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이 몸 또한 꿈일지니
김시습(金時習 : 1435~1493)
(2)
여러 해 학문과 무예로 먼 길 달려와
강호에 덧없는 이름 얻은 것뿐이네
끝내는 이 몸도 모두 다 꿈일지니
일생에 일 없기로 나 같은 이 있을까
(4)
나는 공부에서 벗어난 아이같이
산 그리워하고 돌 쌓으며 소나무 심었네
십 년 세월 세상 밖에 사노라니
영예도 치욕도 알 길이 없네
縱筆(其二)종필
百年書劍走長途(백년서검주장도) 잉득한명만五湖(잉득한명만오호)
畢竟此身俱是夢(필경차신구시몽) 一生無事莫如吾(일생무사막여오)
縱筆(其四)종필
我似兒童放學時(아사아동방학시) 思山疊石植松枝(사산첩석식송지)
十年蹤迹煙霞外(십년종적연하외) 榮辱由來兩不知(영욕유래양부지)
[어휘풀이]
-煙霞(연하) : 안개와 노을.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비유
[역사 이야기]
김시습(金時習 : 1435~1493)은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이름 시습(時習)은 논어의 첫 구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서 따온 듯하다. 저서로 『매월당집(梅月堂集)』과 우리나라 초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으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등이 있다. 1782년(정조 6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육신사에 배향(配享)되었다.
그는 3세에 외조부에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다섯 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오세동자로 불릴 만큼 천재성을 지녔다.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계유정란)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이 가진 모든 책을 불사른 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평생 전국을 방랑하면서 마음의 시름을 문학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이 세조의 포악성에 떨고 있을 때 그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31세, 1465년(세조 11년) 봄 경주에 내려가 금오산에 금오산실을 짓고 칩거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고 그 후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는 50대에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 충청도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1493년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심유천불(心儒踐佛)이니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이라고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근본 요소를 다 포용하였다. 그는 근본 사상을 유교에 두고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시편만 2,200여 수가 된다. 역대시인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 말한 시인은 김시습밖에 없었다고 한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