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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최근 역개루에 제1공화국에 대해서 알져지지 않는 사실을 쓰고 있다.
제1공화국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많아서 그런지 생소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
그 중에 어떤 회원이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할 경우에 대한 가성질문이나,이승만의 북진의 공이 있다는 논리의 댓글을 달았는데,필자의 답은 "유엔군 사령부가 쿠데타를 사주했을 것이다"는 답변이었다.
갑자기 왠 쿠데타이냐고,바로 거기에 유엔군사령부에 속한 강대국들의 답이 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다들 알 정도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었고,낙동강 전선,인천상륙작전,38선 돌파등 대략적인 역사를 알기때문에 별로 설명하지 않겠다.하지만 38선 북진후 이북관할지역에 대한 관리차이는 우리가 모르는 몇가지 상당한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
한국정부는 38선 북진이후에 한국군의 점령지를 바탕으로,내무부 장관(조병옥)의 포고령대로 북한점령지구의 관할은 한국정부의 내무부 관할이라는 내용을 말했다.이것은 잘 아는 내용일 것이다.그러나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의 입장은 남한같은 경우는 유엔에서 한국정부를 승인할때 한반도의 남부의 8도를 통치권만 인정했다는게 주 내용이다.그렇기 때문에 유엔군의 산하에 북한민사처를 설치하여 실제로 평안도 도지사에 김성주(서북청년단 소속)를 임명하는등 한국의 북한 점령관할을 인정하지 않았다.이 이야기는 한국이 통일이후에 북한의 관할권을 행사할수 없다는 떡밥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왜 미국과 유엔은 한국의 북한관할을 반대했을까?
어후.........
이 이야기에 앞서서 일단 한숨부터 쉬자.
진실은 정말 냉정하고,현실을 바탕으로 역사학의 모순을 가져온다.
민족적인 관점에서 한국정부의 북한 점령지 관할을 피가 끊는 주권침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1950년 9월30일 미국 국무성은 38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한국정부의 북한5도 관할권을 인정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다.놀랍게도 이것은 맥아더 사령부의 결론과도 일치하다.
그 이유는 미국,영국,프랑스가 한국정부의 부패,허약함,그리고 최선의 이유로는 한국정부가 의도적으로 광범위한 테러를 유도할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즉 북한 점령지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론이다.)
1950년 8월-12월까지 한국정부의 보도연맹,부역자학살의 여자,아이들의 학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한 아직도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3의 강대국이던 영국 외무부의 적극적인 주도아래 유엔의 북한관리 방침이 정해진 것이다.
맥아더 사령부도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문서(NSC81-1)에 의거하여 국제법에 부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관료와 주민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라"는 문서에 따라 한국정부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의 우려
미국 국무부의 북한통치계획은 국제연합이 북한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가져야 되면 남한은 기존의 8도의 통치권을 가지고 북한의 새로운 선거를 통해서 통일을 이루어야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이것은 민주주의 생활양식을 당시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정부의 국가보안법을 기초로 한 테러의 촉발을 우려한 것이었다.미 국무부는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북한체제를 공감하거나 지지하는 행위를 조금만 하더라도 강력히 처벌하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이 대량학살과 테러를 동반할수 있다고 우려했다.(실제로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1949년 10만명의 조사자 구속3만5천명의 투옥 2만5천이상의 이상 사태를 초래했다.)
이승만의 인터뷰 전문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다룰수 있소.빨갱이들은 총을 숨기고 군복을 불태울 수 있겠지만,우리는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소.불도저로 커다란 구덩이와 참호를 파고 그 안에 공산주의자들을 채울 것이오.그 다음에 덮어버릴 거요.그들은 정말로 땅속에 있게 될거요."
미 국무부 관료들은 이승만 행정부의 북한 통치는 "대량학살과 대량테러"를 동반하는 것이라고 유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미 국무부의 이러한 결론은 1950년 10월-11월 북진하던 한국군의 점령지에서 유엔군 사령부에 보고된 한국민정경찰(우익청년단)의 약탈,학살,테러등의 행위가 적발되면서 현실화 된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38선 북진이전에 이북출신 경찰관 2000명을 선발대로 보냈고,일민주의로 유명한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우익청년단체에게 38선 너머에서 "사상교육"을 실시하라고 하였다.
이시기 구월산 유격대등,북한지역 유격대의 실상을 보면 학살,약탈의 남한의 부역자학살이 확대된 조치로 이어진다.
영국정부의 분노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한 영국은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하고 있다는 영국군 정보부의 판단에 따라서 영국 외무부는 한국전쟁은 "인간의 정신을 위한 전쟁"이라면서 미국에 정식적인 항의를 하게된다.
주미 영국대사 올리버 프랭크스와 10월30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의 회담에서 딘 러스크는 영국정부의 정보가 사실이면 "남한당국이 저지른 잔학행위의 사례가 안타깝게도 여러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이후 북한 점령지 관할에 대한 미국 장교들의 권한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확인한다.
그러나 영국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1950년 12월 홍제리 사건으로 영국정부와,군을 격분시키면서 1951년 1월을 영국 노동당의 이승만 대통령 전범 재판회부안까지 나오게 된다.(이에 대응으로 이승만 행정부의 반영감정이 커진다)
또 이 사건은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무초대사의 부재중 라이트너 미국대리대사와 영국대사관의 이승만 제거쿠데타기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시기 세계여론은 제2차세계대전의 휴으증으로 대량학살인 제노사이드에 대해서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의 민간인 대량학살은 정보의 통제가 되지 않았을 경우 이승만 행정부의 존폐를 가져올 일이었다)
미국 국무부와 미군의 대립,무초의 비호
이처럼 미국은 내부문서를 통해서 북한점령지구에 대한 남한당국의 통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지만,실상은 이승만 행정부를 통제하지 못했다.왜 그럴까.이시기 미 국방부는 이승만을 옹호했기 때문이다.또 주한 미대사인 무초가 이승만을 비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문제이다.더구나 제2차대전시기부터 반공을 표방해온 미국방부의 성향상 이승만 대통령은 완벽한 반공지도자였다.
실제로 미10군단 정보처는 정보장교,방첩대 요원들에게 북한의 노동당원들을 체포하고,경찰,보안기관요원,전혁직 관료들을 모두 체포 구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그기로 이들의 처리는 한국군과 민정경찰에 넘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1950년 10월 미10군단 정보처는 클라크 러프너 소장에게 한국군에 실질적인 암살과 학살을 전담하는 부대를 만들자고 건의하고 있다.미군은 "우리들은 포로를 처형할수 없지만 한국군은 할수 있다"는 식으로 포로를 넘겨주고 있다는 문서가 발견된다.
미군은 북한에 모든권력요소를 위협으로 보았으면 그것을 파괴하는 역할에 한국군을 동원한것으로 보인다.
또 주한 미 대사 무초대사의 비호도 있었다.무초 대사는 이승만대통령의 행위를 사실상 비호했고,이승만 대통령은 사형선고는 합법적으로 이루어 졌고,적절한 법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무초대사는 10월20일까지의 학살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다만 전시중에 이승만대통령을 교체할수 없기에 행동을 취한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군의 태도가 달라진다.
한국군이 점령한 지구에서 무정부와 약탈사태가 이루어지자,미군 군사고문단은 북한에 모든 점령지구에 한국군의 출입을 금할수 있다는 경고와 더불어서 평안남도 순천의 한국군 부대를 미군 1기병사단 병력으로 교체하였다.(문서에 의하면 금지한 약탈이 문제였다)
실제로 이후부터 무초대사와,맥아더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치범 사면과 학살행위의 중지를 문서로 계속 보내게 된다.
(1951년 1월 학살조사단의 입국까지 발생하자 부역자 사면령이 발표된다)
미군문서는 우익청년단의 학살이 심한곳은 황해도 신천으로 잡고 있다.
북한이 말한 35000명의 학살이 과장된것이라고 해도 미군의 태도가 바뀐것은 신천에서 벌어진 우익청년단의 학살때문인것은 분명하다.황해도 신천의 한리에서 발생한 이 학살은 적어도 그 지역의 남자구성원 전체를 학살한것으로 밝혀져 있고,맥아더 사령부는 기존에 있던 북한경찰조직을 이용하여 통치하는 미국무부의 지침을 활용할것으로 검토하고 있다.
실제로 1950년 12월 남한경찰과 청년단은 평양 후퇴시 최소800명을 처형한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다만 혐의자의 유형은 남한 민간인학살과 동일하다고 보고있다)
미국무부는 북한정권이 북한빈농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남한정부의 잔흑성때문에 기존정권의 지지가 올라가고 있다고 보고있다.
이 북한통치의 휴으증은 지대했다.
실제로 중공의 침략이후에 국방부는 국민방위군을 창설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에서 수만명의 젊은이를 남하시킨것은 좋은데,50만명을 징병하여 최대 9만명을 희생시킨 국민방위군 사건을 발생시켰고,1951년 2월에 벌어진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현리전투의 패배는 미국을 한국전쟁 와중에 한국정책에 대한 순위를 바뀌게 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함과 미숙,부패,행정 무능,폭압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현리전투이후에 전쟁에 주축이고 유엔군사령부의 존중을 받아오던 육군본부를 후방행정업무로 빼버리고 한국군을 직접 지휘통제하기로 한다.후방 게릴라도 경찰을 주축으로 하는 범위에서 정규사단을 투입한 체제로 전환시키고,병사후방지원업무를 미군이 직접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과 육군총참모장 군사령관,군단장 임명시에 미군사고문단의 자문을 구하게 한다.이처럼 이승만 행정부의 북한통치 실패는 한국군의 미국예속화를 촉진시키게 되고,1952년 부산정치 파동당시에 미국과 영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래디 플랜으로 발전한다.한국군의 미국의 직접관리는 훗날 한국군이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된다.
[출처] 한국전쟁 중 한국정부가 주장한 이북5도 관할권에 대한 유엔군 사령부 견해 (『역개루』 네이버 역사 커뮤니티) | 작성자 늑대
첫댓글 1951년 1월 학살조사단의 입국까지 발생하자 부역자 사면령이 발표된다/
예전에 SBS에서 방영된 어느 드라마 게시판에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빨갱이들 안 죽이고 사면시켜줬는데 왜 드라마에서는 다 죽이는 걸로 나왔냐는 댓글이 달려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빨갱이는 악마니까 다 죽이라는 소리를 입고 달고 살던 반공 우파들이 그 빨갱이들을 사면을 시켜줘? 헌데 저 위의 본문을 읽고 이해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마구 학살해서 그게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되어 학살을 조사하러 조사단이 들어오니까, 안 들키려고 부역자들을 다 사면시켜 주었던 거구나...
미국무부는 북한정권이 북한빈농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남한정부의 잔흑성때문에 기존정권의 지지가 올라가고 있다고 보고있다./
아니, 설마 미국무부가 종북좌파였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