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1일 월요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수도회] 막힌 데를 뚫고 매듭을 풀어주러 오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35.1-10
† 복음 루카 5,17-26
◈ 오늘의 묵상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데리고 가는 친구들은 단순히 한
친구의 질병을 치유받게 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 장면은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마태 18,19 참조).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실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신적 권위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질병과 불행은 원죄의 결과이며 진정한 치유는
죄의 용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사막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과 같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우리는 원죄가
빚어낸 온갖 불행과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구세주께서 머무르시면 우리의 마음은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겁게
기쁨의 환호성을 올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단비가 내려
우리의 잘못과 죄악이 없어지면 우리 영혼에 기쁨의 꽃이 핍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완고한 우리 마음을 풀고 부드럽게 합시다.
우리 마음에 ‘거룩한 길’을 내기 위해 마땅한 준비를 합시다. 우리의
탄식과 슬픔이 사라지도록 우리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받는 길을
마련하여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1-10
복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첫 눈에 반한 사람과 서서히 빠져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랑하는 사람과 더 오랜 관계를 유지할까요? 첫 눈에 반한 사람은
불꽃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반면에 서서히 빠져드는 사람은 더 오랜
기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착각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만족도나 행복감에
있어서 첫 눈에 반한 사람이나 서서히 빠져드는 사람은 똑같다고
하네요. 즉, 사랑이란 첫 눈에 반할 수도, 또 서서히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이라고 수학공식처럼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사랑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다양한 사랑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들은 다양한 사랑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나와 입장과 다른 것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와 나와 다름이 만들어내는 조화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자동차가 급한 지 앞 차에 바짝 붙여서 운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 차는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차선을 바꿔서 먼저 가도록 해주었지요.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함께 앞으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안전거리를 지키지 않고 바짝 붙는 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
될 것입니다. 운전하는 데에 기술이 필요한 것처럼, 사랑하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지요. 결국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중풍 병자가 한
행동은 별 것 없습니다. 그가 혼자의 힘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서 남자 몇이 지붕으로
올라간 뒤에 기와를 벗겨 평상에 누인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지요. 그 남자 몇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죄를 용서받고 치유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중풍 병자
때문에 그러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남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사랑은 당사자의 모습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만의
입장만을 강조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우리’라는 새로운 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기도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기쁨이나
절망의 틈새에서 나오는 감사에 찬 사람의 눈물이며, 내 마음을
열어주고 나를 예수님께 가까이 묶어주는 공활하고 초자연적인
힘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
초심을 잃지 않고 사는 지혜(‘좋은 글’ 중에서)
우리가 아껴야 할 마음은 초심입니다. 훌륭한 인물이 되고, 중요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셋째는 뒷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음이 초심입니다. 그 이유는 초심 속에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초심에서 열심이 나오고, 초심을
잃지 않을 때 뒷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첫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순수한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배우는 마음입니다. 견습생이 품는 마음입니다.
초심이란 동심입니다.
피카소는 동심을 가꾸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초심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마음이 초심입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초심을 상실할 때 찾아옵니다. 초심을 상실했다는 것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초심과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초심을 상실하지는 않았는지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초심은 사랑과 같아서 날마다 가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은 전등이 아니라 촛불과 같습니다. 전등은 가꾸지
않아도 되지만 촛불은 가꾸지 않으면 쉽게 꺼지고 맙니다.
스스로 가졌던 초심을 되돌아 봐야 할 때가 아닐까요?
갑곶성지의 성탄 트리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막힌 데를 뚫고 매듭을 풀어주러 오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루카 5,17-26
“예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주셨다.”(루카 5,17)
막힌 데를 뚫고 매듭을 풀어주러 오시는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때에 시리아 사막의
경이로운 변화가 펼쳐집니다.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우고 백성들은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이사 35,1-2). 하느님께서 인간을
해방하러 오시는 구원의 날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며,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릴 것이며, 끝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35,4-5.10).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러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군중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가르치시고
(루카 5,17),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주십니다(5,17ㄴ). 그분께서는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5,20). 이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존재이유,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분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육신의 건강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온전한 치유와 해방을 위해
오신 것이지요. 죄의 용서는 영혼의 어둠과 상처, 왜곡된 부분과
가림막을 치워 빛이신 주님께로 이끄는 결정적인 손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방자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한 인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 치유 받게 하려 하지만 군중 때문에
그분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생길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와 온전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 곁으로
가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건강과 인간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온 마음과 정성과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그들은
가로막고 있는 군중을 뚫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해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와를 벗겨냅니다. 기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사회제도와 법 차별의식 등 다양한
걸림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막힌 데가 뚫리고 맺힌 매듭이 풀림으로써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다가가야 합니다.
생명이요 빛이신 그분께 다가가기 위해 하느님께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들어올려야겠습니다. 그렇게 고양된 영혼으로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기왓장을 들어내고 그분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 선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한가운데로’ 내려와, 참 자유와 해방을 품고 “일어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야겠습니다.”(5,24) 이러한 몸짓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끝없는 기쁨' 안에 머무는 우리다운
순례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현세의 것들에 매여 유배생활을 하고, 영혼의 어둠과
온갖 걸림돌, 그리고 시련과 고통에 맞닥뜨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믿음과 사랑으로 수많은 현실의 걸림돌 저 너머, 저 위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해방과 온전함을 주시는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5,19)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애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한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 5,17-26
한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
중풍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훈훈한
가족애를 생각하다, 문득 제 까마득히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여섯살 무렵 부터 저는 당시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그런 저를 들쳐업고 밤낮없이
뛰어다니셨습니다. 자식이 뭔지, 가족이 뭔지, 끝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고 한번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다쓰셨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게 됩니다.
한때 난다긴다 하셨던 신부님들, 이제는 연로해지셔서 누군가의 손길과
보살핌 없이는 스스로 설수 없게 되셨습니다. 그런 원로 신부님들을
병원 모셔다 드리고, 삼시새끼 챙겨드리며 극진히 수발하는 형제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던 노숙인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셨던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 가끔씩 요셉의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중병
노숙인 환자가 찾아오면, 그를 들쳐업고 큰 병원으로 뛰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큰 사랑, 그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중풍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 군중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안으로 들일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사람들의 뜨거운 가족애를 생각하며, 오늘 우리
가정을 들여다봅니다.
한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이라는 그런 신념이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행 청소년이어도, 나이가 들어도, 명예 퇴직을 했어도,
암에 걸렸어도, 치매 등급을 받았어도, 시한부 인생이어도, 중증 장애
등급을 받았어도 여전히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될 하느님이 맺어주신
인연, 사랑하는 가족으로 남아있는지 질문을 던져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루카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루카 5, 24)
여정의 끝과 시작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장 알맞은 때에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치유는 길을 제대로 찾은 이들의 진정한 평화이며 감사입니다.
아픔과 상처를 통해 돌아가야 할 우리자신들의 집을 다시 보게됩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사람은 다시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누워있던 한 사람을
일어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하십니다.
돌아가야 할 우리의 집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평상을 들듯 우리의 역사를 끌어안는 대림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받아들일수록 더 쉬워지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우리자신을 향해 있던 우리들이
이제는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거기에 치유와 용서가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중풍병자를 치유하심!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에 의해,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 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 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의
영혼의 병을 먼저 치유하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하고 있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한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시고 계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고 한다. 여기서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성이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간 월요일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 5,17-26
미사경본이 바뀌었습니다. 교구청은 두꺼운 미사경본과 독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일미사와 미사통상문으로 미사를 봉헌할 때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경본을 이곳저곳 찾아야
합니다. 독서도 매일미사를 가지고 할 때와는 달리 전례력에 따라서
찾아야합니다. 번거로움은 있지만 미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표현과 용어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는데 그것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편하고 쉽고, 빠른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때로 조금
늦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어렵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동성당에도 구유가 준비되었습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읽은 구유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머무실 구유를
만드셨고, 자녀들에게 양을 한 마리씩 주었습니다. 매일 저녁 기도를
하면서 그날 했던 선행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선행을 했던 친구의 양이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탄을 기다리면서 매일 선행을 이야기 하였고,
형제들은 선행을 해야만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성탄을 기다렸습니다.” 참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하는 가정입니다.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율법학자와 같이 성탄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강생의 신비조차 하느님의 모독하는 일로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열심히 준비한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눈다면,
조건 없이 사랑을 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웃들처럼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좋은 이웃이 되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루카5,17-26)
좋은 이웃이 되어라.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
주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 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주님께서는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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