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 사람들은 그 당시 다른 종교 집단과 달리 죽은 이들의 부활이나 천사, 영의 존재를 부인하던 사람들입니다(사도 23,8). 사실 사두가이처럼 현대인들에게도 부활의 의미가 살아가는 데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본래 유다인들은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이 있었지만,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기 때문에 사두가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두가이 사람들은 후손에 관한 규정을 언급하고 있는 신명기 25장 5절에 근거해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5장 5절에서는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께 질문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 20,29-33). 사실 신명기 25장 5절에 언급된 율법 규정은 아내를 한 인격을 지닌 사랑의 존재로 보지 않고 일종의 소유물로 바라보았던 부정적 시각에서 그 여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사두가이 사람들은 그런 의도는 무시한 채 허구적 이야기를 갖고 부활에 관해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일곱 아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와 일곱 명의 남편을 둔 아내에 관한 사두가이 이야기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마카 7,22-23).
현재적 삶만을 지향하고 사는가 아니면 미래를 향한 삶을 지향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 부활 신앙의 뿌리라면, 살아계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죽음을 딛고 나아가는 것은 바로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 여정이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부활이 가져 올 영원한 행복은 단순히 세상적 기쁨과 행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형제, 부부와 같은 세상적 유대가 잊히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적 단계로 도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은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부활은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질적으로 완전히 또 다른 삶인 것입니다. 부활은 살아계신 주님이 주시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는 사랑과 행복의 바다에 잠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이미 오래 전에 땅에 묻혔지만 '살아계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현존하시기에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계신 주님이 어디에 현존하시는지 찾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 중에 받았던 위로의 순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어둠의 시간에 체험한 은총의 빛, 주님이 주신 이런 행복의 순간을 기억해야 하고 이것이 삶의 뿌리가 돼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체험하는 곳, 바로 그 곳에서 우리의 삶과 부활 신앙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2테살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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