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한강기맥과 영춘기맥이 만나는 청량봉
발 아래 평지에 야산들이 오들오들 널려 있다. 그 산들이 제각기 소리를 지니고 있는 것만 같다. 저수지, 동네,
다리, 논과 밭, 그런 것들 위에 얇은 안개가 끼어 있다. 귓가에 앵앵 우는 소리는 어쩐지 그 많은 것들의 소리가
뒤섞여 있는 것 같다.
저편에 준령들이 첩첩 싸여 있고 가물가물한 먼 거리에도 산들이 들어차 있다. 저 산들의 수많은 골짜기, 거기
에는 제각기 물소리가 흐르고 새가 울고 바람이 불겠지, 그 아련한 소리들이 조용히 공간을 흐르는 것 같다.
들리지 않는 산들이 소리가 더 정답다.
―― 진웅기(陳雄基, 1931~2005, 수필가, 번역문학가), 「산의 소리」
▶ 산행일시 : 2022년 2월 12일(토), 맑음, 미세먼지 매우 나쁨
▶ 산행인원 : 4명(자연, 하운, 메아리, 악수)
▶ 산행시간 : 9시간 22분
▶ 산행거리 : 도상 14.4km(산길 9.8km, 도로 4.6km)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 타고 홍천으로 가서, 내면 가는 직행버스 타고 하뱃재에서 내림
▶ 올 때 : 검산리 버스승강장에서 (내면에서 홍천 가는) 직행버스 타고 홍천으로 와서, 저녁 먹고 시외버스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옴
▶ 구간별 시간
06 : 40 - 동서울터미널, 홍천 가는 시외버스 출발
07 : 50 - 홍천(08 : 00 내촌 가는 직행버스 출발)
08 : 50 - 하뱃재(뱃재, 율전삼거리), 산행시작
10 : 36 - △1,073.0m봉
11 : 55 ~ 12 : 40 - 1,019m봉, 점심
12 : 52 - 1,079.2m봉
14 : 15 - 1,094.8m봉
14 : 38 - 1,102.1m봉
15 : 00 - △1,086.8m봉, Y자 능선 분기, 오른쪽은 영춘기맥
16 : 12 - 902.0m봉
16 : 35 - 811.3m봉
16 : 50 - 626.2m봉 직전 안부, 오른쪽 사면으로 탈출
17 : 10 - 농로
18 : 12 - 검산보건진료소 앞, 검산리 버스승강장, 산행종료
18 : 32 - (내면에서 홍천 가는) 직행버스 탐
19 : 07 ~ 20 : 30 - 홍천, 저녁
21 : 43 - 동서울터미널, 해산
2-1.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50,000)
2-2.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50,000)
2-3. 구글어스로 내려다본 산행로
동서울터미널의 버스운행시간표에는 홍천까지 서울홍천고속도로를 달리는 무정차 시외버스가 1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내 여태 숱하게 그 버스(06시 40분발)를 이용했지만 1시간이 걸린 적이 없었다. 매번 1시간을 초과하였
다. 홍천에서 08시 정각에 서석 등지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지 못할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오늘 아침처럼의 무
차지경인 고속도로도 흔한 경우가 아닐 텐데 1시간 10분이 걸린다.
차표 끊느라 화장실 다녀오느라 바쁘다. 08시에 서석, 하뱃재 등지를 경유하여 내면 가는 직행버스 승객은 우
리 일행 4명을 포함하여 8명 정도다. 곳곳의 버스승강장을 안내방송 하지만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 무정차로
막 달린다. 안내방송 중 귀에 익은, 들머리 혹은 날머리였던 지명이 나오면 저절로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그리
고 그때의 즐거웠던 산행을 잠시 생각하곤 한다.
얼른 몇 곳만 들어본다. 화촌은 킬문 님과 함께 가리산을 갔었다. 조가터(朝霞臺)는 제임스 님과 어론에서 공작
현까지 들입다 내달았다가 내려오기도 했고, 메아리 님 등 여러 악우와 응봉산을 올랐다. 판관대는 하뱃재에서
청량봉을 올랐다가 내려왔다. 서석은 운무산 또는 수리봉의 들머리인 먼드래재를 가는 버스의 환승지였다. 생
곡은 오지산행에서 어느 해 봄날 율전1교를 들머리로 하여 무명봉을 넘고 넘어 내려왔다. 하뱃재는 산행교통의
요충지라 오케이사다리 시절 영춘기맥 종주 때부터 수차례 왔다.
하뱃재. 고도 650m. 준령이다. 버스가 상대월을 지나고부터 대천이던 내촌천이 마침내 물이 밭고 헤어핀도로를
올라 가쁜 숨을 토하는 하뱃재다. 그래도 청량봉을 내려온 영춘기맥에서는 바닥 친 안부다. 돌배나무가 많다는
뱃재(梨峴) 아래에 있다 하여 ‘하뱃재’라고 한다. 율전초교가 있고 교회도 있는 산중 마을의 대처다. 이곳 아침기
온은 영하 3도다. 대기가 차다. 옷깃여미고 종종걸음으로 서진한다.
경지 정리한 너른 들녘이 온통 눈밭이다. 농가 마당을 지나기보다는 빈 밭을 가로질러 산기슭에 접근한다. 영춘
기맥을 종주하는 이들의 몇몇 산행표지기가 등로를 안내한다. 등산화 끈 바짝 조이고 겉옷 벗고 카메라 꺼내
목에 걸고 스틱 길게 빼어들고 나아간다. 아침부터 미세먼지가 심하게 끼였다. 근경조차 흐릿하다. 하늘 가린
낙엽송 숲 지나면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길고 가파른 오르막이다. 코 박은 거친 숨에 언 낙엽이 들썩인다.
3. 하뱃재 주변, 하뱃재는 고도 650m나 된다
4. 산행초반,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이다
5. 고도가 1,000m를 넘고 설원이 펼쳐진다
6. 북사면은 눈이 깊다
7. 왼쪽 멀리는 아미산, 오른쪽 멀리가 오늘 가장 높이 오르는 1,102.1m봉이다
8. 청량봉, 미세먼지가 심하여 근경도 명료하지 않다
9. 청량봉
10. 청량봉 서릉
망각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축복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인 ‘레테
(Lethe)’에서도 그러한 점이 없지 않다. 그리스 신화에 죽음의 신인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에는 망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강이 다섯 개가 흐른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저승의 입구에서 만나는 고통의 강 ‘아케론(Acheron)’이다.
망자는 이 강을 건너며, 자신의 죽음에서 오는 깊은 고통을 천천히 씻어낸다. 두 번째는 비탄과 통곡의 강 ‘코키
토스(Cocytus)’이다. 망자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흐르는 그 강에 모든 시름과 비통함을 내려놓는다.
세 번째 강인 ‘피리플레게톤(Pyriphlegethon, 플레게톤)’은 불의 강이다. 뜨거운 열기에 물과 진흙이 끓어오르는
이 강에서 망자는 남아있는 감정들을 완전히 태워버린다. 네 번째는 두려움과 증오, 우울함, 약속의 강인 ‘스틱
스(Styx)’이다. ‘레테’는 망자가 건너는 마지막 강이다. 망자는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
운다. 이를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기도 한다.
산꾼으로서 지난날 힘들었던 산길의 기억을 까맣게 지워버리고 미지의 산길처럼 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미지’는 산을 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눈 온 뒤로 아무도 가지 않았다. 수적은 아마 고라니가 러셀
한 자국이다. 함께 오른다. 이따금 눈 녹은 넙데데한 남쪽 사면에 들러 불꽃 뛰기는 언 땅에서 더덕을 조각한다.
그윽한 청향(淸香)의 결정체이다. 향도(香道)를 즐긴다.
일본에서 2008년 NHK에서 방영했던 50부작 드라마 ‘아츠히메(篤姬)’를 보면 에도시대에 향도(香道)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다도(茶道)와 마찬가지로 예쁜 자기에 향을 피워 모인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그 향내를 음미
한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짐은 물론이다. ‘아츠히메(篤姬)’ 이전부터 우리는 우리 나름의 향도를 즐겼다. 더덕을
담은 비닐봉지에 아예 얼굴을 묻거나 콧잔등에 진액을 바르는 등의 방법으로.
너덜이 나온다. 선답의 산행표지기가 등로를 안내한다. 잡목 숲을 헤치며 바윗길을 지나고 눈길을 한 피치 오르
면 △1,073.0m봉이다. 삼각점은 낡아 판독하기 어렵다. 줄줄이 달린 산행표지기로는 명산이다. 29개나 된다.
△1,073.0m봉 정상은 키 큰 나무숲이 둘러 있어 아무 조망이 없지만 정상을 약간 비킨 서쪽으로 20m쯤 가면
절벽 위가 경점이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해도 가경을 다 가리지는 못한다. 우리가 가야 할 영춘기맥이 썩 장쾌
하거니와 지난날 다녀온 청량봉과 그 연릉이 설산으로 그때와는 전혀 다른 웅장한 모습이다.
△1,073.0m봉에서 북서진한다. 눈으로는 건너편 1,079.2m봉이 초원을 한달음 내지르면 다다를 것 같았는데 발
로는 매우 사납고 멀다. 거리는 도상 2km다. 봉봉을 넘는다. 봉봉이 첨봉이다. 낙엽 밑은 빙판이라 아무리 조신
하게 걸어도 느닷없이 미끄러지거나 엎어지기 여러 번이다. 땀난다. 그러니 긴 오르막은 빙벽이다. 나이프 릿지
닮은 바윗길을 지난다. 딴은 잡목 숲이 고맙기도 하다. 미끄러지더라도 그에 걸릴 테니까.
11. 수렴이 가린 오른쪽 멀리가 1,102.1m봉이다
12. 1,102.1m봉의 전위봉인 1,094.8m봉, 봉봉이 첨봉이다
13. 겨우살이
14. 슬로프 스키 타듯이 내린다
15. 낙엽 쌓인 길보다 눈길이 훨씬 낫다
16. 멀리 가운데가 아미산, 우리는 앞 능선으로 하산하다
17. △1,086.8m봉, Y자 능선 분기한다. 오른쪽이 영춘기맥이다
18. △1,086.8m봉, Y자 능선 분기한다. 오른쪽이 영춘기맥이다
1,079.2m봉을 설벽 오르막 수십 미터 남겨두고 점심밥 먹는다. 양지바른 눈밭이다. 비닐 쉘터를 치지 않아도 따
뜻하다. 이때는 봄날의 만복이니 나른하여 설벽 오르기가 무척 되다. 오늘 산행은 무명봉 8좌이지만 그중에는
고도 1,000m가 넘는 준봉이 5좌나 된다. 더욱이 봉마다 독립하여 오르고 내리는 굴곡이 심하고, 새로이 산을
가는 것 같다. 그래도 북릉을 내릴 때는 즐겁다. 긴 슬로프를 스키 타듯하여 순식간에 안부에 다다르곤 한다.
가도 가도 조망이 트인 데는 없는 답답한 진행이다. 저 앞에는 혹시 저 사면 아래는 수렴이 걷혀 조망이 트일까
하고 애써 가보지만 번번이 허탕이다. 1,094.8m봉도 첨봉이다. 빙벽 혹은 설벽을 잡목 늑목으로 오른다. 그런
다음 1급 슬로프를 한바탕 지쳐 내리고 그 반동을 살려 1,102.1m봉을 오른다. 한 번 더 반복하면 △1,086.8m봉
이다. 삼각점은 ‘현리 450, 2005 재설’이다. 배낭 벗어 놓고 가쁜 숨 돌린다.
△1,086.8m봉에서 서쪽으로 30m쯤 가면 Y자 능선이 분기한다. 오른쪽은 영춘기맥으로 큰노루목재를 지나 매
봉산(△1,096.5m)으로 간다. 그 너머는 행치다.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우리는 왼쪽으로 남진하여 검산리를 간
다. 본격적인 내리막 빙판을 버티기 위해서 아이젠을 맨다. 여태의 영춘기맥과는 달리 산행표지기 한 장 보이지
않고 인적 또한 뜸하다. 팔심 부치게 잡목 숲 헤친다.
산길도 벼슬길처럼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 빙판이나 돌부리 허방 잘못 디뎌 넘어지기 일쑤다. 한참을
쭉쭉 내리다 927m봉에서 멈칫하고 다시 낙엽과 사태 져 쏟아지다가 811.3m봉에서 제동한다. 검산리 산행종료
데드라인을 18시 20분으로 정했다. 지금 시간 16시 35분이다. 도상 5.3km 정도 남았다. 이중 산길이 1.7km다.
달음질해도 빠듯하다. 내면에서 오는 막차를 타야 한다. 탈출을 도모한다. 지도 자세히 읽어 도로에 가장 가까
운 능선을 고른다. 626.2m봉 직전 안부 오른쪽 사면이 적당하다.
낙엽송 숲 완만한 사면이다. 골로 가면 어떡할까 염려했는데 흐릿한 인적이 안내한다. 전원주택 울타리 돌아내
려 농로다. 농로는 곧 아스팔트 도로로 이어지고 검산천 주변 여러 유원지를 지난다. 홍천군 홈페이지의 지명유
래에 따르면 검산은 삼신산이 있으므로 검산이라 하였다 하며, 일설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산들
이 검은 색을 띄고 있어 ‘검은 산’이라 불리다가 ‘검산(儉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삼신산(三神山)은 마이산과 수양산, 아미산을 말하는데 오늘날 그 이름이 분명한 산은 아미산뿐이다. 검산2교
건너며 바라보는 검산리를 둘러싼 주위 산들이 과연 검다. 도로 4.6km를 1시간 남짓 줄달음하여 검산보건진료
소 앞 버스승강장이다. 18시 12분. 홍천 가는 막차는 20분 후에 온다. 오늘도 무사산행을 자축하는 하이파이브
나누고, 바짝 마른 목 축이기에 넉넉한 시간이다.
19. 1,102.1m봉을 내릴 때는 북사면으로 돈다
20. 1,102.1m봉을 내릴 때는 북사면으로 돈다
21. 1,102.1m봉
22. 뒤쪽 오른쪽은 흥정산
23. 청량봉
24. 용오름마을의 빙폭
25. 신나무
26. 쥐방울,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띄더니 자주 보인다
27. 검산리 뒷산의 해거름
28. 검산리에서 해거름에 바라본 운무산
첫댓글 아마도 올해 눈산행을 제대로 한 날이었던것 같습니다...인적도 드물어 오지의 내음이 물씬풍긴 산줄기였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생각보다 봉봉 오르내리는 굴곡이 심하여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꾸준히 산행하시며 산행기 쓰시는 일상이 대단하시네요. 그리고꼭 관련시발췌하려면 책도 읽어야 되고 시간이많이 걸리겠습니다 저는 2월 18일 설악 공룡능선에서 올해 처음 실컷 러셀된 눈 실컷 걸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