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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카페 게시글
―‥‥남은 이야기 스크랩 처음 만들어본(혹은 망한?) 페스토 롤
권종상 추천 0 조회 81 09.01.17 12:51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감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화들짝 놀라 씻고 나서 아침도 거른 채 후다닥 뛰어나가던 날, 배고픔을 견디기 힘들어 우체국 바로 앞의 피츠 커피 샵에서 커피와 함께 먹었던 토마토 페스토 롤이 얼마나 맛있던지, 참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됐었습니다. '나도, 이거나 집에서 만들어 봐?' 하지만, 시간이 계속해 맞지 않았던지라, 거의 그 생각을 잊고 있었을 즈음, 아내가 집에서 만두를 빚었고, 만두피를 만드느라 밀가루를 밀던 저는 그 밀가루 덩어리를 보면서 페스토 롤의 쫄깃하면서도 특이한 맛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되겠다. 만드는거야." 혼잣말로 되뇌이자. 아내는 "응? 뭘?"이라고 물어봅니다. 저는 씩 웃으면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셋째..." 아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얼른 들어가 자라. 오늘, 정상이 아니구나..."

아무튼, 페스토 롤이란 걸 만들어보겠다고 하자, 아내는 "괜히 일만 더 만들려구?" 하면서도 기대를 굳이 감추진 않습니다.

 

아무튼,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잊어먹고 있던 페스토 롤 생각이 다시 떠 오르자, 저는 쉬는 날에 이걸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스트를 사 오고, 페스토 소스도 한 병 사고... 페스토는 녹색의 파스타 양념입니다. 집에서도 몇번 소스를 만들어 봤는데 그 때마다 맛있게 먹긴 했었습니다만, 만들기가 좀 귀찮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소스를 한 병 샀더니 편하게 먹고 있습니다. 원래 페스토를 만드려면 시금치가 몇 다발은 있어야 하고, 여기에 베이즐, 그리고 잣 등 견과류들이 많이 있어야 하고, 마늘도 잔뜩, 그리고 생 오리가노와 로즈매리 등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모두 푸드 프로세서에 가는 거지요. 올리브 기름을 적절한 양을 유지하며 부어가면서... 과거에 몇번 만들다 망한 적도 있어서, 이게 쉽지만은 않은 작업임을 나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신, 페스토 소스는 국수에 먹으면 그 고소함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지요. 일단 입에 그 맛이 배이기 시작하면 토마토 소스나 알프레도 소스보다도 더 선호하게 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페스토는 화이트 와인들과 잘 어울리지만, 가벼운 레드라면 화이트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면도 있습니다.

 

아무튼, 일단 토마토 통조림을 하나 따서, 이걸 이스트와 함께 섞은 밀가루에 조금씩 부으며 비빕니다. 음...  밀가루가 뭉쳐지기 시작하자 마치 토마토 베이글에서 나는 듯한 내음이 밀려옵니다. 이거, 롤 하지 말고 그냥 빵으로 구워 봐...? 라는 유혹이 슬슬 올라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심을 지켜 롤러를 꺼내어 잘 주물러진 반죽을 밀기 시작합니다. 이 작업에 얼마나 힘이 들어갈 수 있는가에 따라서 롤의 졸깃함도 결정될 터입니다. 잘 밀어진 밀가루 반죽에 페스토 소스를 살살 펴 바르고 돌돌 말아 냅니다. 그리고 베이킹 팬에 이것들을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습니다. 오븐 온도를 화씨 400도로 바짝 올렸다가 10분쯤 지난 후 325도로 내렸습니다. 그리고 20분 쯤 지났을까?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아마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와아... 보기엔 그럴싸한 롤이 나왔습니다.

 

"앗, 뜨거!" 스스로를 빵순이라고 부르던 아내가 제가 만든 빵에 손을 대더니 뜨겁다고 난리를 칩니다. 아니, 당연하지, 오븐에서 갓 꺼낸 걸 왜 지금 먹는다고... 조금 식혀서 뜯어도 아직 뜨겁습니다. 흠... 맛있...나...? 으윽... 여기서부터 제 실수가 하나 하나 드러납니다. 일단, 밀가루를 엉뚱한 걸 썼습니다. 강력분을 써야 하는데 중력분을 썼더니, 그 쫄깃함이 떨어집니다. 으음... 그리고 페스토 소스를 더 발라야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밀가루 반죽을 할 때 소금을 조금 더 넣고, 설탕도 좀 넣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첫 작품 치고는 성공적이란 아내의 평이 고마울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와인을 맞추자... 하여 콜럼비아 밸리 산의 프레스톤 빈야즈 와인을 골랐습니다. 와인은 좀 미스매칭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볍게 리즐링이나 맞췄으면 좋았을 것을, 그저 레드와인이 당긴다는 이유로 꺼낸 것이 무거운 카버네 소비뇽이었으니, 매칭은 꽝입니다. 그러나 그냥 빵은 빵대로, 와인은 와인대로 따로 놀긴 했어도 일단 '축배'의 의미가 있었으니, 한 잔은 오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와인도 괜찮은 넘이었습니다. 초컬릿같은 쌉싸름함이 전체에 싹 깔려 있는, 전형적인 어린 워싱턴 와인의 모습... 태닌이 거칠긴 하지만, 오히려 그 거친 맛을 즐기는 이들에겐 어필할 것 같습니다. 마치 흙이 입에서 굴러가는 듯한 거친 느낌은 워싱턴 와인을 오래 접해서 알게 된 이들이라면 오히려 반겨맞이할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제 1월도 중순이 지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새로 시작된 해에 그만큼 일찍 적응이 되는 탓인지, 처음엔 믿기기 힘들었던 2009 라는 숫자가 차라리 현실로 다가와 버릴 때, 저는 그만큼 제 라이프스팬의 한 해가 줄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도 압니다. 떠날 때 떳떳하게 떠날 수 있도록,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은 내 삶을 '예술'처럼 만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죠. 하하....

술 한잔에 상념을 실었고, 빵 한 쪽에 즐거움을 담아 내 놓았습니다. 아이들이 덤벼들었다가, 지들이 기대하는 맛이 아닌지 한 입씩 물어보고 퇴각입니다. '제 작품' 이기도 한, 우리 아이들을 조금 손봐 준 후에(?) 제 작품을 먹였습니다. 인생은 즐겁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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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1.17 22:59

    첫댓글 ~! 이거 옛생각이 간절하도록 만드신다는...ㅋㅋㅋ...맨아래 라벨을 보고있으려니까,호승심이 슬슬 끓어오르네...ㅎㅎㅎ...참아야지~!

  • 작성자 09.01.18 10:38

    아니... 호승심이라 하심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하하..

  • 09.01.18 13:36

    주(酒)님을 사랑했죠...^^...지나치게 사랑하는 바람에 병이 됐지만...과유불급을 체험하게 되고...ㅜㅜ

  • 09.02.27 18:59

    주님을 넘 사랑하다 옥탑방에서 칩거하고 계시는 우리의 짱 형... 오호~ 통재라!!! OTL

  • 09.02.27 18:57

    "얼른 들어가 자라. 오늘, 정상이 아니구나..." 이 대사에서 saci 온니가 생각난다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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