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5월 5일 계묘 3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제주 목사 이희태가 해적의 소탕에 대한 일을 치계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희태(李喜泰)가 치계(馳啓)하기를,
"전(前) 목사(牧使) 이형상(李衡祥)이 투채인(偸採人)141) 을 엄금(嚴禁)하는 일로 계문(啓聞)하였는데, 근래에 비선(飛船)142) 이 바다 위에 널려 있으면서 중류(中流)에 돛을 내리고 있는데, 그 숫자가 50여 척이나 되도록 많으며, 그 형상을 보건대 투채선(偸採船)은 아니고 반드시 해적(海賊)입니다. 밤에는 해안(海岸)에 와 쉬면서 육지에 내려와 공사(公私)의 우마(牛馬)를 도살(盜殺)하고, 낮에는 다시 배 위에 모여 바다 가운데로 물러가는데, 뒤좇아 잡으려는 배가 혹 앞으로 가까이 가면 도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몇 겹으로 포위하여 시석(矢石)을 비오듯 쏘아대어 크게 다친 채 돌아오게 됩니다. 만약 군인(軍人)을 많이 내어 곧바로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그 형세로 보아 물러날 이치가 만무하고, 앞으로도 크게 염려할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비록 육지(陸地)의 포구(浦口) 사람이지만, 금령(禁令)을 무시(無視)하고 해적질을 하니, 뒤좇아 살포(殺捕)하여도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한다 생각하면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지방관(地方官) 및 각진(各鎭)의 조방장(助防將)에게 엄히 신칙(申飭)을 더하여, 병기(兵器)를 지니고 기필코 뒤좇아 붙잡되, 만일 사로잡거든 계문(啓聞)하는 한편 섬 가운데에서 효시(梟示)하게 하고, 지방관들이 혹시라도 뒤좇아 잡는 데에 힘쓰지 않으면, 무겁게 죄를 주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보고 크게 놀라며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비선(飛船)의 형상이 매우 수상하니, 이 장계(狀啓)를 급히 비국(備局)에 내려 즉시 품처(稟處)하게 하라. 또 변방의 보고가 얼마나 긴중(緊重)한데, 단지 배의 척수만 말하고 선박이 와서 정박한 날짜는 말하지 않고, 범연히 근래에라고만 일컬었다. 이미 뒤좇아 잡으려는 배가 있으면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을 혹 미루어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매우 모호(糢糊)하다. 이희태(李喜泰)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또 승지(承旨)는 밀갑(密匣)으로 봉입(封入)하지 않았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대신(大臣) 이하가 밤에 비국에 모여 의논하여 아뢰기를,
"신(臣) 이여(李畬)와 여러 당상(堂上)이 이희태의 장계를 열어보았는데, 이른바 해상(海上)에 널려 있는 것을 단지 ‘50여 척이나 되도록 많다.’라고만 말하면서 배의 제도(制度)와 복색(服色)이 어떠한지는 말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와서 정박한 시일(時日) 및 인원수의 많고 적음도 말하지 않아서 모호함이 심합니다. 만약 이국(異國) 사람이라면 시석(矢石)을 서로 쏘는 즈음에 알지 못할 이치가 없는데, 바로 우리 나라 포구 백성으로 의심했습니다. 또 이 장계를 봉진(封進)한 것이 3월 3일이었는데, 같은 달 25일에 죄인(罪人)을 옮기자고 계청(啓請)하였고, 4월 5일에는 비국(備局)에 요망(瞭望)해도 무사(無事)하다는 보고의 글이 연달아 이르렀는데, 이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보건대, 염려할 일은 없을 듯하나, 이미 선척의 숫자가 많다고 하였고, 또 시석(矢石)에 사람이 다쳤다 말했으니 무기로 싸우는 일은 당연합니다. 생포(生捕)한 자에 이르러서는 본목(本牧)143) 에 엄히 가두고, 그 근각(根脚)과 정절(情節)을 따져 물어 계문한 후에 효시(梟示)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방관들로 붙잡는 데 부지런하지 않는 자는 그 경중(輕重)에 따라 처단하고, 이로부터 목사(牧使)의 직권임을 정식(定式)할 필요는 없으니, 이렇게 회이(回移)하고, 또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자세히 염탐하여 속히 계문하라는 일로써 별도로 금군(禁軍)을 정해 말[馬]을 주어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신이 다시 아뢰기를,
"이희태(李喜泰)는 일처리가 전도(顚倒)되고 장문(狀聞)한 바가 몽롱하여, 그대로 중요한 해방(海防)의 자리에 있게 할 수가 없으니, 그의 관직을 삭탈하게 하소서. 대개 바닷가 포구의 백성들로서 제주의 외양(外洋)에서 전복(全鰒)을 따는 자들은 으레 도회관(都會官)의 공문(公文)을 받는데, 간사한 백성들은 세금 내는 것을 싫어하여 사사로이 제주(濟州)에 들어가 채취하므로, 사람을 시켜서 금하지만 배가 빠르고 사람이 많아 힘으로 당하지 못하며, 혹은 의복(衣服)을 약탈하고 혹은 몰래 죽여서 말을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형상(李衡祥)이 일찍이 사사로이 채취하는 무리를 엄금하자고 청하였고, 이희태의 장계(狀啓)도 역시 이 일을 말한 것인데, 그 말이 경보(警報)처럼 되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해적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상하가 놀랐으나, 재계(再啓)가 들어옴에 미쳐 모두 무사하였습니다."
하였다.
[註 141]투채인(偸採人) : 수산물 등을 몰래 채취하는 사람.
[註 142]비선(飛船) : 빨리 달리는 배.
[註 143]본목(本牧) : 제주목(濟州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