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황조가
유리왕(琉璃王)
펄펄 나는 꾀꼬리
암수가 서로 다정하네
홀로 된 이내 몸은
누구와 람께 돌아갈까
황조가(黃鳥歌)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참조] 유리왕(琉璃王) : ?~18
[역사 이야기]
고구려 제2대 왕(재위 BC19~AD18). 유리왕의 출생한 때는 명확하지 않지만 서기전 38~37년으로 추정한다. 동명성왕(고주몽)의 원자(맏아들)로 부여에서 출생하였다가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졸본으로 달아나 어머니 예씨(禮氏)밑에서 성장하였다. 동부여의 왕이었던 대소의 견제를 받으며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어머니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하였다.
BC19년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 태지로 책봉되었다. 그 후 서소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형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두 세력은 분파되어 비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하였고 유리는 동명성왕이 사망하자 유리명왕으로 등극하였따. 재위 36년 후 사망하여 두곡(豆谷) 동원(東原)에 묻혔다.
「황조가」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은 시가(詩歌)인데, 원래의 노래는 전해지지 않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4언 4구의 한역시로 전한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자 골촌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繼室)로 얻었다. 두 여자가 서로 화목하지 않자, 왕은 양곡(涼谷)의 동서에 두 궁을 짓고 각기 살게 했다.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서 7일간 돌아오지 않은 사이 두 여작가 서로 다투게 되었는데,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출신의 비첩으로써 어찌 무례함이 그리 심한가?”라고 꾸짖으니 치희가 부끄럼과 원한을 품고 도망가 버렸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말을 몰아 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를 보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그래도 믿고 한역의 내용을 보면, 「황조가」는 유리왕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유리왕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보고 화의와 치희의 싸움을 두 종족 간의 대립으로 보면 유리왕이 이 두 사이를 화해시키려다 실패하고 부른 것이니 서사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유리왕을 신화적 인물로 해석하고 이 시가의 작자도 사실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제작 연대도 확정할 수 없는 고대 서정 가요로 보아 남녀가 배우자를 선정하는 기회에 불린 사랑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