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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방(明禮坊)
조선시대 초기부터 있던 한성부 남부 11방 중의 하나로서, 방 안에는 동현계의 동현동・사정동・박궁동・조동, 명동계의 명동, 장악원계의 장악원동, 소룡동계의 소룡동, 대룡동계의 대룡동, 남산동계의 남산동, 종현계의 종현동, 저동계의 저동이 있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대문로1・2가・을지로2가 ・명동1・2가・충무로1・2가・회현동2・3가・장교동・저동1가 각 일부와 남산동1・2・3가 각 일원에 해당한다.
명륜동(明倫洞)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동.
응봉 남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의 혜화동, 서쪽의 가회동·와룡동, 남쪽의 연건동, 북쪽의 성북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조선시대 유학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의 맥을 이어 온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정동인 명륜동은 행정동인 명륜동1~4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륜3가동은 명륜동3가와 와룡동1번지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명륜동1, 2, 4가의 행정은 혜화동사무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면적 0.41㎢, 인구 6741명(2008)이다.
명륜동3가는 조선시대 초에는 한성부 동부 숭교방(崇敎坊)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숭삼동(崇三洞)에 속하였고,
-1936년에 명륜정(明倫町) 3정목(丁目)으로 되었다.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명륜동 3가로 바뀌었다.
명륜3가동의 대부분 면적은 성균관대학교가 차지하고 있으며, 대학 서쪽에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에 있는 성균관은 공자를 숭배하고 유교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문화재로는 문묘(文廟:보물 141)와 서울 문묘 일원(사적 143)이 있는데,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건립된 것이다.
그 밖에 명륜동 51번지에는 관동에 사는 백성들이 제사지내던 장소인 관성묘(關聖廟)(서울민속자료 1)가 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 왼쪽의 비각 안에는 1742년(영조 18)에 건립된 탕평비(蕩平碑)가 있는데, 군자의 도를 익히게 하고 성균관 유생들을 훈계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1가 2-24번지에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집터가 있고 암벽에 그가 직접 쓴 '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글자가 남아 있다. 15번지에는 김종옥가(金鍾玉家)가 있다. 178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문묘의 부속건물로 추정된다.
명륜동(明倫洞)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법정동.
동래구의 중앙 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동래구 명장동·복산동, 서쪽은 온천동, 남쪽은 수민동, 북쪽은 금정구와 접해 있다. 명륜동의 동쪽은 마안산[146m]과 접하여 동래읍성지의 서부 산기슭에 해당한다. 서쪽에는 온천천이 흐르며 주거지는 하천 유역에 발달해 있다.
명륜동은 조선시대 후기에는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고,
-1906년에 신향교동(新鄕校洞)·객달동(客達洞)·범어동(凡魚洞)의 3개 마을을 합하여 교동(校洞)이라고 하였다.
-1910년 부산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이 되었고,
-1942년에 부산부 동래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동래출장소 명륜정(明倫町)으로 바뀌었고,
-8·15 광복 후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다.
-1957년 구제(區制)가 시행되면서 동래구 명륜동이 되었다가,
-1963년 부산직할시 동래구 명륜동이 되었고,
-1979년 인구 증가로 명륜 1·2동으로 분동되었다. 명륜 1동은 향교 일대이며, 명륜 2동은 이의 북쪽에 해당한다.
-1995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명륜동은 행정동인 명륜1·2동으로 나뉘어 있다가
-2011.3.1자로 명륜동으로 합동되었다.
명륜동(明倫洞)의 지명은 동래 향교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동래 향교는 1392년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의 교육 진흥책에 따라 각 지방에 향교를 세울 때 지금의 동래고등학교 주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 향교는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함락과 함께 불타 버렸고, 1605년 다시 세워진 후 여러 차례 옮겨졌다가 1813년 현재의 자리인 명륜초등학교 옆으로 옮겨졌다.
옛지명으로는 자연 마을인 교리(校里) 마을·못안골·대낫드리·시싯골·화장골·삼성대(三姓臺) 마을·대라 마을·시실 마을 등이 있다. 교리는 향교 부근에 있는 마을이며, 못안골은 지금의 명륜2동사무소 뒤쪽 추계(秋溪) 추씨(秋氏) 제실이 있는 부근으로, 못 안쪽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낫드리는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로서, 옛날 동래부사가 신임해 오거나 전임되어 갈 때 이곳에서 환영식, 환송식을 거행하였는데, 행렬이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고 하던 것이 '큰'이 '대'로 바뀌어 대낫드리(대나들이)로 되었다. 삼성대는 송(宋), 안(安), 옥(玉) 씨의 시조가 거주한 땅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공기관으로는 동래구보건소·동래세무서·동래전화국·동래우체국 등이 있고, 동부시외버스터미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동래향교(東萊鄕校:부산유형문화재 6)가 있는데, 조선시대 국립 지방 교육기관으로, 교육시설 규모와 양식 및 조선시대 건물 양식을 알아보는 좋은 자료이며, 부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이다.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부산기념물 5)는 명륜동·칠산동·안락동·복산동·명장동에 걸쳐 있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축성된 것으로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행정동은 명륜동이다. 면적은 1.35㎢이며, 인구는 9,301가구에 총 2만 5,114명으로 남자가 1만 2,211명, 여자가 1만 2,903명이다(2019년 12월 현재).
관내에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인 향교와 함께 동래읍성지가 있으며, 마안산으로부터 서부 산지 능선을 따라 성곽이 남아 있다.
서쪽에 온천천을 따라 도시 철도 1호선과 중앙 대로가 지나며, 도시 철도 1호선 역인 명륜역과 동래역이 있다. 온천천 일대는 정비되어 시민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교육 시설로는 동래 향교·동래중학교·명륜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동래 문화 회관도 있다.
명륜동(明倫洞)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법정동. 행정은 안성1동이 관할한다.
통일신라 때는 한주·백성군, 고려시대에는 안성현·수주에 속하였다.
-1413년(태종 13)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된 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안성군 읍내면 관할이 되었다.
-1931년 안성면 관할을 거쳐,
-1937년 안성읍 관할이 되었다.
-1998년 안성군이 도농복합형 안성시로 승격하면서 행정동인 안성1동의 법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부터 향교가 있었던 곳으로, 유생들이 이 곳에서 명륜을 강독하였다 하여 명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향교골이라고도 한다. 북쪽으로 38번국도가 지나고, 동쪽으로 325번 지방도가 지난다. 전통 사찰인 영령사·약수사·봉덕사·법계사가 있고, 문화유적으로 안성향교(경기문화재자료 27)가 있다.
명륜동(明倫洞)
강원도 원주시 중앙에 있는 동.
원주 시가지의 서남쪽 분지로, 북쪽은 원동, 남쪽은 개운동, 동쪽은 인동, 서쪽은 무실동에 인접하고, 영서지방과 중남부 지역의 교통 요충지가 된다.
원주군 본부면(원주면) 상동리(上洞里)의 지역으로서 원주향교가 있으므로 향교골·향교말·교촌·생교말이라고 하였는데, '여지도서'에 명륜동의 각 리의 위치와 호구수, 인구수가 수록되어 있다. 명륜동은 이 가운데 상동리에 해당한다. 상동리에는 원주향교가 있어서 향교골 · 향교말 · 교촌 · 생교말이라고 하였다.
-1937년1938년에 원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상동리 일부를 갈라서 남산(일산동) 밑이 되므로 일본식 이름으로 남산정(南山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에 일제 잔재 일본식 지명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원주향교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명륜동이라고 하였다. 1946년 정(町)을 동(洞)으로 개정하여 원주읍 개운동이 되었다가, 1955년 원주가 시로 승격되면서 개운동에서 명륜동으로 분리 설치되었다.
-1990년에 원동·단구동의 각 일부 지역이 편입되고,
-1992년에 다시 원동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으며,
-1993년에 일부 지역을 떼어 원동으로 편입하고,
-1995년에 명륜1동 · 명륜2동으로 분동되고,
-1995년 11월에 개운동의 일부지역이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인 명륜동은 행정동인 명륜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1.84㎢, 인구 3만 384명(2001)이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은 편이며, 번화가는 동부를 관통하는 남원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원주교육지원청·원주소방서·서원파출소·원주환경청· 원주시농촌지도소·원주기상대 등 공공기관과 상수도 제1배수지가 있다.
문화재인 명륜동 255번지에 있는 원주향교(강원문화재자료 98)는 1402년(태종 2) 원주목사 신호(申浩)가 중건하고 감사 유사눌(柳思訥)이 기문을 지었고, 그 뒤 목사 민정(閔貞)이 재단을 만들어 향교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선조 36)에 유생인 이탁(李 )이 대성전을, 1608년(선조 41)에 목사 임취정(任就正)이 명륜당·동서재를 중창하고 그뒤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6·25 전쟁 때 여러 건물이 불에 타고 헐어져 중건하였으나 대성전·명륜당은 옛 건물을 보수한 것이다.
명륜동(明倫洞)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는 동.
원래 목포부 부내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동(竹洞)·남교동(南橋洞)·신창동(新昌洞)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일본식 지명인 대정정(大正町)이 되었다.
-1948년 4월 일제 잔재 청산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개편할 때 명륜동이 되었으며,
-1949년 목포부의 목포시 개칭에 따라 목포시 명륜동이 되었고,
-1949년 호남동회(湖南洞會) 관할이 되었다. 이 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무안동(務安洞) 관할하에 있다.
공공기관으로 목포시교육청과 한국은행 목포지점 등이 있으며, 1982년에 개관한 목포학생도서관이 있다.
명륜동(明倫洞)
경상북도 안동시의 중앙부에 있는 행정동.
동쪽은 옥률동, 서쪽은 법상동, 남쪽은 중구동, 북쪽은 안막동과 접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안동부 서부면(西部面)과 부내면(府內面)에 속하던 지역이다.
-그것이 1914년 안동면 안막동이 되었다.
-1931년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안막동(安幕洞)을 명륜1정목·명륜2정목·안막정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이곳에 있는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명륜동1정목이라고 하다가
-1947년 이들 일본식 동 이름이 명륜동·신안동·안막동으로 바뀌었다.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명륜동과 안막동이 설치되었다.
-1964년에는 신안동(新安洞)을 명륜동에 통합하였다.
-1997년 과소동 통폐합으로 두 동이 합쳐져 명륜동이 되었다. 면적 7.61㎢, 인구 6720명(2008)이다.
행정동인 명륜동은 현재 4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법정동인 명륜동·신안동·안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안동(新安洞)은 안막동에서 새로 독립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막동(安幕洞)은 안효자의 시모막(侍墓幕)에서 비롯하였다. 상아동(象牙洞)은 상아처럼 생긴 지형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지명은 향교의 명륜당 이름을 빌려 사용하였다. 동명의 유래가 된 명륜당은 안동향교(安東鄕校)에 있었는데, 한국전쟁(6·25전쟁) 때 전소되어 불타 없어졌다. 현재는 송천동으로 이전 및 복설(復設)되어 있다. 대신 안동대학교가 그곳에 자리하였다. 향교가 있던 터는 안동에서 유명한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안막동의 동명은 고려 공민왕 때 현재의 길원여고 자리에 순흥(順興) 안효자(安孝子)의 시묘막(侍墓幕)이 있었기 때문에 안막골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신안동에는 치이골 또는 쳉이골리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마을의 모습이 꿩처럼 생겼다 하여 치곡(雉谷)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이 지역에는 일제강점기에 화장장을 설치하여 화장실골[火葬室谷]이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화장장을 딴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경일고교와 주택가가 들어섰다.
부처바우골[佛岩谷]은 옛날에 한 행인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서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연후에 이곳은 지신(地神)이 발동한다고 해서 지신을 누르기 위해 미륵불을 세우고 부처바우골이라고 했다. 이 미륵불은 퇴계로 확장공사로 인해 지금은 안동대학교에 옮겨 놓았다.
문화재로는 안막동에 안동 토계동 향산고택(安東土溪洞響山故宅:경북민속자료 9)과 안동 원천동 치암고택(安東遠川洞恥巖故宅:경북민속자료 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