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1코린 15,1-8; 요한 14,6-14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3.5.3(수).; 이기우 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보여준 시행착오들은 뜻밖에도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들이 그분의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토마스 그리고 필립보가 그러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는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임을 밝히시자 정색을 하고 말리려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하는 호된 질책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무안하게 질책받은 덕분에 우리는 십자가를 빼버린 신앙 고백은 진정한 고백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지요.
또 십자가의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못 박힌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버티던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발현하셔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되다.”(요한 20,29) 하고 일깨워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이전에도 공생활 내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으셨고,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당신 자신을 일컬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을 토마스 덕분에 부활 후에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십자가의 상처를 보지 않아도 십자가와 부활을 합친 길이야말로 그분이 보여주신 길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필립보는 한 술 더 떴습니다.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다 듣고 나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요한 14,8)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어이없어지신 예수님께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고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진리요 생명이신 하느님의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어서 모든 제자들에게 더 이상 딴 말 하지 말라는 듯이 단언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2-13).
그런데 정작 당신보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실증해 보인 인물은 베드로나 토마스나 필립보 같은 열두 제자 출신의 사도들이 아니라, 박해자로 설치다가 뒤늦게 사도 대열에 합류한 바오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룩하신 성과보다 더 큰 성과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3년 동안 좁은 이스라엘 땅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으셨고 그 중에서도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사도 바오로는 20여 년에 걸쳐 세 번의 선교여행을 통해 드넓은 로마제국 강역 전체를 무대로 종횡무진 선교하러 다니면서, 에페소, 콜로새, 갈라티아 지방 등 소아시아 지역과 코린토, 테살로니카, 필리비 등 유럽 그리스 지역에 많은 공동체들을 세웠습니다. 그가 세운 공동체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이룩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생활(사도 2,42-47; 4,32-37)로 복음을 선포한 것을 이어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 사회적 실체였고, 끝내 신앙을 박해하던 로마제국을 신앙으로 무너뜨린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번개 빛과 천둥 소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래로, 이 공동체가 실제로 섬김과 나눔의 공동생활을 입증해 보일 때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케파에게 먼저 나타나셨고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으며,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6.8).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려던 바는 케파와 열두 사도들과 함께 5백 명도 넘는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에페소를 비롯한 각지에서 이룩한 초대교회의 공동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셔서 이룩하신 것임을 깨달았음을 두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도 공동체에서 나눔과 섬김의 공동생활에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그 생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복음의 진리성을 상기시키고자 이 편지를 써 보내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1코린 15,1). 그러고 나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코린 15,2) 라고 거듭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가 거듭 강조해 마지않은 ‘이 복음’이란 그가 코린토 교우들과 함께 세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두고 당부하는 것이고, 그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할 수 있으며, 성령의 이끄심도 체험할 수 있었던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세례로써 세상에서 죽은 이들이 공동체에서 부활하는 신비스런 이치를(1코린 15,12-34) 알려준 다음에 부활의 사기지은에 대해 자신이 받은 계시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1코린 15,35-58).
그런데도 우리가 토마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거나, 또는 베드로처럼 우리의 부활은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룬다거나, 그래서 결국 필립보처럼 공동체에 이루어질 주님의 발현과 사기지은을 믿지 못하겠다면, 저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같은 심정으로 그가 한 말을 되돌려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교우 여러분, 우리는 공동체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고정댓글: 위에서 인용한 1코린 15,6의 말씀, 즉 예수님께서 5백 명이 너믄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이제까지는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해석하여 묵상해 왔었는데, 오늘 독서를 묵성하면서 문득 초대교회 공동체 전체에서 각기 발현을 체험한 데 대한 표현으로 해석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니, 훨씬 더 현실성이 있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