것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