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집에 보내는 편지
이안눌(李安訥)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을 말하고 싶어도
늙으신 어버이 근심하실까 걱정하여
산 그늘에 쌓인 눈 천 길이나 되는데도
금년 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알리네.
寄家書(기가서)
欲作家書說苦辛(욕작가서설고신) 恐敎愁殺白頭親(공교수살백두친)
陰山積雪심천장(음산적설심천장) 却報今冬暖似春(각보금동난사춘)
[역사이야기]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호는 동악(東岳)이다. 한시 창작에 주력하여 4,000 수의 시를 남겼다. 문집으로 『동악집(東岳集)』이 있다. 이안눌은 선조 40년(1607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4월 15일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다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다. 이 시는 당시 제삿날을 맞아 집집마다 들리는 고을 백성들의 곡소리를 듣고 왜구의 손에 유린당하던 당시 참상을 시로 남겨 생생한 역사적 사실을 후세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안눌이 29세(1599년) 되던 해 북평사로 부임해다음 해 귀경핸는데, 함경도 종성에서 사울레 계신 홀어머니께 편지을 써 보냈다고 한다.
동래전투(東萊戰鬪)
임진왜란 띠 왜군에게 동래성이 함락당한 전투. 1592년 4월 14일(음려걔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은 다음 날 오전에 동래성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경상좌병사 휘하의 병력과 인근 군현 소속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경상좌수사 박홍은 장비와 병력을 포기하고 도주하고, 울산에서 이동한 경상좌병사 이각 역시 왜군의 군세를 확인하고 헌자 도망을 했다.
당시 동래성에는 송상현과 홍윤관 수비지원으로 입성한 양산군수 조양규, 울산 군수 이언성 등이 이끄는 3,000여 병력이 있었으며 왜군은 2만의 병력으로 대치했다. 진주성을 포위한 왜군은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전면 공격을 가했다. 왜군은 동, 서, 남 3면에서 조총 사격을 하며 총공격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안의 백병전투에서 부녀자들까지 지붕 위에서 기와를 던지며 왜군을 부상케 하는 등 전 국민이 힘을 다해 성을 사수하려 하였으나 결국 부사 송상현 이하 대부분의 병력이 전멸했다.
조총(鳥銃)
조총이란 이름은 새가 숲에 앉아 있을 때 쏘아서 모두 떨어뜨릴 수 있다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조총의 총신은 약 1 미터이고 유효사거리는 100~200미터이며, 명중 거리는 50미터이다. 분당 4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 한시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