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藥圃先生文集卷之一 錦堂 / 詩
輓曺南冥先生
景仰曹夫子,林居道自尊。
終辭三聘幣,不改一簞飱。
扶起嚴陵節,治安賈傅言。
頭流萬仞立,千載典刑存
약포집 제1권 / 시(詩)
남명 조 선생을 애도하다〔輓曺南冥先生〕
輓=끌 만,애도할 만.만사(輓詞).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시가(詩歌)
조식 선생님을 우러러 흠모하나니 / 景仰曹夫子
산림에 계시며 도가 절로 높으셨네 / 林居道自尊
세 차례의 초빙도 끝까지 사양하고 / 終辭三聘幣
청빈한 초야의 삶 바꾸지 않으셨네 / 不改一簞飱
엄자릉의 절조로 강상을 일으키고 / 扶起嚴陵節
가 태부의 충고로 국가를 안정시켰네 / 治安賈傅言
만 길의 두류산처럼 우뚝 서서 / 頭流萬仞立
천년토록 본보기로 남으리라 / 千載典刑存
[주-D001] 청빈한 …… 않으셨네 :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말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일단사(一簞食)와 일표음(一瓢飮)을 남들은 못 견디건만,
안회는 낙(樂)을 고치지 않으니 훌륭하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주-D002] 엄자릉(嚴子陵) : 엄광(嚴光)으로, 자릉은 그의 자이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산 속으로 숨어 버렸다. 이후 광무제가 찾아내어 간의대부의 벼슬을 주었지만
끝내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주-D003] 가 태부(賈太傅) : 가의(賈誼)로, 태부는 벼슬이다. 중국 전한 문제 때의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약관에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태중대부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ㆍ관제ㆍ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해 많은 의견을 상주했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의 태부로 좌천되었다.
뒤에 회왕(懷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33세에 요절했다.
[주-D004] 만 …… 서서 : 남명 조식의 〈천왕봉〉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조식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남명의 〈천왕봉〉 시로 잘 알려져 있으나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에는 제목이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로 되어 있다.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請看千石鍾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특히 제3구는 후대에서 바꾸어 ‘萬古天王峯’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3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중종 21)∼1605(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출신.
현감 정원로(鄭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정교(鄭僑)이고,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