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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고정희
은하수 추천 0 조회 46 17.09.23 11: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고정희


 

무릇 너희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거듭나니라, 수수께끼를 주신 하느님, 우리가 영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핵 무기고에서 나오는 살인능력 보유자와 우리들 밥줄을 틀어쥔 자를 구세주로 만드는 오늘날 이 세상 절반의 살겁과 기아선상에 대하여 어떤 비상정책을 수립하고 계신지요.


한나절을 일한 자나 하루 종일 일한 자나 똑같이 최대생계비를 지불함이 하늘나라 은총이다 선포하셨지만, 반평생을 뼈 빠지게 일한 자나 일 년을 혼 빠지게 일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체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러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온갖 제국주의 음모와 죽음의 쓰레기들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라는 식품 상표를 달고, 당신의 이름으로, 배고픈 나라의 백성을 향하여 무한대로 수출되고 있는 작금에도 당신의 말씀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아 살인병기를 자처하는 다국적군이 실로 처참하고 참혹하게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땅을 피바다로 싹쓸이할 때도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미국은 새로운 전쟁시대의 첫 승리자이다" 부시가 오만불손하게 음성을 높일 때,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스무 번씩 기립박수를 칠 때도 당신은 온전히 침묵했습니다.


대답해 주시지요 하느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신지요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 쟈니 윤의 쇼 프로그램에서 미국식 웃는 법을 익히고 계십니까, 아니면 힘이 무지무지 센 나라의 현대판 노예 수출선에 팔려가고 계십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용용 죽겠지 꼭꼭 숨어라 목하 종말론이 생산중인 페르시아 만이나 바빌론의 무기창고에서 재고를 헤아리는 무기 상인들을 격려하고 계십니까? 아니아니 당신의 이름을 교수형에 처한 공산대륙이나 모스크바 뻬레스뜨로이까 전철 속에 앉아 이단의 풍물을 감상하고 계십니까? 대답해 주시지요 하느님, 당신은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교회의 창고부터 열어야 합니다

 

이 곤궁한 시대에

교회는 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교회는 너무 많은 재물을 가졌고 너무 많은 거짓을 가졌고

너무 많은 보태기 십자가를 가졌고

너무 많은 권위와 너무 많은 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파당과 너무 많은 미움과

너무 많은 철조망과 벽을 가졌습니다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가진 것을 교회는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장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귀머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직 침묵으로 번창합니다

의인의 변절을 탓하던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옳은 자들이 당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시대가 오기 전에

하느님, 가버나움을 후려치듯 후려치듯

교회를 옳음의 땅으로 되돌려

참회의 강물이 온갖 살겁의 무기들을 휩쓸어가게 하소서

새소리 참소리 태어나게 하소서

거기에 창세기의 빛이 있사옵니다 아멘......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


  어쩌면 독실한 크리스천들에겐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고정희의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시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 그들에게 행방불명되신 하느님이라니 무슨 개뿔 뜯어 먹는 소리냐며 절대 동의불가라 할 수도 있겠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데 그런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불충 아니냐며 노여워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에서 실족사한지 1주기를 맞아 유작을 정리해 출판한 시집에 수록되었지만 80년대 후반에 쓴 작품이다. 노태우 정권 때이고 미국은 아버지 부시의 집권기였다.

 

  교회와 민중적 세계 인식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행방불명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유효하게 읽히는 까닭은 무얼까. 기독교뿐 아니라 지금 한국의 모든 종교가 총체적인 위기와 불신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들 종교들이 처한 위기와 불신의 내용을 알아채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나 노력이 필요치 않다. 최근 발간된 며칠치의 신문, 인터넷 기사 몇 개, 방송된 프로그램 몇 건만 훑어보아도 한국 종교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것은 이렇게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들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일이 들추어 까발리기에도 벅찬 추문들은 오래 전부터 만연해왔다. 어쩌면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오배 가더라.’는 풍문이 나돌 때부터 뿌리 깊은 종교계의 적폐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종교인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신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참된 목동이 더 많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성직자 개개인의 스캔들에서 나아가 종교 조직과 지도자의 권력 다툼에 이르기까지 한국 종교가 맞고 있는 위기는 총체적이다.

 

  성직자들의 잇단 아름답지 못한 일탈 행위들로 인해 종교계가 멍들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심각한 현실이다. 종교계 내부의 관리와 조직적 통합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성직자들에 의한 비리와 범죄들이 연일 보도됨에 따라 종교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 결과 3대 종교 공히 신자 증가율이 감소하거나 정체상태에 있다고 한다. 하느님을 실종케 하고 자본의 악령이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종교를 상품으로 타락시킨 교회를 시인은 예언자적 직관으로 고발한다.

 

  ‘이 시대의 아벨에 비유되기도 하는 고정희 시인은 하느님의 백성을 저버리고 권력과 자본에 심취한 교회를 매섭게 질타한다.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잘못된 권력이 가진 것을교회는 다 가졌다고 목청을 높인다. 시인이 30년 전에 출소장을 보내며 기성 교회를 탄핵했건만 변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마하트마 간디는 교회를 짓기 전에 먼저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라고 했다. 그런 겸허한 경청이 있었더라면 오늘날의 교회와 성당과 사찰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순진


 

Let The Peace Of The Fo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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