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덕션 후라이팬 / 송 철 범
얼마 전 오후 전기곤로가 고장났다. 점심 때에는 멀쩡했는데, 막걸리 안주로 달걀후라이를 하려고 전기를 켜니 까닭 없이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 상식적인 첫 번째 조치는 당연히 접촉 불량 여부를 체크하는 것이다.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캔이 안 나올 때 발로 차거나 하면 대개는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기코드를 뽑아서 다시 꽂고, on-off 스위치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갔구나!’
일단 김치와 풋고추만으로 막걸리를 마시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당장 저녁을 국 없이 먹어야 하고 오늘 채워야 할 단백질(달걀후라이) 분량은 날아간 거였다. 전기곤로를 새로 사야 한다면 비용도 문제였다. 쓸 만한 것을 사려면 적어도 2만 원은 들 텐데,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지출이고 상당한 부담을 주는 액수였다.
솔로 라이프를 시작한 후 한동안 가스레인지가 있는 원룸에서 살았는데, 두 해 전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지금의 반지하방으로 오면서 전기곤로를 사용하게 됐다. 집세가 싼 대신에 옵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와 세탁기는 재활용품센터에서 샀고 전기곤로는 예비용으로 소지하던 것이었다. 전기밥솥이나 전자레인지 등 다른 취사도구도 있어서 찌개를 끓이거나 달걀후라이 정도 하는 데는 전기곤로면 충분했다. 그렇게 2년 가까이를 별 불편 없이 살았다.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누워서 30분 정도 책을 읽거나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보면 대개는 잠들었는데. 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뭘 읽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번뇌는 계속 전기곤로의 주변만 맴돌았다. 결국, 정면으로 사태를 응시하기로 했다. 당연히 문제해결의 수순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도 집에서 기본적인 취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가열도구는 뭘로 해야 하나?’
인터넷으로 도구의 가격과 장단점 등 필요한 정보를 검색한 결과 세 가지 선택지가 도출됐다. 첫 번째, 단순히 전기곤로를 새로 사는 것이다. 2만 원 정도를 부담하면 원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이 너무 아깝다(그 돈이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책 ‘노년’을 살 수 있다.). 다음 선택지는, 지난 해 지인으로부터 얻은 인덕션을 사용하는 것이다(아직 박스도 열지 않았다.). 이 또한 문제가 있다. 인덕션에는 재질이 스테인레스스틸인 조리도구만 사용할 수 있다. 내게는 인덕션에 사용할 수 있는 조리도구로는 냄비 하나밖에 없다. 후라이팬을 따로 사야 되고 괜찮은 것은 전기곤로만큼 줘야한다. 마지막으로, 스테인레스스틸 냄비를 후라이팬으로도 사용하는 것이다. 다소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지면 견딜 만할 것이다. 장점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문제해결의 절차에 따라 세 가지 선택지의 평가를 위한 검토에 들어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들어가는 돈도 비슷했고, 조리할 때의 용이성 등 장단점도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일단 정했다. 돈이 안 들어서 매력적인 세 번째 안은 실험을 해봐야 채택 가능한지를 알 수 있었다.
즉각, 실험에 돌입했다. 인덕션에 스테인 냄비로 달걀후라이 2개를 하는데 일부 타고 늘어붙는 등 온도 조절이 어려웠다. 스테인 조리도구는 사용하기가 까다로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숙달을 통해 충분히 해결 가능해 보였다. 진짜 문제는 냄비의 폭이 좁고 높이가 11cm나 돼서 후라이팬으로는 사용하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인덕션과 스테인 냄비의 조작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특히, 냄비를 후라이팬으로도 사용해야 한다는 옹색함을 정서 상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결국 세 번째 안은 버리기로 했다. 당장 후라이팬이 없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달걀은 전자레인지로 찜을 해서 먹었다.
전기곤로냐?, 후라이팬이냐? 이것이 문제였다. ‘답은 현장에 있다. 일단 물건을 보고 결정하자.’ 다음날 아침, 10시가 되기 전에 인근의 ‘다이소’로 향했다. ‘다이소’는 생필품을 사러 한 주에 한두 번 간다. 3층을 뛰어 올라 조리용품 코너에서 인덕션 후라이팬을 발견했다. 전기곤로는 보이지 않았다. 인덕션 후라이팬은 한 종류밖에 없었다. 우선 가격표를 확인했다. 5,000원. ‘아! 5,000원짜리 인덕션 후라이팬이 있다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횡재가 눈앞에 반짝 생긴 것이었다. ‘5,000원이면 끝날 일을 그렇게나 궁리를 했단 말인가!’ 기가 막히고 한심했지만 날아갈 듯 기뻤다.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이소는 큰 회사이고 장기적인 계산으로 영업을 할 테니 싸다고 해서 못 쓸 물건을 팔지는 않을 거야.’ 후라이팬은 바닥에 얇은 스테인레스스틸을 붙여서 인덕션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다른 부분은 알루미늄으로 된 흔한 타입의 후라이팬이었다. 전부가 스테인레스스틸이라면 5,000원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비누 두 장을 더 사서 돌아오는 길, ‘세상은 다 살게 돼 있다.’는 생각에 그간 나름 불편했던 심정이 웬일인가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새로 산 후라이팬을 깨끗이 씻고 기름으로 닦아냈다. 실험할 준비가 됐다. 마침 점심 준비를 해야 하니 바로 착수했다. 인덕션에 새로 산 후라이팬으로 달걀후라이와 두부구이를 했다. 먼저 한 달걀후라이가 온도 조절이 미숙했던지 약간 눌었지만 두부구이는 깔끔했다. 처음 사용한 셈치고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내 실력도 좋지만, 싸다고 나쁜 건 아니구만!!!!!’ 양파와 당근도 볶고, 내친 김에 애호박도 부쳤는데, O.K.. ‘안주 좋으면 한 잔 하는 건, 진정한 술꾼의 매너!’ 점심 반주로는 다소 과했지만 문제해결을 핑계로 막걸리를 두 병이나 마셨다.
그런데, 모든 소동(?)이 종료되고 나니 약간 허탈해졌다. 사흘 동안 한 짓이 고작 5,000원짜리 후라이팬 하나 산 거라니! 그걸 사들고 좋아라 집으로 돌아오던 나 자신을 떠올리니 뭔가 좀 어색하고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이렇게도 되는 건가?’
지난 몇 해 동안, 안(못?) 벌고 안(못?) 쓰며 살았다. 밥만 먹고 산 셈이다. 일로부터, 돈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사실상 해방된 것이다. 철들고 줄창 노래부르던 바로 그 자유를 얻은 것이다. 가진 게 없고, 잃을 게 없으면 자유로워질 거라고 믿었다. 믿은 대로 됐는데..... 두 가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이제는 빈자의 삶에 익숙해졌으며, 한편, 스테인 냄비 하나 살 돈에도 부자유스럽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