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 번째 소극적 증거 : 몸의 격렬한 반응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지가 아니다.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본질이 그러하고 영혼과 육체의 연합의 법칙이 그러하기 대문에 우리의 마음이 생생하고 활력 있게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몸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된다. 몸은 심리적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액 특히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적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이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체액과 본능에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몸과 결합된 영혼이 단 한 가지의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아주 미미하게 작용을 할 때에도, 몸의 어떤 부분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액의 움직임이나 변화가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감정이 작용할 때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몸이 느낄 수 있는 어던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만일 모든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감정이 크면 클수록, 활력 있게 발휘되면 발휘될수록(모든 조건들이 같은 상태라고 할 때), 몸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크고 강한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일반적 감정과 영적 감정 모두 매우 크게 고조될 수 있다면, 이 두 종류의 감정이 모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도 안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이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몸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 감정이 영적인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가 아님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간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일에 대한 성향이 순전히 본성적으로 생겨난 것임에도 이런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신앙적인 것들에 대한 높은 성향이 그와 같은 신체적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어떤 본성적 감정만큼 높이 고조되고 그만큼 강하고 생생하게 작용할 때에 몸에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런 근거는 이성적으로도 도출될 수 없다. 나는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 감동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감동된 사람들이 왜 의식을 잃고쓰러지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성경에서도 그런 원리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또 최근에 이런 일들 때문에 있었던 모든 논쟁에서도 그런 규정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영적인 감정에는 강한 힘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을 읽게 된다 [엡 3:20].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능력의 영이심을 잃게 된다[딤후 1:7]. 그리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안에서 효력 있게 역사하심을 읽게 된다[엡 3:7]. 또한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강한 힘으로 역사하심을 읽게 된다[엡 1:19].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약하다. 성경에서 혈과 육은 극도로 약하다고 묘사된다. 특히 혈과 육은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위대한 일들에 적합하지 않다고 성경은 말한다(마 26:41; 고전 15: 43, 50).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본문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함’에 대해 말씀한다. 인간의 본질과 감저의 본질이 어떠한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이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받기에 너무나 크고 강력해서 그 몸을 짓누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은혜 가운데 참되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이 많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감화를 받고 그 몸은 압도당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경은 만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과 비전을 하늘에서 가지게 되는 저도만큼 크게 가지게 될 때 연약한 체질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주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뵙고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 때문에 생기는 감정의 본질과 종류는 하늘의 성도들이 가진 것과 같다. 다만 그 정도와 환경만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은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며, 장차 받을 유업의 보증인 것이다.
누가 이런 보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가? 누가 장차 받을 유업을 보증으로서 부분적으로만 주고 더 이상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하나님께서 말슴을 통해 하늘에 속한 상급이 너무나 커서 즉시로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 당신 스스로는 어디에서도 자신을 제한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면서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상급을 보증으로 수실 때 사람의 몸을 약화시킬 수 있을 만큼은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건방진 일이 아니겠는가?
시편 기자는 그가 경험한 강렬한 신앙감정을 말하면서 그 감정이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시편 84편 2절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부르짖나이다”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마음과 육체를 뚜렷이 구분하고 있으며, 각각이 감정에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시편 63편 1절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 역시 영혼과 육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양자가 모두 감정에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경험했을 때 그의 몸이 크게 영향을 입었음을 말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날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또한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몸이 떨린다는 것을 표현한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들이 몸을 억누르고 압도하는 경향이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부적으로 드러내실 때 실제로 그러했다는 사실을 성경이 가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몇몇 성도들에게 당신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시자 그들의 육체는 압도당했다. 그 좋은 실례가 다니엘 선지자와 사도 요한이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외부적으로 현현된 사건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 또한 사도 요한은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건을 기술하면서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계 1:17)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이 성도들이 바라본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영광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나 상징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외적으로 상징한 것이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런 외적 상징이나 표상을 사용하신 목적인 이 성도들에게 표상되는 본채인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과 위엄을 아는 지식을 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표상과 상징들은 그리스도의영적인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성도들은 그 표상과 상징들을 수용했고 그것들 때문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 외적 증거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본성의 참된 영광과 위엄을 크고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그 결과 그들은 크게 감화되었고, 그들의 영혼은 압도되었으며, 그들은 몸이 억눌러짐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외적인 상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는 하나님의 참된 영광과 위엄을 분명하고도 감화력 있게 성도들에게 보일 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대담하고 담대하다고 생각한다.
본 절의 논의를 마치기 전에 나는 성경이 거룩한 영적 감정의 강도를 표현하기 위해 몸에 미치는 영향들을 분명히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떨림[시 119:120; 스 9:4; 사 66:2; 합 3:16], 탄식[롬 8: 26], 병약해짐[아2:5, 5:8], 부르짖음[시 84:2], 헐떡임[시 38:10, 42:1, 119:131], 피곤함과 쇠약함[시 84:2, 119:81] 등이다. 만일 이런 표현들이 감정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이런 표현들은, 감정이 얼마나 영적으로 고양되었는지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적절하고 적합한 수사라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를 바란다. 만일 그런 영적 감정이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그런 표현들이 영적 감정의 강도를 표현하는 수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반대로 감정이 몸에 끼친 영향들은 슬프게도 거짓된 감정과 마귀의 속임수의 표식이나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고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는 생각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