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은 선물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사상이다.
여러분에게는 이 사상이 논란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이 서론을 건너뛰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좋다. 그러나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이 선물이라는 것을 믿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선물은 좋은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권력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워한다. 얼마 전에 지혜롭고 통찰력이 뛰어나서 내가 매우 존경하는 여성과 같이 어느 모임에 패널로 참석한 적이 있다. 토론 중에 권력이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그녀는 별로 내켜하지 않으며 말했다. “권력이 현실이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권력을 억제하고, 권력이 초래하는 피해를 제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권력이란 언제나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성은 대학 교수라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용의주도하게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선물에는 주는 이가 필요하다. 우리가 권력을 주시는 분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길을 찾지 않으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무질서하고 파괴적이어서 우상숭배나 불의를 낳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은 권력을, 사도 바울이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육신을 따라”(from a worldly point of view) 생각한다. 권력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세속적인 것이지만 단지 세상의 관점으로만 권력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권력이 주는 약속을 놓치고 권력의 위험에 대해서도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진정으로 권력이 주는 선물과 위험 모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기독교 이야기의 맥락 속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진정한 시작과 종말에 대한, 그 이야기의 과감한 주장들과 함께.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가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권력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하고 있으며 그 많은 이야기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름을 발견할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아예 권력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수 있고, 때로는 권력에 대해 생각하기를 피하려고 기독교 이야기에서 빌려 온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한 친구가 교인이 수천 명인 대형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주의권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는 한 목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담임목사 역할에 따르는 권력을 어떻게 다루십니까?”라고 내 친구가 물었다. “아, 우리 교회에서는 권력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섬기는 지도자들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 대답이 진실하다고 믿고 섬김의 리더십에 대한 그 지도자의 헌신이 진정성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있던 방에 그 목사가 들어오는 것을 몇 번 경험했는데 그때마다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누가 갑자기 난방을 끄거나 배경 음악을 끈 것처럼 말이다. 그는 진정으로 섬기는 지도자였겠지만 또한 그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권력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좀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가까운 유의어들을 다양하게 차용한다. 그래서 리더십, 영향력 혹은 권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들은 모두 권력을 나타내는 중요하고 유용한 형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가려 버릴 수 있다.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가장 정확한 표현은 권력이다.
더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먼저, 거의 권력 이야기만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하겠다. 지난 세대에 학문의 영역, 특히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제도에 작용하는 권력의 역학에 새롭게 주목하면서 형성되다시피 했다. 최근에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아마 가장 깊게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향을 받아, 인문학 전 분야가 인간 활동에 숨어 있는 권력을 찾아내는 것을 중심으로 위치를 재정비했다.
나는 권력이 어디에나 있다는 푸코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방법을 개략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권력에 대한 학문적 매력의 밑바탕에는 대부분, 권력이 본질적으로 강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하다. 권력이 창조적이고 생명을 주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사실은 폭력적인 주먹을 창조적인 장갑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권력의 가장 깊이 있는 형태가 창조이고, 권력이 강요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의 본래 의도된 바에 대한 축소와 왜곡이라고 믿는다. 폭력은 그저 잘 위장한 강압일 뿐인 창조가 아니라, 창조가 잘못된 곳에 놓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렸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결과인 것이다.
나는 푸코만큼 깊이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어떤 전문 분야에 속한 학자도 아니다. 나는 저널리스트이며 저널리스트로서 내 과업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복잡한 사물들을 분명하게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깊은 성찰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던 다른 책들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존 밀뱅크(John Milbank)가 쓴 지독히 어려운 책인 <신학과 사회이론>(Teology and Social Theory, 새물결플러스) 같은 책 말이다.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의 평생의 과업들, 특히 <부활과 도덕적 질서>(Resurrection and Moral Order)와 <열방의 욕망>(The Desire of the Nations) 같은 책은 권력을 창조적인 사랑으로 보려는 입장을 가진 정치적 함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더 오래전에 내게 다른 차원의 영향을 주었던 책은 매릴린 프렌치(Marilyn French)가 쓴, 페미스트 관점의 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권력 너머에>(Beyond Power)다. 이 책은 철없던 한 남자 대학생에게 권력과 성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지만 또한 저자가 바라는 방식으로 ‘권력 너머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불만도 촉발시켰다. 내가 진지하게 이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을 때 재닛 해그버그(Janet Hagberg)의 지혜롭고도 실제적인 책인 <진정한 권력>(Real Power)이 프렌치의 책보다는 훨씬 더 도움이 되었다. 이 모든 영향들에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받은 영향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니체 이래의(아니면 밀뱅크가 말하듯이 막스 베버를 거쳐 고대 그리스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서구 지적 전통이 권력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지 않은가? 다른 길이 있지는 않을까? 만일 복음이 진정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이라면 복음은 권력에 대해서도 기쁜 소식일 수는 없을까?”
우리는 권력에 대해 어느 책 한 권이 제시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독교적이고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이 그저 우리에게,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그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하도록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새로운 방식이란 복음의 기쁜 소식과 홀로 선하신 분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책은 4부로 나뉜다. 각 부는 성경 연구로 마무리되는데 창세기, 요한복음, 빌레몬서, 요한계시록의 성경 본문에서 권력이라는 주제를 살펴본다. 성경은 놀라운 책이다. 어떤 진지한 질문을 품고 성경을 읽으며 귀를 기울이든지 간에, 우리는 성경 증인들의 이야기와 시, 기도, 탄식, 예언 속에서 그 질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풍부한 질감의, 여전히 도전적인 방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성서신학’을 다루는 책은 이 책과는 달리 더 두꺼워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성경 본문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마치 지질학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지층에 탐사구를 굴착하듯, 우리가 권력에 대한 상상을 형성하기 위해 성경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얼마나 풍요로운 보화들이 그 안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1부는 권력이 선물이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아무리 죄에 의해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해도 선물은 선물이다. 권력은 창조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무로부터 불러내신 부르심 속에, 이 놀라운 세상의 열매 맺고 번성하는 풍요로움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image bearing), 곧 인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우주의 창조주를 대표하는 독특한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거짓 형상들에 대한 언급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권력이 어떻게 잘못되어 갔는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창조력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잘못 사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만질 수 있는 대체물의 형상으로, 즉 폄하와 실망밖에 주지 못하는 거짓 신들로 바꾸어 버렸다. 형상을 지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을 오용하고 거부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불의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의 이 두 가지 왜곡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권력이라는 선물에서 무엇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잘못됐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다. 하나님의 형상을 진정으로 지니신 분이 오실 때에야 우리는 우리의 우상숭배와 불의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장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지 보기 시작한다.
2부는 우상숭배와 불의가 우리가 권력을 사용하는 데 어떻게 교묘하게 숨어드는지, 매우 구체적인 방식들에 대한 것으로, 우리가 거짓 신 행세를 하도록 유혹받는 방식들이기도 하다. 선악과를 먹은 후 동산의 남자와 여자의 경우를 보면, 심히 좋았던 창조세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던 권력이 이제 숨어서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우리 발밑 땅속으로 내려가서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를 잘못된 꿈, 어리석고 무모한 길로 유혹한다. 권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강압과 폭력의 형태를 취한다. 강압과 폭력은 권력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면서도 가장 심한 왜곡의 형태다. 그러나 여기서조차 우리는 더 나은 길을 가늠해 볼 수있다.
3부에서 우리는 권력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제도의 형태로 매개되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오늘날 제도권에 대한 반감이 확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기존 제도들에 대한, 그리고 제도권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다. 수상이든지 회사 사장이든지 교황이든지 말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살펴보면 제도 그 자체는 인간의 번영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 형상을 지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선물이다. 제도들은 권력이라는 선물을 진정으로 깊이 있게 표현하기 때문에 한번 잘못되면 가장 눈에 띄고 두려운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미약한 인간의 실존을 뛰어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되어 하늘의 궁창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는 영적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제도들에도 기쁜 소식이 되며 우리에게 제도를 길들이고 제도를 번영하게 하는 역할을 주신다.
마지막으로 많은 선물을 지녔지만 또한 우리를 여러 방식으로 장악하는 이 권력을 어떻게 다시 궁극적으로 모든 무릎이 꿇게 되는 그분의 주권 아래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권력을 지닌 사람들(바로 우리들!)이 자기 자리를 감당하는 훈련을 통해서다. 고전적인 영성 훈련을 설거지와 같은 작은 훈련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은혜 앞에 열려 있게 한다. 그 훈련들은 우리를 진정한 권력의 생명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영광의 무게를 진정으로 감당하도록 만들 수 있다. 권력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권력을 바람직한 목적 앞에 데려가는 안식과 예배의 실천을 통해서다.
왜 권력이 선물인가? 권력은 번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잘 사용되면 사람들과 온 우주가 본래 의도된 모습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번영은 권력이 바르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시험대다. 책을 쓰는 것도 모든 창조의 행위가 그러하듯이 위험과 불확실성을 지닌 창조적 권력의 행위다. 책을 읽는 것도 시간과 관심과 희망과 사랑을 투자하는, 또는 손실 위험을 감내하는, 창조적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책을 손에 들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책을 내려놓을 때에는 여러분이 지음 받은 목적인 번영에 한 걸음 더 다가서 있기를, 그리고 온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함께 세상을 변화시켜서 이 우주가 덜 신음하고 더 노래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