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소식
-박재삼-
아, 그래,
건재약 냄새 유달리 구수하고 그윽하던
한냇가 대실 약방…… 알다 뿐인가
수염 곱게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니,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다고?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팔포 웃동네 모퉁이
혼자 늙으며 술장사하던
사량섬 창권이 고모,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아, 그분 말이라, 바람같이 떴다고?
하기야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 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 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회고적, 서정적
◆ 특성
① 구어체와 대화체(대화의 상대는 없지만 대화를 하듯이)로 시상을 전개해 나감.
② 의문형을 통해 화자의 안타까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③ 고향의 사람에 대해서는 무상감과 아쉬움을, 고향의 자연에 대해서는 반가움을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한냇가 대실 약방, 팔포 웃동네 모퉁이, 수염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 사량섬 창권이
고모 → 지명과 상점명, 그리고 고향의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현실감 있는
묘사를 보여줌.
*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 유한의 존재로서의 사람에 대한 인식
* 대밭, 못물, 섬들
→ 무변성, 무시간성을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공간
고향을 고향이게 하는, 변하지 않는 자연물들이 고향의 표상으로 부각됨.
◆ 화자 : 나(고향 소식을 듣고 있는 이)
◆ 주제 : 고향 소식을 접한 뒤, 인간사의 무상함과 변함없는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받는 위안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고향 소식(1) → 약방 노인
◆ 2연 : 고향 소식(2) → 술장사하던 창권이 고모
◆ 3연 : 고향 소식(3) → 고향 산천(대밭, 못물, 섬들)의 모습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죽음을 다루면서도 일상 속의 대화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인이 던지는 관념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도록 시상을 이끌고 있다. 1연과 2연은 고향소식을 알려주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드러나지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고향 사람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엿들을 수 있는데, 여러 번 되묻는 데에서 죽음을 접한 화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낄 수 있다. 3연은 혼잣말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끝에 가서는 '~따름이라네.'로 종결하여 이 역시 대화의 일부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는 죽음을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체념도 섞여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초연한 태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화자는 죽음에 굴복하여 허무와 무기력에 빠지는 대신에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며 인간과는 달리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대밭', '못물', '섬들' 같은 고향의 자연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죽음에 대한 허무를 자연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박재삼의 '물' 그리고 '고향'
박재삼의 시에서 근원적 공간은 물의 공간과 고향의 공간으로 대표된다. 물의 공간은 존재의 탄생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곳, 죽음과 삶이 동일시되는 곳이다. 바로 근대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공간, 시작과 끝이 분리되지 않은 원초적 공간인 것이다. 고향은 또 다른 시적 자아의 근원적 공간이다. 고향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시적 공간이며 근대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지배받기 이전의 유년의 공간이기도 하다. 유년의 시간이란 언제나 그 자체 속에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 변화하거나 소진하지 않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모순이 고조될수록, 인간이 자연과 순수에서 멀어질수록 자아는 근원적 공간으로서의 고향과, 유년의 순수했던 기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를 내재하게 된다.
[작가소개]
박재삼[ 朴在森 ]
<요약>
박재삼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출생 – 사망 : 1933. 4. 10. ~ 1997. 6. 8.
출생지 : 해외 일본 도쿄
데뷔 : 1953.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
1933년 4월 10일 도쿄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으며,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되고, 1955년 시 「정적」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었으며, 같은 해 시조 「섭리」가 유치환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추천을 완료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과 시 선집을 간행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울밑에 선 봉선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1997년 6월 8일 타계했다. 그의 시 세계는 시 「춘향이 마음」(1956)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59)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는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밤바다에서」 1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란, 삶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는 그 자연에 의지하여 위로와 지혜를 얻지만, 때로는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박재삼의 시는 1950년대의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학력사항> 고려대학교 - 국어국문학(중퇴)
<경력사항>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
<수상내역>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작품목록>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춘향이 마음, 수정가, 한, 햇빛 속에서, 소곡
정릉 살면서, 천년의 바람,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거기 누가 부르는가, 아득하면 되리라, 간절한 소망, 내 사랑은[시조집]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가을 바다,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 박재삼 시집,
사랑, 그리움 그리고 블루편, 사랑이여, 가을바다, 기러기 마음을 나는 안다[편],
햇볕에 실린 곡조, 해와 달의 궤적,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나는 아직도, 다시 그리움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박재삼 시선집
[네이버 지식백과] 박재삼 [朴在森]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